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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

동네 꼬마가 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자 씁쓸한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약 두 달 전 나는 텔레비전에 나온 일이 있었는데,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모 공중파 방송국의 취재 프로그램이었다. 재작년 가을 내가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때, <오마이뉴스> 기사를 본 방송작가가 처음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왜 제주도로 가는가'라는 게 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이 육지를 떠나 제주도로 이주하는 현상에 대해 몇 사람 정도 인터뷰하고 취재하겠다는 것이다.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방송 계통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야, 나 이거 해도 되는 거냐?"
"… 음 글쎄... 난 가족이 방송출연한다고 하면 아마 말릴 거야"
"근데 나 방송 나오면 엄마·아빠가 좋아하실 거 같긴 한데…."

잔뜩 기대했던 아빠의 첫 방송출연... '방금 뭐가 지나갔냐'

재작년 방송분 <그들은 왜 제주로 가는가?>.
 재작년 방송분 <그들은 왜 제주로 가는가?>.

어릴 적 그런 기억이 있다. 회사원이셨던 아빠가 무슨 이유에선지 <9시 뉴스>에 나온다고 했다. 아빠는 집에 오시자마자 흥분해서는 온 친척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가 이따 아홉 시 뉴스에 나올 거니까 다들 잘 봐!"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나는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빠의 모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빠는 앵커가 앉아있는 데스크 뒤로 배경처럼 훅 지나갔다. 그걸로 상황 종료였다. 예전의 어느 광고 속 멘트처럼 '방금 뭐가 지나갔냐' 싶은 상황이었다. "이게 다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아마 오빠와 나는 하지 않았을 거다. 어려도 눈치는 있는 법이므로.

공중파 방송에 나온다는 것이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며, 쓰라린 방송 출연의 트라우마(?)를 갖고 계실 아빠가 내가 제주도에 사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보신다면 날 더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린 나는 결국 방송작가에게 반 정도 승낙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내려오시게 되면 말씀 더 나눠 보죠."

당시 살던 대평리의 집으로, 내 또래의 방송작가는 나이 지긋한 부장급 기자와 같이 왔다. 그런데 피디가 저 멀리서 이미 나를 향해 카메라를 돌리며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이게 뭥미'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게 무작정 시작된 인터뷰는 내 하루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거기에 '그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민망한 연출도 부탁했다. 흐뭇한 얼굴로 창가에 서서 한라산을 바라본다든지, 대평리 바닷가에 가서 책을 보는 어이없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대체 누가 바람 작렬하는 제주도 바닷가 갯바위에 앉아 책을 본단 말인가! 머리카락이 날리고 책장이 날려서 도저히 책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내가 사는 모습을 찍어간 그들은 일 년 만에 다시 나를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는 제목이 '제주 이민, 그 후… '라고 했다. 작년 촬영한 사람들을 위주로 해서 후속편을 만든다는 것이다. 원래 진행하던 아이템이 펑크가 나서 급하게 이렇게 됐다며, 웬일로 작가가 아닌 부장 기자가 직접 전화를 해 와서는 재출연을 부탁해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가 사는 저지리의 집이자 운영 중인 쉐어하우스로 걸어들어와 악수를 청했다. 신년부터 내가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그들은 지난 일 년간 나의 제주살이에서 궁금한 것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다시 시작한 직장생활이 힘들지 않은지, 제주에서 사는 게 힘들지 않은지 캐물었다. 

서울에서 '좋은 직장'을 때려치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다시 직장에 다닌다, 라는 것이 그렇게 이상해 보였을까. 평생 직장 안 다니며 놀고 먹겠다는 목표로 제주도에 내려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나는 하고 싶은 얘기들을 했다.

"쉐어하우스를 운영하며 제주도에 와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고, 마을 이웃들과 밴드를 만들어 종종 공연하며, 지금은 일종의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서로 도와가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

지금 일하는 곳은 생협이고, 육지보다 월급이 적지만, 제주도 평균 수준이며 일이 의미 있고 야근 없이 칼퇴근하여 저녁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방송 보고 분노의 소줏잔을 들이켠 이유

지난 2월 24일 제주시청 앞에서 있었던 국민총파업 지지공연에 저지리 마을사람들과 결성한 밴드 '문제'로 참여해 노래했다.
 지난 2월 24일 제주시청 앞에서 있었던 국민총파업 지지공연에 저지리 마을사람들과 결성한 밴드 '문제'로 참여해 노래했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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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가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것까지 찍어가더니(매일 하는 설거지가 그렇게 안 돼 보이게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대체 설거지가 그렇게 우울한 일이란 말인가!) 내가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하고, 도시락을 싸서 차를 끌고 출근하는 모습을 구태여 찍어야겠다며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찾아왔다.

세차게 눈발 날리는 출근길에 동행한 그들은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그림까지 찍어야겠다길래,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회사에 민폐일 수도 있으니 어렵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을 급하게 찍고서야 만족한 듯 돌아갔다. 

이웃들과 저녁을 먹으며 방송을 봤다. 그리고 방송을 보고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분노의 소주잔을 들이켰다. 인터뷰한 다른 이들과 나는 생각 없이 제주도로 무작정 내려가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는 실패자가 되어 있었다.

작년 방송 출연자 중 식당을 운영해서 대박이 난 이주민은 출연자에서 제외되었고, 제주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간 경우로 그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내가 한 얘기 중 긍정적이고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전부 편집되었고, 부정적인 부분만이 확대되어 짜맞춰져 있었다.

우리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힘겹고 가난해 보이도록 포장되어 있었으며 사실이 아닌 부분들도 기자는 멘트로 떠들고 있었다. 지인인 다른 출연자는 서울에서 방송을 본 선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전화했다고 했다.

"너 괜찮냐?..."
"나 잘 살아요, 형!"

살면서 그런 전화는 처음 받아보았다며 분개했다. '서울에서 고연봉의 직장생활을 접고 제주도로 내려갔지만,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조남희씨'(방송 속 멘트), 다음날 밀려오는 분노에 참지 못하고 방송국에 전화했다.

"부장님, 어떻게 그렇게 편집을 할 수 있습니까?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습니까?"
"아니 왜 그러는 건데요. 내가 조남희씨가 말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방송을 만들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 어쨌든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하게 됐습니다."

결국, 전화상으로 사과를 받긴 했지만, 전국 방송의 후유증은 있었고 나의 분노는 며칠 동안 사그러지지 않았다. 그 방송국은 나의 적이라며, 너희는 왜 그러느냐며 괜히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성질을 부렸다.

"내가 그러니까 하지 말랬지. 근데 그 부장이 뭐랬다고? 우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랬다고?... 방송이란 게, 서로 생각이 달라서, 그렇게 되기 쉬운거야..."

조그마한 땅을 샀고 건물을 올려 게스트하우스를 하려는 꿈을 꾸지만, 자금이 부족해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이, 서울에서보다 제주에서 예술적 영감을 더 얻을 수 있다고 믿어 남편과 함께 내려왔고 마을에 자리잡아 천천히 그 구상을 펼쳐나가고 있는 이(우리집 쉐어하우스 여자1호 예술가, 유라다),  그리고 나.

왜 우리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사는 이주민들로 그려졌을까. 우리가 육지에서 내려온 지 일 년 만에 어떻게 살고 있어야, 그들 눈에 성공적 정착을 한 이주민들이 되는 걸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관리인 두고 펜션 운영하면서 낚시나 다니고 있든지, 억대 연봉을 실현한, 도시 출신의 '간지'마저 넘치는 귀농계의 행운아가 되어있든지, 밀려드는 손님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대박 난 식당을 운영하는 정도는 되어야 했던 걸까.

아빠의 방송 트라우마를 내가 도리어 심화시킨 게 아닐까

제주도에 내려와서 산다면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방송은 내게 후속 취재 1년 만에 인생의 결론을 바란 것 같지만, 나는 아직 삶을 살아가는 중이고 그들의 기준에 끼워 맞추는 삶을 살 생각도 없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결론을 요구할 자격이 그들에게 있는 것도, 그런 권리를 그들에게 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안 하시는데 말이다.

아빠의 방송 트라우마를 내가 도리어 심화 시킨 게 아닐까 싶지만, 방송 후 다음날 아빠에게서 이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우리 딸, 방송 잘 봤다. 네 뒤에는 항상 엄마·아빠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분노는 다행히 그렇게 애틋하게 승화될 수 있었다.

차귀도
 차귀도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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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제주도, #제주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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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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