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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 가서 제일 놀란 것 중에 한가지는 엄청나게 높은 물가다. 도쿄나 런던에서나 느낄만한 비싼 교통비와 음식값은 배낭여행객들에게는 치명적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었지만 준은 카우치서핑을 해보자는 얘기를 꺼냈었다.

어느 가난한 여행자가 만들었다는 카우치서핑은 전세계의 여행자들이 현지인 호스트의 집에 무료로 머물면서 함께 여행을 즐기는 비영리 커뮤니티다. 처음에는 대체 누가 낯선 곳에서 온 여행객을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까 싶었지만 의외로 준이 보낸 쪽지에 응답을 한 사람들은 제법 많았고 우리는 그 중에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호스트에게 초대해줘서 대단히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덕분에 나는 브라질 리우에 23세 나이에 이민국에서 일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자는 친구가 한 명 생겼다. 이런 알코올 중독 증세 때문에 밤마다 거리의 파티장을 전전하다 오전 2시에 들어와 다시 6시에 출근하는.

리우에서 만난 카우치서핑 호스트 프리실라
 리우에서 만난 카우치서핑 호스트 프리실라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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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실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그녀는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내 말에 됐으니 술이나 먹으러 가자며 늦은 밤에 도착한 준과 내가 미처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곧장 거리로 나섰다. 지금까지 꽤 많은 카우치서퍼들을 초대해 온 그녀는 그날 밤 이파네마 해변가에서 벌어진다는 카우치서퍼들의 파티로 우리를 이끌었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서 도착한 해변가의 한 펍에 가득 들어찬 여행자들과 그녀의 뜨거운 환영으로 우리는 처음으로 브라질다운 음식과 파티를 그날 밤이 다 가도록 마음껏 즐겼다. 더 이상 걷기도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다음날에 대한 상의도 하기 전에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새벽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얼핏 들었는데 다행히 그녀는 무사히 출근을 한 모양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매트리스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두고 간 현관열쇠가 보였다. 브라질 사람들은 대체로 그녀처럼 자유로운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성격 탓인 것일까.

이방인 두 명을 집안에 두고 태연하게 출근하면서 열쇠를 두고 나간 프리실라 덕분에 우리는 별 걱정 없이 한낮의 해변으로 외출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미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을 지닌 리우에 온 지 삼일째인데 낮에 바닷가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간 밤의 파티에서는 그곳이 바다인지 육지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아득했으니 말이다.

리우의 해수욕장 코파카바나(Copacabana) 의 아침
 리우의 해수욕장 코파카바나(Copacabana) 의 아침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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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라르의 파제와 같은 다른 세상의 풍경이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코파카바나의 넓고 긴 백사장은 어쩐지 그리운 풍경이었다. 남반구 특유의 맑고 푸른 하늘과 멀리 보이는 팡데아수카르 언덕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이른 아침의 백사장 옆길은 수영복을 빼입은 사람들 대신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차지했다. 살짝 바닷물에 발을 담가보지만 막 봄이 찾아온 남반구의 뜨겁지만 덥지 않은 태양으로는 아침의 찬 바다를 데우기에는 역부족인지 차가운 느낌에 금세 발을 뺐다.

한쪽에서는 축구를 하는 청년들, 다른 쪽에서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선배드 아래에서 태닝을 즐기는 여인들이 즐비한 코파카바나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갖 사람들이 뒤섞여 축제의 현장이 된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리우의 상징은 그리스도상도 멋진 해변도 아닌 '쪼리'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는데 리우의 해변은 그 말 그대로다.

태양이 중천에 뜰 점심 무렵이 다가오면 리우데자네이루의 해변에서는 모두가 '쪼리'만 신은 채 벗고 다닌다. 옷을 입은 채, 벗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꾸 쳐다보는 나와 같은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꺼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릴 뿐이다.

규모나 섬세함 면에서 단순한 취미수준을 능가하는 코파카바나 해변의 샌드아트
 규모나 섬세함 면에서 단순한 취미수준을 능가하는 코파카바나 해변의 샌드아트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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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국기가 꽂혀있는 한 예술가의 샌드아트 속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브라질 여성들의 로망이라는 부푼 엉덩이를 잔뜩 드러낸 샌드아트는 이곳이 해운대가 아니고 축제의 도시 리우의 해변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영광의 끝에 나타난 예술혼

해변의 뜨거운 태양이 부담스러워질 시간이 되자 우리는 리우의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한때 브라질은 남미 최고의 대국으로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영광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남미에서는 최고의 대국이지만 갑작스럽게 높아진 물가와 오랫동안 방치된 무질서는 여행자들 뿐 아니라 브라질 시민들까지도 매우 혹독한 시간을 겪게 만들었다. 왜 예술은 이렇게 힘든 시기에 꽃을 피우는지 모르겠지만 원색의 벽화로 가득한 리우데자네이루의 거리 예술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산타테레사의 골목을 가득 채우는 거리의 벽화들
 산타테레사의 골목을 가득 채우는 거리의 벽화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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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리우의 거리 예술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작은 언덕 동네인 산타 테레사(Santa Terresa)다. 브라질의 영광의 시대에 부촌으로 번창했지만 사람들이 해변을 찾아 낮은 곳으로 떠나버린 자리에는 그들이 살던 고풍스런 옛 저택들이 오래 전 공기를 머금은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사이사이 놓인 돌계단과 오랜 골목길, 그리고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트램 레일이 깔린 도로는 리우의 젊은 예술가들을 유혹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옛 공기를 그대로 간직한 레스토랑과 카페로 가득한 산타테레서(Santa Terresa)
 옛 공기를 그대로 간직한 레스토랑과 카페로 가득한 산타테레서(Santa Terresa)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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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이나 창문도 없이 뻥 뚫린 채로 아슬아슬한 언덕길을 달리던 리우의 트램은 몇 번의 사망사고 때문에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모습은 골목마다 들어찬 카페의 한 켠을 채우는 공예품으로 재탄생했다.

리우의 언덕을 오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세라론의 계단
 리우의 언덕을 오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세라론의 계단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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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예술에 흠뻑 빠져버린 우리는 산타테레사를 거쳐 간밤의 열기가 겨우 사그라든 라파의 한 예술계단을 찾았다. '리우의 언덕을 오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라는 '세라론의 계단'은 '세라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예술가가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15개의 오색 타일로 계단을 덮으면서 브라질에 대한 관심을 쏟아낸 끝에 만들어진 거리다.

태극기부터 시작해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작은 타일에 담아 온 벽면을 가득 채웠는데 과연 그는 이 많은 나라들을 다 여행했던 것일까. 마음 속에 물음표를 여러 개 띄우고 계단을 오르니 중턱쯤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한다. 아주 간단한 영어로 '한국인?'이라고 묻던 그는 바로 이 계단을 만들어낸 세라론이었다.

제법 나이가 든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장난기가 가득한 그는 계단 초입에 자신이 그려놓은 태극기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많은 도시들을 자신이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도시들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오늘도 계단에 앉아 있다는 그의 얼굴은 브라질인 특유의 자유로운 천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언젠가는 내가 그에게 해준 이야기가 이 벽의 또 다른 한켠을 장식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상과 더불어 리우의 랜드마크인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그리스도상과 더불어 리우의 랜드마크인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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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물음표를 간직한 채 우리가 향한 곳은 리우의 센트럴 한폭판이었다. 브라질의 영광의 시대는 끝났지만 리우의 신도시는 여전히 서울의 도심만큼이나 화려하고 현대적이다. 그런 도심의 한가운데에는 이들의 예술혼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물이 하나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고대 피라미드와도 같은 형상을 한, 높이 68m의 이 기묘한 건축물을 보고 성당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십자모양으로 빛을 빨아들이는 천장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을 전혀 믿지 않는 나조차도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한낮의 뜨거웠던 태양이 저물고 그 빈자리를 빌딩의 불빛들이 채우고 있었다. 보헤미안 풍의 골목을 품은 산타테라사, 아름다운 해변의 자유로움, 역사의 흔적과 현대가 공존하는 센트럴까지. 리우는 대체 몇 개의 얼굴을 지닌걸까? 영광의 시대는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렸지만 리우의 낮과 밤은 여전히 뜨겁다.

카우치서핑에(Couch Surfing) 대해
카우치서핑 홈페이지 : http://www.couchsurfing.com/

어느 한 가난한 여행자가 만들었다는 카우치서핑은 말 그대로 여행자가 현지인의 Couch를 Surfing 하는 개념이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지역을 검색하면 해당지역에서 당신을 기꺼이 재워 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과 미리 메일을 주고받아 허락을 받으면 일정기간 동안 그 집에서 머무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카우치서핑을 단순히 숙박비를 아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당신을 재워주는 호스트의 성향을 존중하고 그와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를 즐기는 것이 관례이자 호스트의 친절에 보답하는 당신의 의무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우치서핑은 가이드 북에 없는 다양한 장소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호스트의 일정에 맞추다 보면 오히려 내가 보고자 했던 곳을 못 보는 경우도 빈번하게 생긴다.

또한 같이 놀다 보면 음주가무는 기본이기 때문에 아낀 숙박비 정도는 고스란히 술값으로 나가게 되어있다. 또한 여행객을 잘 돌보는 호스트라면 주인의 부재 중에도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해 두겠지만 경험이 없거나 무관심한 호스트가 별 말 없이 나가버리면 어떻게 해야할지 신경만 쓰다가 하루가 다 가는 날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카우치서핑을 시도하는 이유는 훗날 누군가에게 "나 브라질에 친구 있어" 라고 말 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큰 입으로 짓는 미소가 사랑스러운 프리실라처럼 말이다.



태그:#카우치서핑, #리우데자네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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