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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리마대성당. (2011년 6월 사진)
▲ 리마 대성당 피사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리마대성당. (2011년 6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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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중심의 대성당. (2011년 6월 사진)
▲ 쿠스코 쿠스코 중심의 대성당. (2011년 6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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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시내의 잉카제국의 황제 동상. (2011년 6월 사진)
▲ 잉카 황제 쿠스코 시내의 잉카제국의 황제 동상. (2011년 6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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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2011년 6월 사진)
▲ 쿠스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2011년 6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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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이다. 사실 페루 사람들에 의한 피사로의 평가는 자신들을 침략한 정복자로서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냉정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300년이 넘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거의 신격화 또는 우상화 되어버린 피사로에 대한 페루 사람들의 평가는 이미 애증이 뒤섞여 버린 복잡한 감정이 됐기 때문이다.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는 스페인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도시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곤살로 피사로와 어머니 프란시스카 곤살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출생 년도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피사로는 지금의 멕시코 땅에서 번영하던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친척이었다고 한다.

1519년 멕시코 고원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며 번성하던 아스텍 제국은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이끌고 온 500명의 병사와 16마리의 말 그리고 50정의 당시로서는 최신식 총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1521년에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하고 파괴한 후 이곳에 스페인의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피사로는 친척이었으며 스페인의 장군이었던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스텍 제국 침략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피사로 자신도 제2의 코르테스가 되기를 꿈꾸었다. 당시 유럽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황금의 나라라고 알려지고 있던 신대륙의 엘도라도를 찾으려고 1531년 180명의 병사와 27마리의 말을 이끌고 파나마를 출발하여 잉카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쿠스코에 수도를 두었던 잉카제국에서는 황제의 지위를 둘러싸고 형제끼리 대립하여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피사로는 잉카를 정복하기 위해 카타마르카라는 지역에서 아타우알파 잉카황제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잉카의 황제는 피사로의 거짓 평화회담에 속아서 무장해제 시킨 호위병 5만을 이끌고 피사로와 만나게 된다.

피사로의 군대와 잉카의 황제가 만나기로 한 곳은 지리적으로 집과 집들의 폭이 매우 좁은 협소한 지역이었다. 좁은 그곳에서 무장해제를 한 5만의 병사와 당시로서는 신무기로 무장한 피사로의 군사 300명이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피사로는 무장해제하여 저항능력이 없던 잉카의 병사 5만을 최신식 총을 사용하여 모두 죽이게 된다.

피사로는 황제 아타우알파를 인질로 잡았는데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와 협상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아타우알파는 젊은 황제이지만 형을 죽여가면서 까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니 만큼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살려주면 잉카제국의 금과 은을 모두 주겠다고 피사로를 설득했으며 피사로는 그의 제안을 받아  들이게 된다. 그러나 피사로는 잉카의 금 은 보화를 모두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아타우 알파를 사형시키게 된다.

황제는 잉카제국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를 살려두는 것은 피사로도 두려웠던 것 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타우알파 황제가 교수형을 당할 때 황제는 잉카의 신앙에서 침략자들의 종교인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었다고 한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당시 스페인 군대의 신부였던 바르베르데의 설득 때문 이였다고 한다. 황제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의 손에 들려있던 성경이 바닥으로 떨어져 펼쳐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펼쳐진 페이지의 성경 구절이 "칼로 다스리는 자 칼로 망하리라" 는 페이지였다고 한다.

이렇게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회담을 위장하면서 접근해 잉카의 황제 알타우 알파를 포로로 잡고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던 황제를 교묘히 이용하여 금과 은을 약탈한 후 죽이게 된다. 황제가 정복자에 죽임을 당한 잉카제국은 1533년 멸망하였고 이 후 제국은 기나긴 스페인의 식민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피사로는 이렇게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으며 마지막 생애 2년간을 리마에서 보냈다. 

이 후 피사로의 동료였던 알마그로가 칠레 원정에 실패한 뒤 피사로의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피사로의 형제들을 가둔 사건이 있었는데 피사로는 이를 핑계로 알마그로를 처형하게 된다. 이에 1541년 6월 26일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의 친구들이 피사로의 궁을 공격해 칼로 피사로의 목을 찔러 살해하게 된다. 피사로는 죽을 때 목에서 나온 피로 십자가 성호를 그린 다음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죽었다고 한다.

피사로는 사후 리마의 대성당 지하에 묻히게 되는데 리마의 대성당은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리마를 건설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잉카제국과 식민지의 수도였던 쿠스코에서 리마로 수도를 옮겼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며 직접 성당의 주춧돌을 놓았으며 성당 안에 피사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그:#피사로, #잉카제국, #페루, #엘도라도, #리마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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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의 니나 또는 슈타인처럼, 여행과 사진 그리고 건축,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의 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 수타니파타의 그물에 걸리지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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