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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2005. 7.).
 묘향산(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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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묘향산

흰 수건 쓴 아낙네

준기가 차창 밖 벼가 자라는 논둑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콩이 다닥다닥 심겨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벼논 그대로였다. 동구 어귀에는 하늘 높이 수양버드나무가 치솟았고 언저리 밭에는 고추밭이 있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아낙네가 밭고랑에서 붉은 고추를 따다가 도로에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는 누런 황소가 되새김질을 하며 꼬리로 파리를 쫓았다.

평양 묘향산 간 고속도로 언저리 산과 강, 그리고 들판과 마을을 보니 준기는 45년의 지난 세월이 그대로 정지한 듯 눈에 선했다. 그런데 도로 옆 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벌거숭이였다.

"산에 나무가 없습니다."
"조국해방전쟁 때 미제 쌕쌕이들이 폭탄을 마구 쏟아서 이러케 발가숭이가 된 거야요. 한 번 황무지가 되니까 여간해서 숲이 우거디디 않는구만요."

앞자리 리 선생의 대답이었다.

"아, 기렇습네까? 내레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네기(얘기) 듣기로는 조국해방전쟁 때 북조선에는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두 없었다 하더만요."
"기럼요, 미제 아새끼들 쌕쌕이 폭격 말 마라요. 정전회담이 지들 마음대로 되지 않자 조선의 온 도시마다 폭탄을 마구 뿌렛디요. 게다가 매가두(맥아더)란 놈이 원자탄을 터트린다는 말에 우리 인민들은 날마다 공포 속에서 살아시오."

청천강(2005. 7.)
 청천강(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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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청천강

리 선생이 그때를 회상하며 목청에 핏대를 세웠다. 준기는 그 얘기를 듣자 동대문시장 지게꾼 시절에 만난 함경도 출신 한 포목상 주인의 이야기가 되새겨 졌다.

그는 유엔군 흥남 철수 당시 함경도 함흥에서 살았다. 미군들이 철수한 뒤에 원자탄을 떨어트린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돌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피난봇짐을 지고 나섰다. 그때 그의 아내는 만삭이었다. 그의 아바이 오마니가 말했다.

"우리가 요기서 메느리 해산을 돌볼 테니 너만 한 보름 피난 갔다 오라야."

그는 부모가 떠미는 바람에 홀로 집을 나섰다. 그때 북한 사람들이 피난봇짐을 지고 흥남부두로 몰린 것은 미군이 곧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때 그 지역 대부분 사람들은 원자탄에 죽는다는 공포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그 강추위에도 모두들 보따리를 싸들고 피난길을 나섰다.

삭풍이 몰아치는 흥남부두에는 군인과 피난민들로 바글거렸다. 엘에스티(상륙작전함)가 부두에 닿아 그물망을 내리면 피난민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죽기 살기로 몰려들었다. 그 그물에 매달려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은 이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걸 보고도 누구 한 사람 안타까워하는 이도 없었다. 서로 자기만 살겠다고 발버둥 쳤다. 한 마디로 그때 흥남부두는 생지옥이었다.

"그 보름이 발세 15년이 넘었수."

그는 남쪽에서 다시 결혼을 했다. 그동안 먹고살기에 바빠 그런저런 일들을 다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즈음은 밥술을 먹게 되자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부모가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남쪽 아내 몰래 이따금 술집에 와서 대폿잔을 들이키며 향수를 달래고 있었다.

준기는 포로수용소에서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햇디만 요긴 기대롭네다."
"조선 산수는 어데나 다 비슷하디요."

리 선생이 동문서답처럼 대꾸했다. 준기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속도로 이정표에 나타나는 평원, 숙천, 안주, 박천, 개천, 영변… 이어지는 지명들이 모두가 정겨웠다. 마침내 청천강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여름날이면 아무 때나 달려와 멱을 감고, 고기잡이를 하며 놀았던 강이 아닌가.

"아, 청천강!" 

준기는 자신도 모르게 청천강을 부르짖었다. 핸들을 잡은 홍 선생이 준기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청천강 금성다리 위에다 차를 세웠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건물의 기둥과 굴뚝 일부만 남아 있다(1950. 11. 20.).
 유엔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건물의 기둥과 굴뚝 일부만 남아 있다(1950. 11. 2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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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산천

"요기서 잠시 쉬어 가겠습네다."

고속도로에는 워낙 차들의 통행이 뜸한지라 승용차를 갓길에 세우고 네 사람은 도로 밖으로 나왔다. 청천강 옛 이름이 '살수'가 아닌가. 이곳은 고구려 영양왕 때 을지문덕 장군이 신묘한 계책으로 수나라 백만 대군을 강물에 수장시킨 살수대첩의 승첩지다.

청천강 강물은 예나 다름없이 흘렀고, 강둑에는 온통 옥수수와 풀이 우거졌는데 소와 염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청천강 금성다리 아래로 두 소년이 꼴망태에 풀을 한 짐 지고서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준기는 그 소년들의 뒷모습에서 50년 전의 자신을 본 듯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천강변의 두 소년(2005. 7.)
 청천강변의 두 소년(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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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데렇게(저렇게) 자라시오."
"아, 네."

순희도 그 모습이 신기한 듯 청천강 언저리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자, 기만 갑세다."

리 선생과 홍 선생이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 거기서 조금 더 달리자 도로 표지판에 '구장'이 나왔다. 바로 준기의 고향마을이 아닌가. 청천강에는 네댓 명의 아이들이 멱을 감다가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벌거벗은 그들은 고추가 다 보였다. 강 건너 미루나무가 우뚝 선 마을이 청천강 나루터였던 수구동이었다.

동네 어귀에는 한 농사꾼이 소를 몰고 갔고, 밭에서는 두 아낙네가 머리에 수건을 쓴 채 김을 매고  있었다. 고향마을 일대가 45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시계 바늘이 정지된 산천이었다. 준기는 고향 산천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역 일대(1950. 9. 29.).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역 일대(1950. 9. 29.).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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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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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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