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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순이와 두 동생
 똥순이와 두 동생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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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자식이 셋 있다. 첫째 큰딸은 올해 아홉 살로 초등학교 2학년이다. 나를 닮아 자주 삐치고, 새침해하는 구석이 많다. 어린이집 2년 차인 둘째는 다섯 살 먹은 아들이다. 이 녀석은 막내인 세 살짜리 여동생에게도 자주 맞아 운다. 그래도 녀석은 태권도 흉내만 낼 뿐 결코 '폭력'을 쓰지 않는 순진무구형의 '평화주의자'다. 거꾸로 셋째인 막내딸은 '폭력'을 밥 먹듯 쓰는 동네 '깡패'다. 셋 모두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깃거리를 안고 있지만, 이 글의 주인공은 우리 큰딸이다.

큰딸은 내 나이 서른일곱에 얻은 늦둥이 자식이다. 그것도 아내가 첫째 아이를 유산한 뒤에 얻었다. 그래서 큰딸은 임신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한시도 제 부모 시름을 놓지 못하게 했다. 세상에 나올 때도 우리 부부의 애간장을 녹였다. 분만 진통이 시작된 후에도 열세 시간이 넘게 제 엄마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딸은 태명이 '꽃님'이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방에 들어서자 바닥과 천장이 온통 꽃천지였던 태몽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꽃님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꽃님아 꽃님아, 외양간 음매소도 밤하늘 별을 보고···" 같은 태교 노래도 제법 많이 불렀다. 아내가 둘째와 셋째를 임신했을 때와는 감히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꽃님이는 출산 직후부터 광주에 계신 장모님께서 건사하셨다. 우리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말마다 꽃님이를 보러 다녔다. 군산에서 광주까지는 두 시간 남짓 되는 거리. 그래도 그 길은 우리 부부를 마냥 달뜨게 했다. 늦게 얻은 첫 자식 큰딸 보러 가는 마음을 그 어디에 비하랴.

그 무렵 꽃님이는 '똥순'이라는 새 별명을 갖게 됐다. 꽃님이가 세상에 난 지 석 달쯤 지난 때였을까. 시린 1월의 어느 날 즈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말을 맞아 광주 처가에 갔다. 목욕을 마친 꽃님이가 '응가'를 했다. 내가 기저귀를 갈았다.

그런데 기저귀 속 '응가'가 그날따라 유난스러웠다. '명랑 쾌활'의 대명사격인 개나리꽃 색조도 그랬고, 시큼하고 달달한 향 역시 그랬다. 어른들의 '응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 '응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꽃님이의 '똥'은 '순'하고 부드럽게 주조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그날 이후로 '똥순'이가 된 꽃님이는 잘 먹고 잘 싸면서 무탈하게 잘 자랐다.

장모님께서는 똥순이를 온갖 사랑으로 돌봐주셨다. 하지만 아빠 엄마랑 떨어져 지내서였을까. 똥순이는 늘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 했다. 처가에 들어서면 계속 안아 달라거나 업어달라고 떼를 쓰곤 했다.

그러면서도 똥순이는 한편으로 사랑과 관심에 대한 요구를 대단히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주말 내내 함께 있다가 떠나는 우리를,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해맑은 웃음으로 배웅해줬다. 하지만 그 웃음은 군산으로 향하는 우리 부부의 머리와 가슴을 내내 하비었다. 나는 가끔 똥순이가 차라리 우리를 울음으로 보내줬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바라기도 했다.

내가 똥순이와 살아가는 법

두 살 무렵의 똥순이. 더위를 많이 타서 머리를 빡빡 밀었다. 이즈음 똥순이는 주말에 내려왔다가 떠나가는 나와 아내를 해맑은 미소로 배웅해 주었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두 살 무렵의 똥순이. 더위를 많이 타서 머리를 빡빡 밀었다. 이즈음 똥순이는 주말에 내려왔다가 떠나가는 나와 아내를 해맑은 미소로 배웅해 주었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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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방학을 맞은 똥순이는 여수에 사는 제 이모네로 여름방학 휴가를 떠났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방학을 학원을 전전하면서 보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대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삶의 진정한 기쁨을 배우면 좋겠다 생각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인생의 참지혜를 깨닫기를 원했다. 똥순이가 초등학생이 된 지난해부터 제 이모네에서 방학나기를 해오고 있는 이유다.

그런 덕분일까. 똥순이는 스스로 무언가를 잘해낸다. 푼 계란과 밀가루와 생쌀을 섞어 만든 '기이한' 반죽을 숭덩숭덩 썬 애호박에 묻혀 지져내는 똥순이는 새 요리 개발의 달인이다. 가상의 '군산출판사'에서 출판한 '꽃과 나무'라는 도감을 만들어내는 똥순이는 개인 출판업자다. A4 용지를 사등분한 곳에 네 컷짜리 공포 만화도 즐겨 그리는 똥순이는 상상력 풍부한 작가기도 하다.

똥순이는 놀이도 좋아한다. 놀이의 주인공은 당연히 똥순이다. 똥순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시장 놀이다. 녀석은 좌판에 야채나 족발 등속을 놓고 파는 가게 주인이 된다. 가게 주인은 당연히 주인공이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시장을 보러 나온 주부 역을 맡는다. 그 아이는 둘째가 맡는다. 가게 주인이 된 주인공 똥순이는 내게 직접 물건을 골라주고, 가격을 수시로 바꿔가며 노련하게 흥정을 주도한다. 그 시장 놀이를 참 무던히도 많이 했다(심지어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 무언가를 잘 해내고, 놀이에서마다 상황을 주도하는 똥순이는 잠자리도 제 뜻대로 정하는 아이다. 우리 식구는 한 방에 이불을 깔고 온 식구가 함께 잠을 잔다. 자리 순서는 똥순이, 나, 둘째, 막내 순이다. 처음 똥순이가 둘째의 요구(원래 둘째는 맨 구석 쪽인 제 누나 자리를 원했다)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정한 순서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에는 똥순이가 일방적으로 정한 규칙을 잘 따라야 한다. 가령 나는 누워서도 천장을 바로 봐서는 안 된다. 둘째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울 수도 없다. 그러면 똥순이로부터 불벼락 같이 한 마디가 떨어진다.

"아빠! 아빠는 똥준이(둘째 별칭)만 좋아하지?"

그렇게 말하며 홱 돌아눕는 똥순이는 정말 '무섭다'. 똥순이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 규칙 외에 내가 지켜야 하는 규칙 한 가지가 또 있다. 살짝 옆으로 누운 똥순이의 등과 팔·다리를 고루고루 긁어주는 것. 내가 혹여 등을 충분히 긁어주지 않으면 똥순이는 "또, 또"를 연발한다. 몸이 피곤한 내가 "이제 그만 하자"는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똥순이는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을 외쳐댄다.

그렇게 내가 하염없이 등을 긁어주기 시작하면 똥순이는 언제였나 싶게 꿈나라로 들어간다. 똥순이 세 살 무렵무터 시작된 이 등 긁기는 똥순이에게는 그야말로 훌륭한 수면제다. 내 등 긁기로 깊은 잠에 빠져 든 똥순이의 표정은 정말 편안하다. 그 표정에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진다. 피곤에 눈이 감기면서도 똥순이 등 긁어주는 일은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

달라진 똥순이, 참 야멸차더라

세 살 무렵의 똥순이. 이때부터 똥순이는 등 긁기를 저만의 '수면제'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세 살 무렵의 똥순이. 이때부터 똥순이는 등 긁기를 저만의 '수면제'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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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부터 똥순이가 달라졌다. 그토록 좋아한 시장 놀이를 마지막으로 한 지 거의 반년이 지난 것 같다. 잠들 때마다 요구하던 등 긁기도 갈수록 숙지막해지고 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8월 첫째 주말, 처가 식구들과 함께 장모님 친정 동네가 있는 고흥에 가 여름 휴가를 보냈다. 여수에서 여름나기를 하던 똥순이도 고흥으로 왔다. 일주일만의 애틋한 만남이었다. 당연히 똥순이가 자기 옆에는 아빠가 자야 한다느니, 등을 긁어 주라느니 하며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 줄 알았다. 그리하여 둘째 똥준이와 한바탕 승강이를 벌이며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똥순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똥순이는 "오늘은 할머니 옆에서 잘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먼저 잠든 막둥이와 함께 다른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 내게 와서 똥순이는 심드렁하게 "아빠, 오늘 똥이(막둥이의 별칭)랑 잘 거지"라고는 다시 냉큼 거실로 향했다.

서운했다. 찬바람이 나게 홱 뒤돌아서서 가는 똥순이가 왜 그리 야멸차 보이던지…. 그토록 자주 이런저런 놀이를 원하던 똥순이가 왜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걸까. 제 사촌들이랑 지낸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일까. 한창 커나가는 나이 탓일까. 올해 고3 담임을 맡으면서 야간 자습이나 주말 자습 감독 때문에 똥순이와 더 자주 놀지 못했던 환경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다일까. 몸이 피곤한 날 똥순이가 시장 놀이를 하자고 하면 "다음에 하자, 아빠 피곤해"라며 거절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크게 실망스러워하던 똥순이의 표정이 아프게 떠오른다. 레이저 눈빛을 쏘는 똥순이에게 밀려 마지 못해 시장 놀이를 하게 되면 똥순이로부터 "아빠, 놀이에 집중해야지!"라는 핀잔을 들은 기억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정말 피곤한 날, 등을 긁어달라는 똥순이에게 가끔 내뱉은 "너 때문에 아빠는 제때 잠도 못 자"라는 말이 똥순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 또한, 나도 모르게 똥순이 먼저 잠이 든 적도 많았다. 그러다 잠이 깨 똥순이 쪽을 보면 똥순이는 내가 누운 반대쪽을 향해 몸을 돌려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혼자 잠들면서 녀석은 속으로 내가 얼마나 야속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때마다 나는 애틋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부모는 아이들을 자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안아주거나 입맞춤해줘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정서적인 애착감을 가지고 안정적이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때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떠난다. 그때가 되면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애틋해하며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삶이 지치고 힘들더라도 아이와 더 자주, 더 오래 놀자. 사실 마음을 열고 마음껏 놀다 보면 피곤도 풀리고 찌들어 굳은 마음이 눅어지기도 한다. 내 큰딸 똥순이와 함께 한 시장 놀이와 등 긁기…, 있다 없으니까 정말 허허롭기만 하다!


태그:#아이들과 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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