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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서방이 엄마가 담가 준 김치만 먹어요. 너무 맛있어서 밥도둑이래요."

춘천의 주부 안주희(38)씨는 최근 시골에 사는 친정어머니와 통화하면서 '밥상 근황'을 이렇게 전했다.

안씨는 친정어머니에게 "이번 김장 배추는 특히 고소한 것 같다"며 "씨를 받아 내년에도 같은 배추를 심어 기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친정어머니는 허허 웃으며 "배추는 씨를 받아 심는 게 아니다"고 일러줬다.

안씨의 친정어머니처럼 농사를 오래 지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작물은 몰라도 배추만은 씨를 받아 심지 않는다. 속이 꽉 찬 실한 배추라도 씨를 받아 심으면 이듬해에는 '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잎이 넙적하기는 하지만 잡초도 아니고, 또 흔히 보는 배추와는 생김새가 전혀 딴판인 이른바 기형 배추들이 배추밭을 온통 뒤덮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배추는 품종(브랜드 명)에 관계없이 십중팔구 '혼혈 배추'들인 까닭이다. 농가들이 구입하는 배추씨는 한결같이 종묘회사들이 '손을 본' 것들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들 종자를 심으면 딱 한 번만 '정상적인' 배추로 자랄 뿐 이 배추에서 씨를 받아 다시 파종하면 생김새가 기괴한 배추들만 나오게 돼 있다. 머리를 풀어 헤친 듯 포기가 차지 않고 잎사귀가 어지러운 모양을 한 배추를 구경할 확률이 100%에 가깝다는 얘기다.

종묘회사들이 '손을 본' 배추씨

혼혈 배추씨는 전혀 특성이 다른 '엄마 배추'와 '아빠 배추'의 교배를 통해 얻는다. 예컨대 사람으로 치면 유럽의 백인과 아프리카의 흑인이 혼인하는 격이다. 유전적으로 차이가 큰 개체가 짝을 이루면, 자손에서는 흔히 '잡종 강세' 현상이 나타난다. 모계와 부계의 장점들만이 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고소하면서도 속이 차고 튼실한 배추들은 그러니 예외 없이 혼혈 배추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혼혈 배추들이 저희들끼리 교배해 씨(자손)를 만들면 우수한 형질뿐만 아니라 혼혈 배추에 감추어져 있던 나쁜 특성도 함께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다. '할아버지 씨'나 '할머니 씨' 어느 한쪽, 혹은 양쪽을 어정쩡하게 섞어서 닮은 '손자 씨'로 변한다는 뜻이다.

인간에게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동질 집단끼리의 혼인이 많은 미국의 일부 모르몬(Mormon) 교도들이나 아미쉬(Amish) 사람들이 한 예다. 이들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전적인 질환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신토불이의 토종 배추는 없는 것일까. 전남 고흥에 사는 농민 S씨는 토종 배추씨를 살려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는 6년 넘도록 고집스럽게 예의 기형 배추에서 씨를 받아 해마다 파종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김장용으로 쓸 만한 배추 포기를 얻지 못했지만, 이론적으로 보면 언젠가 S씨만의 토종 배추가 등장할 수는 있다. 기형 배추들 가운데 돌연변이 같은 정상 배추를 찾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확률은 극히 낮다.

종묘회사들이 채종해서 심어도 이듬해 같은 특성을 보이는 배추씨를 공급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윤 때문이다. 농가들이 자체적으로 씨앗을 받게 되면, 종자 장사는 잘되기가 어렵다.

도움말 : 강병철 교수(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박수형 박사(국립원예특작과학원)

덧붙이는 글 | 위클리 공감(http://www.korea.kr/gonggam/)에도 실렸습니다. 위클리 공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행하는 정책 주간지입니다.



태그:#배추, #혼혈, #김장,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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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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