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산골마을 삼일리. 군 제대 후 무던히도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산골마을 삼일리. 군 제대 후 무던히도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우리 반 40명 중에 차 없는 친구는 딱 두 명인데, 우린 왜 차가 없어?"

현재 대학 2학년인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지독히 춥던 겨울날, 아이는 내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습니다. 그러고는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 괜찮긴 한데..."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설 명절을 보내기 위해 형님이 사는 곳으로 가는 길. 추석 때는 아이들과 장난도 치며 버스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랠 수 있지만, 한겨울은 상황이 다릅니다.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어둠이 내린 산속 터미널에서 버스 기다리며 맞은 찬바람은, 그야말로 칼바람이었습니다.

"설 지나면 당장 차 사자. 도대체 이게 뭐야?"
"면허증도 없는데 무슨 차를 사?"
"내가 어떻게든 끌고 다니면 될 거 아냐."     

작은 아이의 파래진 얼굴을 보다 못한 아내가 버럭 화를 냈습니다. 2005년 그 때, 내 나이 45살. 난 그 때까지 자동차 면허증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20년 전에 면허증을 땄지만, 차가 없으니 운전 할 줄 모른다는 처지는 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이들 때문에 차를 사자는 겁니다.

어느 할머니의 무서운 '예언'

어린 시절, 우리 삼형제는 강원도 화천의 어느 산골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아버님이 계시지 않았기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머님은 아랫 마을에 사는 어느 할머니 집을 자주 찾았습니다. '보살님'이란 호칭도 썼습니다. 어머님 따라 우리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할머니'보다 '보살님'이란 호칭이 더 어울릴 정도로 왠지 위엄도 있어 보였습니다.

"둘째 아들, 너는 마흔 중반 전엔 절대로 운전하지 마라. 니 죽는다!"

어느날 저녁, 어머님께서 우리 삼형제를 데리고 보살님 집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보살님은 갑자기 내게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어머님은 "그래요?"하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아마 가난한 살림에 차가 생길 리도 없거니와, 운전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또, 너희 삼형제 중에 한 명은 스님 된다. 거역할 수 없는 팔자인기라!"

"애들 앞에서 별 말씀을..."이라고 따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아마 스님이라도 되면 가난으로 밥 굶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내 어머님...당신은 내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천사님이셨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내 어머님...당신은 내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천사님이셨습니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그 후로 보살님이 이사했는지, 돌아가셨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우리 삼형제 모두는 20대를 맞았고, 난 1982년에 군에 갔습니다.

고참들의 괴롭힘, 이유도 모르고 당하는 구타... 세상에 이런 지옥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당시 내가 겪은 군대는 그랬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단체생활은 적응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검정고시를 봤고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던져진 겁니다. 많은 전우들 앞에서 '고문관' 소릴 들을 정도로 군 생활에 유독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병장이 돼 겨우 군 생활에 적응할 즈음, 제대를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 나가면 뭘 하나...'하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남들 간섭받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게 뭘까?"

스님이 되자! 답은 간단히 나왔습니다. <반야심경><천수경><금강경> 등 불경을 사놓고 2년여 동안 참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뚜렷한 목표 때문이었을까요? 그 긴 <금강경>도 단숨에 외웠습니다. 그렇게 공부해야 스님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님도 특별히 말리는 기색 없이 '난 네 놈이 스님의 길로 들어설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형님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활달했으며, 동생은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열외'라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둘째인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뚜렷한 특징도 없으니 '스님이 딱이다!' 싶었을 겁니다.

"제게 큰스님 한 분 소개해 주시면, 절에 들어가 열심히 빨래도 하고 가르침도 받겠습니다."

당시 절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불교에 몰입해 있던 사촌 누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누님은 "네가 가진 것 다 버려라. 부모님, 형제도 다 버렸다고 생각할 때 다시 연락해라"라고 답했습니다. 

갈등이 컸습니다. 모든 걸 다 버려야 한다는 말에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하고 싶은 게 많기도 했습니다. 방황을 거듭한 끝에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고, 운 좋게 합격해 강원도 어느 탄광촌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개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내가 공무원 발령을 받은 해, 나와 아무 상의도 없이 형님이 출가를 했습니다! 당신 주머니 탈탈 턴 돈을 가난한 집 안방에 몰래 놓고 죄인처럼 도망치는, 그런 진짜 스님 말입니다.

"삼형제 중 한 명이 스님 된다. 그리고 넌 40대 후반 전엔 차 운전하지 마라."

어렸을 때 들었던 보살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젠 "운전하지 마라"던 그 '예언'만 남은 셈입니다. 저는 '면허증 따면 운전대를 잡을 거고, 그러면 큰 일 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그 추운 명절 때 버스 세 번 갈아타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형님이 계신 산속 암자까지 갔습니다. 

45살이 되어서야 운전 면허증을 땄고, 이듬해 운전을 했으니 보살님의 '말씀'을 지킨 겁니다. 돌이켜보면, 꼭 보살님의 말씀 때문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 비린내 나는 고등어를 머리에 이고 길을 떠난 어머님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자식들 굶기지 않겠다는 처절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커서도 차 같은 사치품(?)을 쉽게 사지 못했습니다.

보살님은 7살인 내게 나무로 불을 때 밥 하는 법과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시다가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어머님보다 더 엄하게 야단도 치셨습니다. 당신은 제대로 못 드셔도 우리 삼형제를 위해 따뜻한 아랫목에 밥을 보관해 두시던 보살님. 그 아련하고 값진 마음을 오랜 시간 간직하고 싶습니다.

개고기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군에서 안 먹겠다고 버티니 고참은 "너 개개는 거냐?"며 팬티가 엉덩이에 달라붙도록 '빠따'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들은 "개고기 절대 먹지 마라"는 보살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인을 보면 반가움을 표현할 줄 아는 인간과 밀접한 동물이기에 그런 당부를 하신 듯합니다. 어쨌든 저는 보살님의 당부를 지켰습니다.

덧붙이는 글 | 관상 공모 글입니다.



태그:#사내면, #삼일리, #화천군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밝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오마이뉴스...10만인 클럽으로 오십시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