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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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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은 1980년대 초 부산을 배경으로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 짧은 세무 변호사 송우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다섯 번의 공판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지난 11월 29일 시사회를 가진 영화 <변호인>의 보도자료는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 내용과 제작 과정을 소개하는 내용 등이 수 쪽에 달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그 이름'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인 '송변' 송우석 변호사는 송강호가 연기했고 국밥집 주인 순애는 김영애가 연기했고 애국 경감 차동영은 곽도원이 연기했다고 나오지만, 정작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가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는 언급돼 있지 않다. 그냥 '누구'의 일화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라고 한두 줄로 소개하면 될 일을,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게 누구인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그 이름 석 자는 왜 빠져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눈치 없고 사회성 부족한 의문은 2013년의 대한민국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 이름'이 빠진 영화 <변호인>

2013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할리우드 대작 <그래비티(중력)>를 보면 광활한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절감하게 된다. 중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아등바등 허둥대는 모습에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숨이 턱턱 막히고 몸이 계속 움찔거렸던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두 발을 조그만 땅덩이에 붙들어 매는 '그래비티'가 그렇게 고마울 줄이야.

<변호인>을 보는 내내 나는 <그래비티>에서 느꼈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숨막힘과 살떨림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변호인>은 '민주주의라는 그래비티'가 사라진 시대를 오롯이 느끼게 해 주는 영화다. '그래비티 실종의 시대'가 단지 1980년대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숨막힘과 살떨림이 한결 더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에는 그 실종의 시대에 한 명의 '변호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변호인>은 양우석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그래서인지 감정선의 제어가 좀 투박하고 서툰 느낌도 든다. 마치 초보운전자가 모는 차를 탄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양우석 감독의 경우 낡아빠진 수동기어로 험난한 오프로드를 헤쳐 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물론 <변호인>은 시대와 인간이 뒤얽힌 엄청난 격정의 소용돌이를 관통하는 만큼 다소간의 거친 감촉을 피할 수는 없다. 사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액션 블록버스터 <다크 나이트>에서도 몇몇 장면은 손발이 오글거리지 않는가.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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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송우석 변호사를 연기한 주연 송강호는 말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등 한국영화에 한 획을 그은 영화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하지만 송강호에게는 종종 코믹하고 약간 모자란 듯 가벼운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넘버3>, <살인의 추억>, <괴물>, <놈놈놈>, <의형제> 등이 그랬고 <설국열차>에서도 그런 잔재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송강호의 그런 이미지가 <관상>과 <변호인>에서 샤프한 전문직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모두 극복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관상>에서 진짜 수양대군(이정재)을 처음 대면했을 때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던 그 눈빛과 표정은 송강호 연기의 전환점이 될 만했다. <변호인>에 그 여세가 이어진 느낌이다. 본인이 말했듯이 부담감이 무척 컸을 배역이었으나 "당신의 소중한 돈을 지켜"드리던 세무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탈바꿈하는 과정, 시대의 모순에 분연히 맞서는 모습을 대단히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송강호뿐만 아니라 최근 드라마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 김영애, 어느 영화에나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오달수,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밝게 비추었던 빛나는 외모와 가수출신답지 않은 연기력을 함께 선보인 임시완, 그리고 이제는 송강호와도 연기력으로 맞장을 뜰 정도로 성장한 무서운 악역의 곽도원까지. 조연들 또한 혼신을 다한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기억에 남는 '변호인'의 뒷모습

시사회 당일에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만 하루가 지나고서야 아련하게 가슴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어느새 인권변호사로 바뀐 '송변'은 1987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앞장서다 구속된다.(영화의 모티브가 된 그분의 경우 1987년 8월 거제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 사망사건 때 제3자 개입금지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된다.)

"아무리 그래도 법조인이 실정법을 어기면 어떡합니까?"
"법조인이니까 그런 겁니다."

대한민국 70년 역사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영화는 영화라지만, 영화 속 '송변'은 당신과 내가 알던 바로 그 사람이 맞다. 새하얀 수의를 입고 구속적부심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등장한 변호인. 헌법 제1조 2항에 따라 국가는 곧 국민이라던 그가 변호했던 것은 '민주주의 시계가 멈춘' 대한민국이었다. 그는 총칼로 국권을 찬탈한 무리로부터 대한민국을 변호한 변호인이었다. 그 조국에 버림받고 죄인이 되어 법정에 앉은 '변호인'의 뒷모습.

약간은 웅크린, 듬직해 보였지만 그래서 더 쓸쓸해 보였던 그의 오른쪽 어깨가 아직도 가슴에 남는다. 비극적인 한국현대사를 응축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은 내가 본 한국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 간간이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재판장의 목소리만 들리는, 그러나 그 어떤 장면보다 더 많은 사연과 더 많은 목소리, 우리가 알고 있는 20여 년 뒤의 사연과 목소리까지도 담고 있는 듯한 그 어깨, 그 뒷모습. 어쩌면 한국영화는 '변호인'의 그 뒷모습을 찍기 위해 100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화는 묻는다. 그 변호인은 이제 누가 변호해 주느냐고.

<변호인>은 단지 '민주주의라는 그래비티'가 없던 그 시절 우리 참 어렵게 살았다는 추억을 파는 영화가 아니다. 그 어려운 시절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우리 힘들게 살아왔음을 알아 달라고 애원하는 영화도 아니다. <변호인>은 2013년의 대한민국을 30년 전의 시점에서부터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영화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일부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 2009년 8월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형량이 선고 돼 있다(이에 대해 부산지법은 지난 3월 재심을 결정했다). 부림사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학림사건의 원심 배석판사였던 황우여는 지금 집권당의 당 대표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에 개입한 무리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그 '변호인'이 무덤 속에서도 국민과 국가를 변호하지 못하도록 '사초조작'을 감행해,대역죄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죽어서도 이념의 수의를 입고 반역의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에 끌려나와 쓸쓸하게 웅크린 그 '변호인'을 누가 변호해 줄 것인가. 그의 눈물을 누가 닦아 줄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9년 4월 30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대국민 사과의 말을 한뒤 검찰에 출석하기 위해 버스에 오르며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9년 4월 30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대국민 사과의 말을 한뒤 검찰에 출석하기 위해 버스에 오르며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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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비친 25년 전 '변호인'의 뒷모습에서 나는 방송사 헬기에 쫓기며 검찰에 출두하던 전직 대통령의 2009년의 모습을, 무덤이 파헤쳐져 다시 역사의 법정에 끌려나온 2013년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훗날 어느 좋은 시절이 와 2009년의 변호인을, 2013년의 변호인을 불편하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잡스>라는 영화처럼 '변호인'의 실명으로 만들어진 후속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더 이상 비통한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재미와 감동으로 영화에 흠뻑 빠져들었지만 아직도 내게는 주인공 '송우석'이라는 이름이 낯설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송우석이 아닌 그 '변호인'의 본명을 꼭 찾아주고 싶다. 영화 속 '변호인'의 눈물을, 무덤 속 '변호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다시 법정에 죄인으로 끌려나온 그의 변호인이 되고 싶다.

PS.

개봉일: 12월19일(목)
한줄평: 12월19일에 꼭 보고 싶은 영화
별점: 4.5/5
관람시 주의사항: 짙은 화장은 후회를 부릅니다.


태그:#변호인, #송강호,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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