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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한성시 지천진에 있는 사마천 광장에 서있는 사성(史聖) 사마천의 동상
▲ 사마천 동상 중국 섬서성 한성시 지천진에 있는 사마천 광장에 서있는 사성(史聖) 사마천의 동상
ⓒ 위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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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것은 죽음을 쓰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인고유일사人固有一死, 혹중우태산或重于泰山, 혹경우홍모或輕于鴻毛, 용지소추이야用之所趨異也)"

천명과 인간세상을 통찰한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나온 말이다. 평생의 숙원인 <사기>를 저술하기 위해 남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인 궁형을 자처하면서 그 울분을 친구 임안에게 토로하면서 '죽음'에 대해 한 말이다.

사마천은 전통적인 역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주(周)나라에서 사관으로 지내며 대대로 왕실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러나 주왕실의 몰락과 더불어 그들의 가업은 중단되었으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한나라의 태사령(太史令:사관의 우두머리)이 되면서 다시 역사가의 가문이 이어졌다.

사마천의 집안에서는 다양한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는 재상, 군사전략가, 유세가 등이 있었고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관리도 있었으며, 시장을 관리하던 경제 전문가도 있었다. 이런 집안의 내력은 <사기>에 등장하는 멋진 군사지식이나 경제관련 정책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황하의 북쪽 용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생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스무살 즈음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전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는데, 이때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체험하면서 얻은 경험이 훗날 <사기> 저술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 때 약 30여 년간 사관을 지내고 있었다. 사마담은 <역사서>를 저술할 생각으로 많은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사관이란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 였다. 그리고 사관이란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에는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었고, 다만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기술직에 불과했다.

당시 산동성 태산에서는 봉선제(封禪祭: 봉은 하늘의 신에게, 선은 땅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고대 중국에서 황제가 이 제사를 통해 자기의 절대 권력을 만천하에 과시함)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역사와 천문, 역법을 책임지고 있었던 태사령 사마담은 당연히 이 의식에 참여해야했다. 그러나 사마담은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화병으로 죽게 된다.

옛 사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사라져 버린 역사기록을 다시 찾아 명주현군(明主賢君)·충신의사(忠臣義士)들의 발자취를 밝히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가 못 다한 과업을 이어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고금의 통사를 저술해야만 할 숙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중국 섬서성 한성시에 위치한 사마천도서관에 걸려 있는 천년의 태사공 사마천
▲ 사마천 사진 중국 섬서성 한성시에 위치한 사마천도서관에 걸려 있는 천년의 태사공 사마천
ⓒ 위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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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이미 낭중벼슬을 하고 있었다. 낭중은 황제의 비서관이다. 사마천은 <사기>저술에 매진하고 있었다. 원고를 집필한지 6년, 사마천에게는 일생일대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이릉의 화다.

그 당시 이릉은 굴지의 명장이었다. 불과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흉노 3만의 기병(騎兵)을 상대하여 싸웠다. 이릉의 군대는 몇 차례 승전을 했지만 결국 중과부족으로 흉노에 포로로 잡힌 채 이릉도 항복하고 말았다.

이릉이 얼마나 눈부신 전과를 올렸는가는 그 당시 한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무제는 이릉이 항복한 일에 격분하여 이릉을 처벌하기위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자 방금 전 이릉이 승전했을 때 까지만 해도 이릉을 칭찬하던 대신들은 무제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이구동성으로 이릉의 잘못을 탄핵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의 양상과 정의감에 따라 이릉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임금에게 아첨하기만 하는 신하대신들을 규탄했다. 그 결과 그는 사실을 왜곡하고 남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마침내 한무제의 분노를 사형을 언도 받는다. 사마천의 나이 48세 때의 일이다.

<사기>의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사마천은 궁형을 자처했고, 사형을 면했다. 그 당시의 법률에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50만전이라는 막대한 벌금을 내던가, 궁형을 받겠다고 자처하는 일이었다.

궁형은 사마천의 육체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마천은 42세 때부터 <사기>편찬에 들어가 56세까지 14년간에 걸쳐 <사기>를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궁형을 받기 전까지는 한무제와 한나라 왕실 자체를 찬양하는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했지만, 궁형을 받은 후로는 문제를 파악하는 관점, 인물과 사건에 대한 통찰력, 사상적인 넓이와 깊이 등이 변화했으며, 특히 한나라 왕실과 한무제에 대한 비판의식, 사회의 곪아터진 부분과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태그:#사마천,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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