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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머리숱 많은 것과 머리카락 굵은 것으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릴 적 동네 이발소에 가면 바리캉으로 아랫머리를 밀어 올리며 내뱉던 이발사 아저씨의 볼멘소리를 빠짐없이 들어야 했다.

"어허, 이거 꼭 돼지털 같네. 이놈 머리카락 참 억세다."

'돼지털'이라는 말이 참 듣기 싫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미간을 찡그린 채 이발사를 째려보면 이발하러 온 동네 아저씨가 "이놈 머리카락 주워다가 구둣솔 만들면 되겠다"며 농을 보태기 일쑤였다. 

'돼지털' 소리 듣기 싫어 원정 이발 가기도

까맣고 굵은 머리가 밀림처럼 빼곡한데다가 파마한 것처럼 굽슬굽슬했으니 머리만 커 보여 숫사자를 연상시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까맣고 굵은 머리가 밀림처럼 빼곡한데다가 파마한 것처럼 굽슬굽슬했으니 머리만 커 보여 숫사자를 연상시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 rgb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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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발소에 왔다가 이발사와 동네 아저씨의 농을 엿들은 친구가 학교에 온통 소문을 내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이름 대신 '돼지털', '구둣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어감이 별반 좋지 않은 별명을 얻은 뒤 그 이발소에 가기 싫어 머리 깎을 때마자 멀리 옆 동네로 원정을 가곤 했다.

장발이었던 대학 시절, 그때 별명은 '사자머리'였다. 숱이 많고 억센 머리결에 곱슬머리였으니 상상을 해보시라. 까맣고 굵은 머리가 밀림처럼 빼곡한데다가 파마한 것처럼 굽슬굽슬했으니 머리만 커 보여 숫사자를 연상시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숱이 많지 않고 곱슬거리지도 않아 고개를 돌릴 때마가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가진 친구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머리는 또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이발하는 주기를 다른 이들보다 절반으로 짧게 잡아야 했다. 머리 깎을 때마다 "숱을 아주 많이 쳐내주세요"라는 특별 주문을 넣어도 달포만 지나면 이내 '사자머리'가 돼 있었다.

머리숱 많지 않고 결 고운 아내 원했는데...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까운 상대나 배우자에게서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머리숱이 적당하고 머릿결이 부드러운 여자를 아내감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세상사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아내를 처음부터 사랑했지만 딱 하나 못마땅한 게 있었다. 바로 머리다. 나와 버금갈 정도로 숱이 많고 울창했다.

"숱이 많은 게 참 귀찮아! 머리카락이 반만 빠졌으면 좋겠어!"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릴 때마다 아내와 내가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었다. 그랬었다. 울창한 아내의 머리와 나의 사자머리가 영원할 것처럼 머리숱에 저주를 퍼붓곤 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그렇게 한 세월이 지난 뒤 드디어 작년부터 머리에서 '심각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나면 빠진 머리칼을 한 주먹씩 주워내던 아내가 어느 날 내게 고개를 숙여 머리를 헤집어 보이며 물었다. 

"머리숱 이 정도면 만족해요?"

놀라웠다. 정수리 부근이 휑할 정도였다. 숱이 엄청나게 줄어있었고 머리카락도 현저하게 가늘어져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 탈모가 많이 진행됐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당신까지…. 아무튼 숱이 줄어들어 훨씬 보기 좋아졌어. 내가 원했던 머리야. 난 만족해!"

이렇게 말하면서 아내 눈치를 살폈다. 얼굴에 '탈모의 공포감'이 역력했다. 너스레를 떨어 넘어가보려 했지만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어느새 아내에게 탈모를 걱정하는 나이가 찾아 온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이 왈칵 밀려왔다.

"돼지털은 양털, 구둣솔은 비단솔 됐네요"

아내가 내 머리를 보자며 앉아 보라고 한다. 멋쩍게 웃으며 앉으니 아내가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여기저기 움켜쥐어 본다. 그리곤 웃으며 농을 건넨다.

"돼지털은 양털이 됐고요, 억센 구둣솔은 비단솔이 됐네요. 어쩌나! 사자머리는 온데간데없고 털 빠진 강아지 머리만 있네요!"

나도 웃고 아내도 웃었다. 그때 아내가 앞으로는 이 샴푸로 머리를 감으라고 내민다. '탈모방지 효과'라는 선전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찍혀있는 샴푸였다. 고등학생 딸 아이가 이 샴푸를 보더니 투덜댄다. 숱 많은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머리카락이 밀림처럼 빽빽하고 풍성한 아이다.

"아휴! 나도 머리카락 반쯤 빠졌으면 좋겠어! 머리 땜에 스타일 안 나온단 말야."

아내와 난 딸이 내뱉은 말에 흠칫 놀라 서로를 쳐다보다 딸에게 손사래를 치며 합창을 했다.

"그런 말 마. 말이 씨가 된다고. 언젠가는 숱 없는 머리가 될테니 걱정 마. 살다 보면 숱 많은 게 그리울 때가 있단다!"

덧붙이는 글 | '있다 없으니까' 응모 글



태그:#머리숱, #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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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분야 개인 블로그을 운영하고 있는 중년남자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를 향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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