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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부산, 1951. 10. 26.)
 어린이들(부산, 1951. 10. 2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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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기분이네요

"제가 오늘 두 분 덕분에 특종을 했습니다."

문 기자는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언니이!"
"순옥아!"
"얘, 순희야!"
"엄니!"
"어쩐지 오늘 언니가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에 어머니 모시고 왔어요."

대한문 뒤에서 갑자기 가족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옥은 울먹이며 말했다.

"너도 보고 싶었고, 이분도 보고 싶어 왔다."

순희 어머니 오금례는 오른손에 순희의 손을, 왼손에는 준기의 손을 잡은 채 울먹였다.

"엄니,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니다. 이렇게 본 것만도 반갑고 고맙다."

순희는 어머니를 얼싸안고 흐느꼈다. 순희는 다시 동생 순옥이를 껴안았다.

"다시 만난 소감, 한 말씀해 주세요."

문창배 기자가 준기에게 물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내레 이제 죽어도 돟습네다(좋습니다)."
"최순희씨도 한 말씀해 주세요."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네요. 나를 잊지 않고 오늘까지 기다려준 김준기 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앞으로 계획도 한 말씀해 주세요."
"내레 거기까딘 생각해 보디 않아시우."
"나도 마찬가지예요."

준기와 순희의 대답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오직 만남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 다음은 피차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한낮의 열기가 대단했다.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우선 제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로 가 거기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땀을 식힌 뒤 점심을 먹으러 갑시다. 일부러 큰방을 구해뒀어요. 문 기자님도 같이 가요."
"초대하지 않아도 따라갈 겁니다."

덕수궁 수위가 준기에게 다가와 축하인사를 했다.

"축하합니다. 그동안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저희 덕수궁 직원들은 김준기씨 얼굴이 매우 익습니다. 해마다 8월 15일이면 꼭 오셨지요. 부디 즐거운 시간되세요."
"감사합네다."

준기는 감격하며 대답했다. 덕수궁 사람들이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남해안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피난민들(1951. 2. 8.).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남해안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피난민들(1951. 2. 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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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만의 만남

아름다움과 행복은 그 수명이 짧다고 했다. 그들의 재회 기간은 불과 열흘이었다. 24년만의 만남에 대한 대한신문의 특종 보도로 티브이, 잡지 기자들이 며칠 간 두 사람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만난 그들 두 사람은 이미 마흔 전후의 중년이었다. 그 사이 그들은 한 번씩 결혼을 했고, 이미 자녀까지 두었다.

더욱이 순희는 지난 15년간의 미국생활로 그새 미국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처럼 사고방식도 '순희'에서 '제인'으로 변했다. 순희는 앞뒤 생각지 않고 정열을 불태우는 여인이라기보다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숙녀로 변모했다. 준기는 순희가 언뜻 홀어미로 지낸다는 말을 전해 들어도 왠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준기는 그런 전후 사정을 황재웅 병원장에게 얘기했다. 

"사무장, 마흔이 넘은 여자를 품에 안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요. 우선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사람만의 여행을 가도록 하세요. 가능한 두 사람의 추억이 남아있는 장소로."
"그런 장소는 많디요. 낙동강 다부동 유학산 전투지와 구미 금오산, 김천, 추풍령… 등."
"그럼, 내 승용차를 빌려드릴 테니 내일 아침 순희씨를 만나자마자 먼저 드라이브 하자고 승용차에 태운 뒤, 무조건 경부고속도로를 타요. 그런 뒤 냅다 남쪽으로 달리는 겁니다."
"……"
"대체로 여자들은 박력있는 남자를 좋아하고, 명분과 분위기에 약하지요. 또 남자들은 여자 눈물에 약해요. 그래서 세상은 서로 얽혀 재미있게 돌아가는 겁니다. 피차 맨 정신으로는 일이 잘 엮어지지 않아요. 설사 여자 편에서 마음속으로는 한번 질펀하게 섹스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도 체면 때문에, 언저리 여건 때문에, 게다가 맑은 정신으로는…."
"기렇다믄…."

김준기가 후끈 달아 되물었다. 황 병원장은 여성편력이 많은 경력자답게 그에게 여자 다루는 법을 아주 자세히 강의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한테 인기 있는 남자는 아래위로 잘 먹여주는 남자지요."
"아래위라니요."
"사무장, 정말 몰라서 묻소."
"네."
"그래서 당신은 이제까지 혼자 살아온 거요. 위는 '마우스(Mouth)', 아래는 '벌 …."
"아, 네."

"그런데 먹물이 많이 든 여자나 이미 서양 물을 오래 먹은 여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자면 그 두 가지로도 잘 안 될 거요. 최소한 세 가지는 갖춰야지요."
"남은 한 가지 뭐야요?"
"이건 매우 비싼 강의인데, … 사무장 처지가 하도 딱하기에 내 맨입으로 가르쳐 주오. 그건 뭣이냐 하면, 그건 상대의 가슴에 '감동'을 심어주는 겁니다. 근데 그게 참 어려울 거요. 더욱이 마흔을 넘긴 산전수전을 다 넘긴 여자에게 감동을 주기란. 그래서 남녀 모두 중년 결혼이 어렵지요. 상대를 감동시키는 데는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최순희씨는 사무장의 순정에 조금은 감동하고 있을 거요. 그렇다고 선뜻 상대의 섹스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자기가 먼저 상대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사무장의 입에서보다 그 여자의 입으로 먼저 프러포즈하게 하세요. 그래야 두 분의 결혼이 이루어질 겁니다."
"기렇겠디요."

준기는 황 병원장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취사병이 야전에서 밥을 짓고 있다(1952. 3. 3.)..
 취사병이 야전에서 밥을 짓고 있다(1952. 3. 3.)..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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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과 성실성

"요즘 시중에는 '오십 과부는 축복'이라는 말도 있다는데, 상대는 마흔을 넘긴데다가 한미 양국에서 산전수전은 물론 이미 공중전까지 치른 사람이 아니오. 말은 하지 않을 테지만 그 여자는 머릿속 계산기를 엄청 두들긴 뒤 그 먼 미국에서 비싼 비행기를 타고 왔을 거요. 솔직히 서양에서는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외롭지 않게 사는 싱글들이 많아요. 길바닥에 널린 게 남자요, 여자지요. 그들은 섹스파트너를 자유롭게 바꿔가면서 싱글로 인생을 즐겁게 살지요. 그런 세상에 사는 그 여자가 뒤늦게 굳이 결혼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려고 하겠소."
"기럼, 어드러케 하믄 그 너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잇갓수?"

황 병원장은 싱긋 웃으며 즉답을 피했다.

"이러다간 눈 뻔히 뜬 채 놓치갓수. 데발 나 좀 살려주구려."
"글쎄요. 인생이란 하도 복잡해서 사실 남녀관계에는 더더욱 정답은 없소. 젊을 때는 서로들 눈에 콩깍지가 씌어 한두 가지 조건으로 여자를 낚을 수 있지만, 이제는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춰도 힘들 거요. 피차 혼자 사는 것보다 같이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면 쉽게 이루어질 거요. 옛날 애인이라고 쉽게 생각지 말고, 진정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세요. 인간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남녀를 불문하고 진정성과 성실성이 제일입니다. 혹이나 아오. 우리 김준기 사무장에게 뒤늦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올지. 자, 이만하면 내 강의는 됐지요. 나머지는 스스로 부딪치며 독학하세요. 사무장은 전쟁터에서 사선도 숱하게 넘지 않았습니까?"
"고맙습네다. 인간관계에는 진정성과 성실성이 데일이라는 말씀 잘 새게드덧습네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순희 그 너자를 내 품에 안가시오(안겠어요)."

"상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만만치 않은 여자일 겁니다. 아무튼 인간관계는 진정성과 성실성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오버하지 말고, 평소대로 최선을 다하시오. 내 보기에는 두 사람이 재회한 다음, 사무장이 그동안 그 여자에게 집적대지 않은 것을 상대는 좋게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다른 한편으로는 박력 없는 남자로 여길지도 몰라요. 그러면서도 한편 마음속으로는 이즈음 후끈 달아 있을 거요."
"기래서…."
"그 여자인들 오랜만에 고국에 와서 옛 애인 만나 스트레스를 좀 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소. 그런데 상대가 명분과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않으니 내심으로는 무척 답답했을 거요. 피차 부담이 없는 홀아비요, 홀어민데 말이오. 왜 우리 속담에도 '서방 죽고 처음'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 여자에게도 그동안 미국에서 먹었던 양키들의 허물 허물한 바나나보다 한국의 빳빳한 화끈하고 매운 조선고추 맛이 그리울 거요. 내가 보기에 명분은 이미 만들어졌어요. '24년 만에 만난 연인'보다 더 큰 명분이 어디 있소. 더욱이 상대는 생명의 은인인 데야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오. 이제는 분위기만 만들면 저절로 그 여자는 당신 품안에 안겨질 거요. 자, 그럼 행운을 비오."
"감사합네다. 덩말 고맙습네다."

"이만한 일에 뭘 그러시오. 사무장이 그동안 성실하게 살았고, 우리 병원이 사무장 덕분에 많이 컸고, 마흔이 되도록 마냥 혼자 사는 게 딱하기 때문에 들려준 말이오."
"아무튼 눈물이 날 만큼 고맙습네다. 내레 죽을 때까디 이 은혜만은 잊디 안카시오."
"사무장, 그만 됐소, 자, 행운을 비오. 굿럭(Good Luck)!"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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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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