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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태어나신 내 어머니는 꽃다운 청춘 시절을 일본 식민주의와 한국전쟁이라는 광기의 시대 아래서 보내셨다. 그래서 당신의 자식만큼은 꽃다운 청춘을 보낼 수 있길 간절히 바라셨다. 하지만 딸의 20대 시절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만으로 용공이 되던 광기의 군부독재 시대였다. 감옥에 면회오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광기의 시대가 1980년대에도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노라고. 그리고 그 시대를 거쳐온 우리 세대의 자식들이 이제 꽃다운 청춘을 맞았다. 19살 내 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광기의 시대가 2013년에도 가능할 줄은 몰랐노라고.

광기의 정치와 민주주의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지난 5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남부경찰서에서 나와 수원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으로 이동하며 "야 이 도둑놈들아"라고 울부짖고 있다.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지난 5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남부경찰서에서 나와 수원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으로 이동하며 "야 이 도둑놈들아"라고 울부짖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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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민주주의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 아니, 광기는 민주주의를 마비시키고 압살한다. 광기의 정치는 반공주의·매카시즘·마녀사냥·종북몰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자유 분자 색출·이단 숙청이라는 이름으로도 자행된다. 광기의 정치는 이성·합리·토론·설득·공존을 마비시킨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이성·합리·토론·설득·공존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이른바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의혹 사건'을 빌미로 시동이 걸린 종북몰이로 인해 위독한 상태에 치닫고 있다. 이석기 사건에 대한 그 어떠한 의견도 종북몰이라는 틀 밖에서 합리적으로 토론될 수 없는, 말 그대로 광기의 시대다.

나는 이석기, 그리고 그와 모임을 함께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아마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녹취록 내용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직도 그런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의아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여 자기 생각을 나누고 발언했다는 사실만으로 내란음모죄를 적용해 처벌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그들이 내란음모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했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하려고 하는 것은 광기 정치의 시작이다.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의혹 사건은 그렇게 작동됐다.

이석기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과 조직들이 사상 검증을 요구받는 형국이 된 것이다. 통합진보당 안의 다양한 목소리도, 진보정치 자체도, 통합진보당과 연대를 했던 민주당도 모두 종북 아닌가라는 단순 논리로 환원됐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 언론의 마녀사냥식 보도 중단, 사상의 자유,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모두 묻혀 버린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핵심 의제였던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실종된 지 이미 오래다.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한 합리적 비판과 토론은 불가능해졌고, 서로에 대한 원망과 증오, 책임 전가와 불신 그리고 극단적 언어만이 넘쳐나고 있다. 그토록 어렵게 성취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쉽게 퇴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뿐이다.

민주주주의도 권위주의도 아닌 새로운 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성공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국민의 저항을 통해 군부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이제 한국은 민주주의 퇴행의 사례로 연구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미국의 비교 정치 분야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주제는 정치 체제에 대한 재고찰이다. 정치 체제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민주주의냐 권위주의(또는 독재)냐로 나뉘었고, 정치 체제 이행은 대개의 경우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일방통행으로 이해됐다. 새뮤얼 헌팅턴이 제3의 민주화 물결(the third wave of democratization)이라고 명명한, 1970년 후반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진행된 정치 체제 이행에 대한 연구는 그런 관점에서 이뤄졌다. 한국의 민주화도 이 틀거리 안에서 이해됐다.

그러나 그간 여러 나라의 '민주화' 경험을 자세히 살펴보면, 민주주의의 현실은 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재 정권과 민주 정권 사이에 다양한 중간 단계의 정치 체제가 존재하며, 민주화 이행은 불완전하고, 독재 정치의 유산 (legacy)은 지속적이며,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의 역이행도 가능하고, 그 어디쯤 중간에서 정치 체제가 고착되는 경우도 빈번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교정치 학자들은 이런 정권을 혼합 체제(hybrid regime)라고 부른다.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준은 선거인데, 온전한 민주주의도 온전한 독재도 아닌 혼합 체제는 민주주의 마냥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하고 대의 기관을 구성한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방법을 통해 민주주의에 반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부정 선거·선거 조작·행정 조직 동원·실정법의 선택적 적용 또는 남용·정보 기관의 선거 개입·언론 통제와 탄압 등 실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특정 정치 세력의 권력 독점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 민주주의와 종북몰이

혼합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물과 사례를 읽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리고 한국의 현실이 상기된다. 특히 최근의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의혹 사건을 둘러싼 종북몰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퇴행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한국이 처해 있는 분단체제 하에서 광기의 정치는 얼마나 쉽게 작동하며, 이런 광기의 정치는 얼마나 심각하게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성공적인 민주화의 사례가 아닌, 민주주의 퇴행의 사례 또는 혼합 체제의 사례로 연구돼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청춘을 맞은 우리의 자식들은 또다시 꽃다운 청춘을 보내지 못하고 광기의 시대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30년 전 광기의 시대와 싸웠던 우리 세대는 평화로운 중년을 보내지 못하고 또다시 민주화 운동에 나서야 할 판이다. 부디 이 과정에서 다양한 합리적인 목소리들이 모여 광기의 정치를 끝낼 수 있길 바란다.

사족을 붙인다. 이석기와 그 모임에 참석해서 발언한 사람들이 통합진보당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이라면, 자신들의 그런 생각과 주장이 국민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통합진보당은 선거경쟁을 통해 존립이 확인되는 정당인 만큼, 궁극적으로는 선거를 통해 국민의 검증을 받게될 것이다. 그간 진보 정치를 자처한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을 볼 때, 진보 세력이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은 상당 기간 동안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윤경님은 미국 빙행턴 대학교 교수입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혼합체제, #광기, #종북몰이, #한국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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