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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
"야가, 뜬금없이 먼 소리 하노."

2주 전, 나의 친구가 딸을 낳았다. 그녀는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었다. 임신을 한다고 해도 노산이라는 말을 듣고 몸 관리에 신경을 썼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로 음식도 가려 먹고, 좋은 생각에 아름다운 것만 보려 애쓰는 등 임신부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했었다. 그 친구가 드디어 딸을 낳았다.

돼지우리에서 태어난 다섯째 딸, 그게 나

초음파 검사가 보편적이지 않던 그때, 엄마는 나를 품고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단다.
 초음파 검사가 보편적이지 않던 그때, 엄마는 나를 품고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단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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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출산 소식을 듣고, 나의 출생이 문득 궁금해졌다. 딸을 임신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를 보며 내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어땠는지 알고 싶어졌던 것이다.

나의 엄마 신 여사는 나를 서른하나에 낳았다. 그러니 그녀도 나를 낳을 당시에 노산이었다. 내리 딸만 넷을 낳았던 그녀는 아들을 낳기 위해 절에 가서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호랑이나 곰처럼 백 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고 살라 해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니 그 바람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었다.

"엄마, 근데 내 태몽은 뭐였어? 태어날 때 어땠어? 시간은 언제고? 내가 들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궁금하네."
"옛날에는 다 그랬지. 누가 시간을 재고 그라나. 병원 가서 낳은 것도 아인데."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초등학생 4학년이었던 나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네 집에는 돼지우리가 있었다. 그 돼지우리는 예전에 누군가가 살던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나를 본 친구의 엄마가 말했다.

"야야, 니가 여짜서 태어났다 아이가. 너거 엄마한테 물어 보래이 맞을 끼다. 니는 몰랐는 갑네."

'내가 돼지우리에서 태어났다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나서 집으로 와 버렸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다 잠들었다. 그 뒤로 그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 돼지우리에서 태어나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 모든 일들을 잊혀졌다.

"내 친구들은 태몽 이야기며 몇 날 몇 일 몇 시에 태어났는지 자세히 알고 있던데. 엄마가 얘기 해 줬다고. 나는 뭐 없어?"
"그때는 다들 집에서 태어 나가꼬 그런 거 모를 텐데. 태몽은 기억이 안 나지. 니가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태어났을 낀데. 내가 그걸 우째 기억하노."

"뭐야, 태몽도 없고 태어난 날짜도 정확하지 않다고 하고 시간도 대충이네."
"알면 뭐 하노. 그런 거 다 미신이다. 내는 니 태어났을 때 딱 죽고 잡드라. 그건 기억난다. 정말 죽고 잡은 생각밖에 안 했다."

"엄마! 얘가 태어났는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엄마가 어딨어. 그리도 딸이 싫었소?"

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딸만 태어났다. 그는 속상함에 술만 마셨고, 출산일이 다가오면 술을 마시느라 집을 비웠다. 아내가 언제 출산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자식, 그게 나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옛 사람들이 그러하듯 아들을 낳고 딸을 낳는 것은 여자의 문제라고 생각하셨단다. 딸을 자꾸 낳는 것은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 여기며 엄마 탓을 해댔다고 했다.

"계속 딸만 나오이 우짜노. 이번에 딸을 낳으면 죽이 삘라 켔드마는. 그라지는 못하겠고 내가 죽고 잡은 생각만 드는데. 징말로 미치것드레이."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엄마는 기대에 부풀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아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처럼 어느 시기가 지나 딸인지 아들인지 넌지시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있다 해도 시골에서 병원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거리와 비용을 생각하면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태몽도 없어. 아들이 아니면 콱 죽이려고 했다질 않나. 나는 뭐 축복 받은 자식이 아니잖아. 그러면 뭣 하러 나를 낳았어?'

그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자식으로서 이런 말을 부모 앞에서 내뱉을 수 있을까. 그저 세상에 고개를 내밀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

"그라도 니는 아부지가 받았다 아이가. 니가 처음이다."
"엄마, 뭐가 처음이라는 거야?"
"니 아부지는 아 낳을 때만 되면 집에 없었다 아이가. 그 시간에 술이나 마실 줄 알았지. 우데 집에 있을 라고 하나. 근데 니 나을 때는 집에서 지키보고 있었다 아이가. 니가 처음이다. 처음."

엄마가 혼자 방에서 산고의 고통을 치르고 있을 때 내 아버지는 술도 마시지 않고 바깥출입도 않고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네 명의 딸을 혼자서 낳았던 엄마는 출산을 하던 그 상황만 떠올리면 서러움이 북받쳐 왔다고 했다.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없고, 친정은 강원도라 멀고, 출산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 많이 서러웠다고 했다.

"또 딸을 낳았다고 사람들이 수근 댈까봐서 기냥 혼자 나을라 했다. 그래도 오래 안 걸렸다. 니가 한 시간 쪼매 지나이 끼네 툭 나오데."

엄마는 그 말을 하고는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디 신명나는 웃음이랴. 웃음 뒤에 자리한 그 아려오는 아픔을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어땠어? 언니는 내가 예뻤다는 데 정말 예뻤어?"
"이쁘긴 뭐가 이뻐. 니가 딸 중에 제일 못났지. 지금이사 얼굴이 이쁘다만. 그때는 니 못 났다 카이. 젤 못 생겼었다."

그렇게 아들을 바랐던 우리 아버지. 하지만 희망을 걸었던 다섯째도 딸이었다. 그게 바로 나다.
 그렇게 아들을 바랐던 우리 아버지. 하지만 희망을 걸었던 다섯째도 딸이었다.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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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면서 세상으로 나오자 나의 아버지는 두 손으로 나를 받아들었다고 했다. 너무 작아서 두 손으로 받쳐 든 손이 마구 떨렸다고 했다.

"억수로 작았다. 두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오더라고. 내 억수로 놀랬다. 을라가 그렇게 쬐깐한 지 처음 알았다. 자세히 보이 참말 작데 작아."

아버지는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당신의 손에 처음으로 받아든 자식이 나였다며 큰소리로 웃으셨다. 작아서 놀라고, 그 작은 것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딸이여서 더 놀랐다고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낳고 며칠 간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나 뭐래나. 그렇게 작은 내가 태어났던 그 집은 나중에 돼지우리로 개조됐다. 돼지우리에서 태어났다고 놀리던 옆집 아줌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나는 지금도 우기고 있다. 나의 출생은 예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 분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돼지우리에서 태어났으니 조금 비슷하지 않냐고 떠들어대곤 한다.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태그:#딸, #돼지우리, #못생겼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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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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