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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에 우리가 시골로 이사를 하려고 할 때 주변에서는 다들 의아해했다. 더구나 이사할 곳이 강화도라고 하니 어른들은 대놓고 걱정을 하셨다. 심지어 친정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못 살아서 난리인데 너거는(너희는) 와(왜) 촌으로 갈라 카노?" 하시면서 강화도로 이사 가는 우리를 못내 염려하셨다.

아버지가 그리 생각하신 데는 강화도가 섬이라는 점이 컸던 것 같다. 한 번도 강화도에 가보신 적이 없었던 어른들은 '섬'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만 생각하고 그렇게 걱정을 하셨던 것이다. 더구나 강화도는 북한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혹시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강화에 와보시고는 "강화는 섬이 아니네"라며 마음을 놓으셨지만, 어른들의 걱정은 한동안 우리를 당황케 했다.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

고려시대부터 바다를 메워 만든 너른 들에서 맛좋은 '강화섬쌀'이 생산됩니다.
 고려시대부터 바다를 메워 만든 너른 들에서 맛좋은 '강화섬쌀'이 생산됩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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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염려와는 다르게 우리는 강화도가 아이들을 키우며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이나 인천과도 그리 멀지 않으니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빠를 것이고, 더구나 자연이 오롯이 살아있는 곳이니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질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우리 당대만 생각한 게 아니라 후대까지 내다보고 강화도로 이사를 왔으니…. 우리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주변의 걱정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것일까.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살기 좋은 곳을 택하는 데 있어 풍수학적인 지리(地理)와 생리(生理) 조건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므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

즉, 넓은 들이 있어서 먹고살 걱정이 없는 곳이 살기에 첫째로 좋은 곳이고, 또 물길을 이용해서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기에 좋은 곳이 그다음이라는 말일 게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강화도만큼 살기 좋은 곳이 또 있을까.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들은 매우 넓다. 가구당 경작하는 토지 역시 넓다. 그래서 "한 해 농사지으면 10년은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질 정도로 강화는 농사가 잘되는 곳이다. 또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한데 모여 바다로 흐르는 곳이므로 어족이 풍부해 바다 농사도 잘된다. 그러니 <택리지> 식으로 보자면 먹을 게 많이 나오는 강화는 살기에 좋은 곳임이 분명하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는 육로를 통해서 물자를 운반하기에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수로를 이용해 세곡이며 물자들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갔다. 강화도 인근은 수로 교통의 요지이자 수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니, 강화 해협은 지금으로 보면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것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예성강과 그 앞바다를 기반으로 한 왕건이 세운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 인근 해역은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더구나 강화와 개경은 거리도 가까웠다. 두 지점간의 지표거리가 약 28km에 불과하니 리(里) 수로 따지자면 70여 리밖에 되지 않는 거리다. 서울에서 수원까지가 40km 정도라고 하니 강화에서 개경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게 개경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살기에도 좋은 곳이니 위기 상황이 닥치자 고려 조정은 강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 침략해오자 강화로 수도를 옮긴다.

13세기의 강화도는 지금과 달리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온 후 갯벌을 메우는 간척사업이 시작됐는데, 이 간척사업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됐습니다.
 13세기의 강화도는 지금과 달리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온 후 갯벌을 메우는 간척사업이 시작됐는데, 이 간척사업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됐습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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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에서 강화도를 보면 마치 둥글고 약간 길쭉하게 생긴 고구마를 닮았다. 해안선은 굴곡진 곳이 없이 미끈하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김포 반도와는 마치 손에 닿을 듯이 가까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거리가 저렇게 가까운데도 여몽전쟁 때 몽골이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천혜의 요새, 강화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강화도는 고려시대의 강화도와는 많이 다르다. 지금의 강화도는 오랜 세월 동안 바다를 메운 간척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땅이다. 원래의 강화도는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이 돼 있었으며 바닷가는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었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13세기의 강화도는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은 그 당시 '고가도'라는 섬이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강화 본도에 올망졸망 포도 알맹이처럼 달려 있었다.

강화해협은 지금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광성보의 용두돈대 앞바다는 특히 물살이 세 물이 밀려들어 오거나 빠져나갈 때면 마치 대나무밭에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쏴 쏴' 하는 물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바다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도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바다에서야 오죽하겠는가. 물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배를 몰 경우에는 저절로 오금이 저려서 사색이 될 것 같다.

또 밀물과 썰물이 들고날 때면 물의 높낮이가 물경 10m에 가깝게 차이 나기도 한다. 그러니 물때를 잘못 알고 썰물에 배를 몰 경우에는 꼼짝없이 바다 한가운데 갇혀 버리는 수가 생길 수도 있고, 또 잘못하면 배끼리 부딪혀서 파손될 위험도 있다.

물이 빠진 강화해협의 바닷가 모습입니다.
 물이 빠진 강화해협의 바닷가 모습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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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이 아니다. 바닷가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거나 아니면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이 끝없이 펼쳐진다. 갯벌에는 밀물이면 물이 먼저 차오르고, 썰물 때는 가장 나중까지 물이 남아있는 갯골이 있어서 설혹 걸어서 갯벌을 빠져나가려 해도 갯골 때문에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 그러니 강화로 들어온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나 진배없다.

강화 앞바다의 이러한 점 때문에 강화는 천혜의 요새였다. 요새의 주된 목적은 방어이므로 적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해야 하며 또 적의 동정을 관찰하기에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 바닷가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은 적이 타고 올라올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진지를 쌓으면 적의 동정을 살피기에도 유리했다. 또 유사시에는 바다를 향해 대포를 쏘며 적을 격퇴할 수 있고, 또 갯벌에서 허우적대는 적들에게도 화살을 쏘아 물리칠 수 있으니 강화는 하늘이 내린 요새가 분명했다.

그래서 고려는 위기에 처하자 강화도를 선택했다.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에게 강화도를 권한 사람은 황해도 풍덕군(지금의 개풍군)의 승천부 부사 윤린이었다. 

"강화는 가히 난(亂)을 피할 만합니다."

윤린의 말을 듣고 최우는 강화로의 천도를 결심한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찮았다. 태조 임금(왕건)부터 시작해 200년을 이어온 개경을 두고 강화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선뜻 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우는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고종에게 강화로의 천도를 종용해 마침내 1232년 7월에 결행한다. 

또 다른 전장이었던 강화 오는 길

강화 앞바다는 물이 빠지면 끝없는 갯벌이 펼쳐집니다.
 강화 앞바다는 물이 빠지면 끝없는 갯벌이 펼쳐집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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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여름에 집중호우가 내리는데 800년 전 그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좋은 계절을 다 두고 왜 하필이면 장마철에 움직였을까. 그러니 도중에 애로가 많았을 것은 안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근 열흘간 비가 온 뒤라서 길은 온통 진창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으니 그 길이 오죽했겠는가. 진창에 자빠지고 넘어져서 행렬은 온통 뒤엉켰을 것이다. <고려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록해놨다.

"드디어 천도하니 때마침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졌다.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벼슬아치와 양가(良家)의 부녀들도 신발을 벗고 갈 지경이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사람들이 강화로 오는 길을 떠올려 보자니 문득 텔레비전 화면에서 봤던 동물들의 이동이 생각났다. 아프리카 대평원에 사는 '누'라는 동물은 뜯어먹을 풀이 부족해지면 살 곳을 찾아 대이동을 한다. 수십만 마리의 누 떼가 살 길을 찾아 평원을 달려 강 근처까지 온다. 그 강은 깊을 뿐만 아니라 악어가 살고 있어서 위험하다. 누 무리는 잠시 멈춰 갈등을 하지만 이내 강물로 뛰어든다. 강을 건너야 새로운 초지(草地)로 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강에서는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지만, 대부분은 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에 도착한다.

개경을 떠나 강화로 오기까지의 여정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한꺼번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움직였으니 어찌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또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어미를 잃어 울부짖는 어린 아이들과 자식을 찾아 헤매는 어미들, 그리고 다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강화로 오는 길은 아비규환의 또 다른 전장(戰場)이었을 것이다.

정강이까지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 강화도를 지켜주었습니다.
 정강이까지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 강화도를 지켜주었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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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강화로 온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본토에 남은 고려의 백성들은 잔학한 몽골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가 됐다. 다행히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또 언제 몽골이 쳐들어올지 몰라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화로 온 30여만 명의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니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강화는 어떠했을까? 개경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강화는 공황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어쩌면 재앙에 가깝지 않았을까. 살던 곳을 빼앗겼을 수도 있고 또 각종 부역에 끌려다니느라 살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궁궐을 짓고 성(城)을 쌓느라 뼈가 닿도록 일을 했을 것이며 또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간척사업에도 투입이 됐을 테다. 그러니 강화에 살던 사람들에게 천도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이야 민주화된 사회이니 국가가 임의로 국민의 땅을 갈취하는 일은 없다. 만약 필요에 의해 땅을 수용할 경우에는 적정한 보상을 해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왕정시대에 백성은 얼마나 나약했던가. 800년 전 고려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대궐과 고관대작들이 살 집을 짓기 위해 백성들의 땅을 빼앗지는 않았을까. 억울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강화 사람들에게 천도는 재앙일 수밖에 더 있겠는가.

고려의 강화 천도, 재앙이었다

시원스레 뻗어있는 들길을 걸어가는 나들길 길벗들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시원스레 뻗어있는 들길을 걸어가는 나들길 길벗들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 박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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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려시대 인구는 얼마쯤 됐을까. 현재 남·북한 인구를 모두 합해서 약 7400만 명이라고 하는데 800년 전 고려의 인구는 몇 명이었을까.

중국의 <송사>(宋史)라는 책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총 인구수는 "남녀이백십만구(男女二百十萬口)"란다. 당시의 호구조사는 역(役), 즉 군역이나 부역의 부과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대상이 아닌 어린이나 노인들은 호구조사에서 제외가 됐을 게다. 따라서 실제 인구는 이보다 더 많은 300만 명 정도가 됐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개경의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의 인구는 30만~50만 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개경은 아주 큰 국제도시였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 도시들을 보면 인구가 몇만 명에 불과한데 개경은 30만 명이 넘었으니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개경 사람들이 천도 때문에 거주지를 옮겼으니 강화는 졸지에 거대 도시가 되고 말았을 게다.

강화도는 동서의 길이가 약 12km이고 남북으로는 약 28km에 달한다. 총 넓이는 약 300㎢인 섬이다. 제주도와 거제도 그리고 진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몽골의 침략을 피해서 고려 정부가 천도를 한 당시에는 지금처럼 큰 섬이 아니었다. 지금의 모습은 간척 덕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넓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들이 넓지 않았다.

이런 곳에 갑자기 몇십만 명이 몰려들었으니 고려궁궐이 있던 강화읍 인근은 그야말로 처마에 처마가 꼬리를 물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불도 자주 났다고 한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강화에 불이 나 집이 다 탔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온다.

(1234년) 정월에 큰바람이 불고, 대궐 남쪽 동네 수천 호의 집이 불에 탔다.
(1245년) 3월에 강도(江都, 강화도)의 견자산(見子山) 북쪽 민가 800여 호가 불이 나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고, 연경궁까지 탔다.

불이 자주 나서 궁궐까지 타는 일이 발생하자 근처의 민가들을 헐어서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보장처 강화도', 지금도 유효한가

한해 농사를 앞둔 들판은 고요합니다.
 한해 농사를 앞둔 들판은 고요합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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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수도가 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다수가 부동산값이 상승할 것이라며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왕조시대에 힘없는 백성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으니, 강화 천도 당시 강화 사람들은 살던 집과 땅을 빼앗긴 채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게 축복일까? 재앙이다.

몽골은 근 30년에 걸쳐 여섯 번이나 우리나라에 쳐들어왔지만 끝내 강화도는 침범하지 못했다. 비록 본토는 몽골의 말발굽 아래 도륙이 났지만 강화로 옮겨왔기 때문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강화로의 천도가 최씨 무신 정권을 보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크게 보면 나라를 지켜낸 슬기로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거대 강국 몽골과 대적해서 버텨냈으니 고려는 '골리앗에 맞서 싸운 다윗'에 견줘도 결과 과장된 말은 아닐 게다.

지난 3월 31일 주요 뉴스는 북한군의 연평도 인근 앞바다 포격 사건이었다. 태평성대인 듯한 이 시절에도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주변 분위기는 예전에 비해 차분한 듯하다. 일전에 남북한 사이에 무력 도발이라도 일어나면 고향 친지들은 우리에게 안부 전화를 하곤 했다.

"너거 사는 데는 별일 없나? 연평도에 난리가 났던데 강화도는 괜찮나?"

나라의 보장지처(保藏之處)였던 강화도가 지금은 이런 걱정을 듣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였던 나라가 분단되면서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강화도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만약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배로 오가는 시절이 다시 온다면 강화도의 처지가 좀 나아질까. 온갖 외침을 다 이겨낸 슬기로운 우리 민족이니 지금의 분단 상황도 잘 풀어나갈 것이라 믿는다.

바다에서는 포탄이 날아다녔지만 강화의 들판은 고요한 가운데 바쁘다. 올해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있으니 농부들의 마음은 바쁠 것이다. 천년만년 이어져 내려갈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보장처(保藏處) 강화는 오늘도 조용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태그:#강화도, #강화나들길, #고려,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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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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