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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도시> 표지
 <빨간도시> 표지
ⓒ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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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럽의 건축물을 매우 좋아한다. 역사의 흔적을 고스라니 담고 있는 유럽 건축물의 기품과 고상함을 좋아한다. 수천 수백 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건축물을 사진으로만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반면 대한민국의 건축물에는 전혀 감흥이 없다. 기품이나 고상함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에 내가 감탄했던 기품이나 고상함을 가진 건축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건축물은 나의 일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유적·사적지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나의 생각들이 대한민국 건축물에 대한 혐오까지 이어질 즈음, <빨간 도시>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내가 대한민국 건축물에서 느꼈던 바를 명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건축물에 담긴 역사, 그곳에 담긴 의미, 대한민국이 홀대하는 건축물에 대한 역사성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었다. 왜 대한민국의 건축물이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려주는 책이었다.

건축물에 담긴 의미

"연병장, 사열대, 막사. 병영은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둘러쳐진 담장은 자발적이지 않은 체류자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군대를 유지하는 도구는 규율, 복종, 감시, 처벌이다. 간판만 바꿔 달면 병영은 학교가 된다. 운동장, 구령대, 교사.(33쪽)"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일 때까지. 총 12년을 학생으로 있었지만 내가 학생으로 속해 있을 때는 학교가 병영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에 관한 여러 이론을 접하면서 대한민국의 학교가 대부분 군대문화에 젖어 있고, 학교라는 건축물 역시 병영을 모방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건축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이승복의 동상은 당시 군사정권이 국민들에게 반공주의를 어릴 때부터 교육시키려 했던 의도가 담겨져 있고, 양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검찰청과 법원은 그 두 기관 사이의 힘 싸움을 암시한다. 건축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건축의 역사성

앞서 내가 유럽의 건축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 건축물에 고스라니 담긴 역사적 흔적 때문이라고 말했다. 건축물에는 그 건축물이 지어진 당대부터 시작해 여러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것은 그 건축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숭고함을 준다. 이처럼 오랫동안 남아있는 건축물은 하나의 역사서나 다름없다.

최근 내가 생활하고 있는 부산에서 개인적으로 경악할 만한 소식을 들었다. 부산 서면에 있는 부전도서관을 허물고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발한다는 안이 통과됐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옛 것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무조건 새 건물을 짓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드나들었던 흔적이 그대로 소멸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니 이 앎이 분노로 변했다.

부전도서관은 부산 최초의 공공도서관으로 상당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낡은 것은 무조건 새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논리는 이 역사성을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부전도서관 재개발 안이 통과된 일은 건축물에 담긴 역사성을 무시하는 처사다. 이 상황은 역사가 재미없고 지루하다며 천대받는 현 대한민국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는 건축물

"부서진 정동진이 서러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서진 한계령 휴게소가 서러운 이유는 건물에 배어든 건축가의 꼼꼼함도 일거에 묻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을의 여행에서도 먹고 마시고 사진 찍고 돌아가면 그만인 서글픈 우리의 여행 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73쪽)"

"음악은 시작되었어도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 아무리 연주회 전에 당부를 해도 기어이 전화 벨소리를 울리고 카메라를 꺼내드는 모습, 연주자의 팬 사인회가 있다고 하면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 줄 서러 나가는 모습,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문화는 꼭 그 정도의 건물을 요구하고 얻어낼 따름이다. 그래서 건축은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88~89쪽)"

책에서 주요하게 언급하는 것 중 하나는 건축물에 담긴 국가의 문화적 수준이다. 저자는 산발적인 건축물들이 표현하는 부서진 정동진, 건축가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지어진 한계령 휴게소의 모습, 문화를 제대로 누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 등은 한 국가의 문화 수준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서울의 새빛둥둥섬, 서울시청 신청사 등 최근에 지어진 많은 건축물이 문화적인 고려 없이  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건축도 하나의 문화예술이다. 그것은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역사성이 담긴 건축물로써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처럼 문화적인 고려 없이 새로운 건축물을 난발한다면 아무런 특색 없는 국가, 아무런 역사성을 가지지 못한 국가가 될 지도 모른다. 건축은 그만큼 중요하다.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하는 도시

"도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새로운 제안을 통해 계속 변화해 나가야 한다. (중략) 그러나 도시는 선택받은 강자에게 맡겨진 스케치북이 아니다. 전당포 노파에게 도끼날을 들이댈 자격을 지닌 시장과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해야 한다. 들춰보면 과거의 증언이 들려야 한다.(123쪽)"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다. 바로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해야 한다"는 문장이다. 내가 봐왔던 대한민국의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하기 보다는 부수고 새로 짓는, 소위 말하는 재개발의 논리로 발전해나갔다. 그래서 도시의 역사성은 단절되고 끊임없는 새로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도시의 성취는 몇십 년의 세월로 판단하기 어렵다. 평가는 수백 년 넘는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그 시간은 로테르담에도, 그리고 우리 도시에도 공평하게 적용될 것(203쪽)"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도시의 진정한 성취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해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대한민국의 한 건축가가 얼마나 건축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건축가가 대한민국에 존재하기에 대한민국 건축의 미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에 남겨놓을 책임을 갖고 있다(295쪽)"는 말처럼 저자 스스로도 당대의 모습을 대한민국에 반드시 남겨놓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 http://picturewriter.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빨간 도시 - 건축으로 목격한 대한민국

서현 지음, 효형출판(2014)


태그:#건축철학, #대한민국 건축,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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