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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남미를 꼭 한번 같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아득하리만큼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 오래 전, 체 게바라가 그랬듯이 나의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싶었던 나는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을 거쳐 결국 또 다른 미지의 땅 브라질을 밟았다.

결국 나의 바람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약속의 땅 브라질에서 준과의 랑데뷰를 눈 앞에 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열어 젖힌 리우의 숙소 방문은 비어있었다. 아쉬움과 설렘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렇게 30여 분간 옷을 갈아입고, 짐을 재정비하고, 요란스럽게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낯익은 목소리로 어색한 스페인어를 뱉어내는 녀석과 드디어 마주쳤다.

지구 반대편에서의 랑데뷰

"반갑다 친구야!"

사내들의 우정이 늘 그렇다고는 하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꺼낸 한국 말 첫 마디가 기껏 욕이라니. 우리는 우리 둘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는 숙소 스태프의 시선을 뒤로 하고 거리낌 없이 얼싸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아마 그들은 우리가 뱉는 말의 절반이 욕설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만난 JUN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만난 JUN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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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세계일주의 출발부터 함께 하기로 했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결국 뒤늦게 브라질에서 합류한 준은 나의 입사 동기이자 제법 절친한 친구였다. 남미를 같이 가자고 얘기할 만큼. 예정보다는 늦었지만 남미의 브라질까지 날아와준 준이, 나는 마냥 고맙고 반가웠다. 그래서 그날 밤은 나의 기억속에서 지워질 만큼 길고 아득했다.

브라질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왠지 거리의 사람들이 다 축구를 하고 있을 것 같고, 해변에 다 벗은 사람들이 삼바를 추는 열정의 도시일 것 같고, 요란한 복장과 가면으로 치장한 퍼레이드 카니발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뽑힌 정체 불명 예수상.

그러나 지끈거리는 숙취를 겨우 물리치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리우의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가 처음 느낀 것은 묘한 위화감이었다. 마치 집주인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방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집집마다 사방으로 둘러쳐진 쇠철창은 이 낯선 땅을 처음 밟은 이방인에게 위협감마저 들 정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 골목길의 모습과 달리 '1월의 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리우는 사람들이 브라질에 품는 환상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카니발과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예수상의 도시, 리우 데 자네이루. 그런 리우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형용사가 있다. 나폴리, 시드니와 함께 3대 미항이라는 것. 높은 데서 보는 풍경이 주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준과 함께 제일 먼저 그 유명한 예수상이 있는 코르코바도 언덕에 올랐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코르코바도 언덕의 그리스도상
 세계 7대 불가사의, 코르코바도 언덕의 그리스도상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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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하게 태양을 정확히 등지고 선 덕분에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눈부셨던 그리스도 상을 직접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게 왜 세계 7대 불가사의 일까'였다. 조립식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군데군데 조립한 흔적이 있고 그다지 멋있지도 크지도 않은 이 조각상은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은 남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브라질 사람들의 투표로 인해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었으니 사람의 기준은 때로는 모호하다.

1년 내내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붐비는 코르코바도 언덕에 올랐을 때 정작 내가 놀랐던 것은 석상이 아니라 리우의 아름다운 경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남반구 특유의 파란 하늘에 녹색의 우림, 빼곡히 들어선 빌딩들과 어우러진 크고 작은 바다와 섬은 남미의 첫 인상으로 참 완벽했다.

코르코바도 언덕에서 바라보는 리우의 멋진 풍경
 코르코바도 언덕에서 바라보는 리우의 멋진 풍경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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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의 진정한 매력, 케이블카 두 번 타야 알 수 있다

멍한 얼굴로 그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데 정신이 빠져있던 나는 누군가 내 등을 콕콕 찌르고서야 누군가 나를 몇 번씩이나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린 등 뒤에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무리의 소녀들이 연신 "강남스타일"을 외쳐대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읽었던 여행 스페인어 덕분에 용케도 "실례합니다"와 "사진"을 알아들었던 우리는 기꺼이 브라질 소녀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서는 '강남스타일' 이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른 기념으로 싸이가 거리 콘서트를 열었다고 하더니 지구 반대편의 이들에게는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별하는 능력이 생겼나보다. 어쨌거나 태평양 건너 이 먼 땅에서 동양의 이방인을 이토록 반겨주니 나는 아침에 잠시나마 느꼈던 브라질에 대한 위화감을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코르코바도 언덕을 내려오면서 준과 나는 과연 3대 미항 중에 어디가 최고냐를 두고 열띤 설전을 벌였다. 아직 나폴리를 가보지 않은 준과 달리 오래전에 나폴리를 방문했던 나는 여전히 그 특유의 낭만을 잊지 못한 탓인지 좀처럼 1위 자리를 리우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바다를 낀 항구도시 리우의 매력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일명 빵산으로 불리는 슈가로프(Sugar loaf), 현지이름은 팡데아수카르
 일명 빵산으로 불리는 슈가로프(Sugar loaf), 현지이름은 팡데아수카르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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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의 진정한 매력은 케이블카를 두 번 타야 도착하는 저 높은 언덕 팡데아수카르에 해질녘 올랐을 때 느낄 수 있다. 우뚝 솟은 모습이 멀리서 보면 설탕 덩어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슈가로프는 395m의 가파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리우의 도심과 리우를 둘러 싼 바다 만 전체를 바라 볼 수 있는 또 다른 뷰 포인트다.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점점 심해지는 바람 덕분에 날려갈 듯 너풀거리는 케이블카의 스릴도 스릴이지만 이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 그대로다. 그런 팡데아슈카르에서 멀리 시선을 고정하면 여전히 저 멀리서 두 팔을 펼치고 있는 그리스도 상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누군가 스위치를 누르면 당장이라도 날개를 펴고 이쪽으로 날아올 것만 같은 그 모습 너머로 노을이 지면 본격적인 리우의 마법이 시작된다.

멀리 그리스도상 너머로 지는 리우의 태양
 멀리 그리스도상 너머로 지는 리우의 태양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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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와 태양, 세 가지가 섞여서 만들어 내는 그라데이션. 어쩌면 이리도 절묘한 색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항구 위로 자연이 마술 같은 그림을 그린다. 그리스도의 펼쳐진 양팔을 배경으로 그라데이션이 조금씩 어두워 질 때마다 나는 혹시라도 석상이 살아서 움직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줌을 가득 당겨도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진 리우는 여전히 고요했고 눈부신 태양을 대신하듯 하나씩 거리의 불빛이 노란색 꽃처럼 피었다.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 드러나는 놀라움을 읽었는지, 준이 내 팔을 툭툭 건드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쯤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대 미항 중 최고는 리우 데 자네이루다.

이들의 심장은 대체 얼마나 뜨거운 것일까

해가 진 리우의 어느 뒷 골목
 해가 진 리우의 어느 뒷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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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 같으면 조용히 숙소로 들어와 생각에 잠기거나 하루의 일과를 정리했을 테지만 둘이 되고 나서의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과 같은 존재였다. 하물며 열정과 정열이라면 둘째라면 서러울 브라질 리우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잠든 것처럼 보이는 밤에도 파티장이 멀지 않다. 리우의 낮을 장식하는 이파네마와 코파카바나 해변 그리고 나머지 모든 거리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1년 내내 광기를 뿜어내는 라빠(Lapa) 거리에 밤이 찾아오면 골목 어디서나 파티가 한창이다.

1년 365일 열기로 가득찬 라빠거리의 수많은 노천 펍
 1년 365일 열기로 가득찬 라빠거리의 수많은 노천 펍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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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시즌의 해가 진 리우는 제법 쌀쌀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야외를 선호하는 듯 하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삼바 음악이 뒤죽박죽이 되어 도대체 말 소리가 들리기는 할까 싶지만 이들은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로 저마다 즐겁게 맥주잔을 나눈다. 그 가운데에 끼어든 동양인에게 슬쩍 말을 건네며 반갑게 맥주잔을 선사한다. 이것도 강남스타일의 힘일까.

운치 있는 수도교 광장을 가득 매운 인파들과 거리의 공연
 운치 있는 수도교 광장을 가득 매운 인파들과 거리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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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도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18세기에 만들어진 수도교와 공원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라빠 지구는 원래는 매우 고풍스러운 예술지구였지만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사고방식 덕에 점차 오늘 날의 클럽과 땀으로 넘치는 거리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의 라빠는 진짜 삼바와 클럽을 1년 365일 24시간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 삼바의 거리에 밤이 깊어지면 도로는 사라지고 거리는 사람들의 열정과 음악과 춤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리에서 흔들거린다. 가끔씩 그 열정이 광기가 되어 여행자들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미친 듯이 도망가던 범죄로 가득한 판자촌은 그저 리우의 오랜 슬럼가의 모습일 뿐, 브라질 전체가 권총과 마약으로 가득한 범죄자의 나라는 아니다.

다시 예수상 너머로 태양이 떠오른 낮에도 파티는 끝나지 않는다. 리우 곳곳의 장터나 오래된 경기장에서는 낮에 주민들이 모여 춤을 추는 파티장이 많다. 그러니 리우에 대해 우리가 갖는 '열정의 도시'라는 생각은 편견이 아닌 셈이다. 이런 열정이 광기로 폭발하는 시기가 매년 2~3월에 벌어지는 리우 카니발. 60만 명이 오로지 그 행사를 보기 위해 이 먼 리우로 날아온다고 하는데 그 숫자는 지구의 나머지 모든 축제의 참가자 수와 비슷하다고 하니 이들의 심장은 대체 얼마나 뜨거운 것일까.


태그:#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 #예수상, #팡데아슈카르, #라파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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