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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벽두를 달군 사건 중 하나는 김정일이 방중한 것이었다. 1월 20일 베이징에서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그는 대부분 상하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10년 만에 천지개벽한 푸동 지구와 증권거래소, 창지앙 하이테크 개발지역 등을 봤다. 김일성 시대부터 북한 지도자의 중국 방문은 언론에서 흥밋거리였다.

중국은 북한지도자의 방중 일정은 물론이고 방송에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하지만 이런 뉴스에 관해 특종을 잡는 언론사는 꼭 있었는데, 가장 유능한 곳이 일본 니혼TV였다. 이후에도 니혼 TV는 김정남 인터뷰를 했다.

2001년 김정일의 방중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 김정일의 방중은 신의주와 압록강을 잇는 이 다리를 비롯해 3곳을 통해 시작된다. 따라서 방중설이 나오면 무엇보다 이곳에 긴장이 감돈다.
▲ 신의주와 단동을 잇는 압록강 철교 비행기를 타지 않는 김정일의 방중은 신의주와 압록강을 잇는 이 다리를 비롯해 3곳을 통해 시작된다. 따라서 방중설이 나오면 무엇보다 이곳에 긴장이 감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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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김정일 방중을 둘러싸고 가장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은 '북한 개방'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다음 해인 2002년 9월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양빈(楊斌)을 신의주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중국이 양빈을 탈세혐의로 체포하면서 북한의 개방 의지는 꺾였다.

북한음식점 종업원들은 서빙과 공연을 같이 한다. 베이징 한 음식점에서 공연하는 모습.
 북한음식점 종업원들은 서빙과 공연을 같이 한다. 베이징 한 음식점에서 공연하는 모습.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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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북한은 별로 먼 곳이 아니었다. 2000년 3월 중국에서 새 학기가 시작됐을 때 우리 반에는 북한 유명 공대에서 교원이었다가 기술 연수를 오신 북한 형님 3명이 있었다. 스물 다섯 명의 학생 가운데 대부분이 한국인이고, 일본인 남학생 2명, 몰도바에서 온 여학생 한 명이 있었다.

나도 서른이 넘었고, 그 북한 형님들도 마흔이 된 나이여서 처음에는 서로 서먹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과자나 커피를 나누며 서서히 친해졌다. 학기가 끝날 때는 톈진대학 안에 있는 작은 북한 음식점에서 송별식을 했는데,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가깝고도 먼 심리적 거리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다.

중국 내륙에조차 봄바람이 불던 시기, 중국과 미국 관계에 두고두고 복잡한 심사를 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4월 1일 오전 9시경 일본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출발한 미군 EP3 정찰기와 중국 인민해방국 소속 F8 전투기 2대 간에 추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중국 전투기 한 대와 미 정찰기의 날개가 부딪쳤고, 미국 정찰기는 중국에 허가를 받지 않고 9시 33분쯤 하이난 공항에 착륙했다.

정찰기 안에 있던 미군은 한참을 버티다가 기체 밖으로 나와 감옥에 수감됐다. 이후 양국 간에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중국은 실종된 조종사 왕웨이에 대한 추모 열기 등을 이용해 미국의 행위를 비인도적인 도발로 몰고 갔고, 미국은 이 갈등이 일어난 곳이 중국 영공 19km 밖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난에 불시착한 미국 정찰기가 귀국하는 모습.
 하이난에 불시착한 미국 정찰기가 귀국하는 모습.
ⓒ 중국정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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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갈등은 11일 만에 미군들이 송환되고, 3개월 만에 미군 정찰기가 해체 귀환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미국 정보기술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정찰기가 3개월 동안 중국에 있었다는 것은 미국을 뜨끔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중국은 2010년 이후 젠-20 등 최첨단 스텔기를 선보이고, 무인정찰기를 수출하는 등 무기 산업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올림픽 앞둔 중국은 한국의 올림픽 경험 전수 요청

2001년 7월 13일에는 베이징이 200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숫자인 8이 겹친 88년 올림픽 유치에는 한국에 밀려 실패했지만, 새 밀레니엄의 첫 8자가 들어간 해에 유치한 것이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많은 도움을 주면서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듯이, 올림픽을 앞둔 중국은 한국의 올림픽 경험 전수를 요청했다. 스포츠를 통한 외교 교류가 한중 정치, 경제 교류로 곧바로 연결되어 다양한 부대 효과가 발생했다.

삼국지 취재 중에 만난 한중의 천진난만한 아이들. 이들이 중국의 미래다.
 삼국지 취재 중에 만난 한중의 천진난만한 아이들. 이들이 중국의 미래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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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부터 나는 중국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기자 시절 인연이 있었던 <오마이뉴스>에 중국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초부터 '책 들고 떠나는 중국 여행'을 연재했다. '톈진과 무진기행'로 시작된 이 기획은 한 도시와 가장 어울리는 책을 선정하고, 책과 도시를 같이 읽어주는 식이었다. (관련기사: 책 들고 떠나는 중국 여행)

중국에 온 지 1년 반 정도 지난 나로서는 수박 겉핥기 같은 무리한 시도였지만, 그나마 책이라는 코드가 있어서 가능했다. '친황다오와 기형도 시집', '황산과 중국신화 전설' 등 25개 지역과 책 한 권을 묶는 기획이었다. 나로서는 책과 도시에 대한 정보를 깊게 볼 수 있었다.

이 연재는 이후 단행본 <중국 도시기행>으로 묶어 나왔다. 사실상 내 첫 책이었다. 이후 일 년에 한 권 꼴로 책을 출간하다가 2010년 <오감만족 상하이>까지 12권의 중국 관련서를 출간했다. 어느 인터뷰에 밝혔듯이 내 책이 만들어지기 위해 희생된 나무에 미안한 면도 있지만, 글과 사진 등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내 생활이었다.

한국에 여름이 깊어갈 무렵인 7월 8일 한 신문에 당대 인기작가 이문열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칼럼이 실렸다. 추미애 의원과 이문열 작가 간 견해로 시작된 이 논쟁은 이문열 작가 책을 반품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그러자, 이문열 작가는 유적을 파괴한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행동에 이 사건을 비유했다. 이후 이문열 작가가 일련의 상황을 담은 소설을 출간하면서 더 논란이 되었다.

그해 9월에는 여행가 한비야씨가 중국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중국견문록>을 출간했다. 중국 현지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 부족하다는 혹평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이 책은 그간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월 17일에는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이 공식 합의됐고, 11월 10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정식회의에서 가입안이 공식통과됐다. 장장 15년간에 걸친 중국의 노력이 빛을 본 것이다. 개혁개방이 한참 진행되던 1986년 7월 중국은 서방으로 가는 문을 열기 위해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의 문을 두드렸다.

실무회의가 진행되던 1989년 6월 톈안먼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지부진해졌고, 1994년 가트의 후신인 WTO가 탄생했다. 이후 중국은 지속해서 문을 두드렸지만,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1년 11월에야 대만과 함께 정식으로 WTO에 가입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비사회주의 국가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10월에는 중국 축구대표팀이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한 경기가 열렸다. 조추첨에서 가장 막강한 라이벌인 한국과 일본이 빠진 상태라 큰 이점을 보았다. 그동안 월드컵은 물론이고 올림픽 본선 무대조차 밟은 기억이 까마득했던 중국으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본선 확정 경기가 벌어진 10월 7일, 선양 우리허(五里河) 체육관은 44년 월드컵 도전의 숙원을 풀었다는 기쁨으로 인해 축포가 끊이지 않았고, 중국인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2002년 중국 축구가 약세 면치 못한 이유는

당시 중국 대표팀을 맡았던 감독 밀루티노비치는 한순간에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후 한국에서 주로 경기를 벌였던 본선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는 참패를 당해 그의 위치가 급전 직하했지만, 당시 밀루의 일상부터 중국 축구 기자와의 연애 등은 최고의 가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 축구의 수준이었다. 나는 중국에 도착한 후 축구잡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어서 중국 축구의 흐름을 유심히 볼 기회가 많았다.

수십 개에 달하는 축구 전문학교의 번성, 한국 프로축구를 능가하는 중국 축구선수들의 연봉 등 중국 축구 산업은 상당히 갖추어져 있음에도 성적은 형편이 없었다. 특히 그때까지도 1978년 이후 A매치에서 한국을 이기지 못해 공한증(중국 사람들이 한국축구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을 갖고 있었다. 공한증은 2010년 2월 허정무호가 도쿄에서 3-0으로 지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중국 축구는 월드컵 무대는 물론이고 올림픽 본선으로 가는 길에 대부분 좌절했다.

중국 축구가 약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풀이된다. 우선, 일찌감치 부를 거며 쥐어 정신력이 약해졌다는 평가다. 현재 중국 프로축구 지아A 선수 가운데 연봉 200만 위안(한화 3억 5천만 원 가량)을 넘는 선수는 30명 가량이다. 따라서 경기보다는 자신의 부상을 막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축구 선수들의 지역 안배가 우수 선수를 뽑는 데 단점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중국에서 축구에 소질을 보이는 선수는 대부분 지린, 랴오닝, 산동 쪽 선수들이 많다. 전통적인 축구 강팀도 따리엔, 완다나, 산둥, 루능 등이다. 하지만 대표님 선수를 이 지역으로 채울 경우 중국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 국가 대표는 다양한 지역에서 나온다. 또 중국 축구협회 등은 수차례 수뇌 사건에 휩싸일 만큼 선수 선발 과정의 문제도 지적됐다.

베이징의 대대적인 철거령이 진행중임에도 춘지에를 맞아 다오푸를 붙여놓은 베이징 치엔먼 인근의 가정.
 베이징의 대대적인 철거령이 진행중임에도 춘지에를 맞아 다오푸를 붙여놓은 베이징 치엔먼 인근의 가정.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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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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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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