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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지난 역사에서 많은 외도를 한 데 대해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국익에 전념하는 순수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 정부의 국정목표 실현에 헌신해 달라, 국민이 진정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제도와 조직문화를 개선해 경쟁력 있는 정보기관이 돼 달라."

2008년 5월 3일, 국정원 첫 업무보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일부다. 이 주문 직후 김성호 당시 국정원장은 "국정원 업무와 조직을 쇄신해 최고의 역량을 갖춘 순수 정보기관으로 만들겠다"는 다짐과 함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중립 선언문 선포식' 개최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은 순수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촛불시위 이후 2009년 2월 국정원장에 취임한 'MB맨 원세훈'은 국정원을 철저하게 권력하부기관으로 만들었다.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와 같은 엄청난 일들은 빗나간 권력과 국정원의 그릇된 충성심이 환상적(?)으로 결합해 만들어진 사건이다.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직선제에 대한 전면 부정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6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촛불집회'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 국정원 규탄 집회 "박근혜 책임져"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6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촛불집회'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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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내건 1987년 6월 항쟁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직선제 수용이라는 6.29 선언으로 일단락된다. 6.29 선언은 아직까지 '속이구 선언'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국민의 힘으로 직선제를 쟁취했다는 점에서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으로 불거진 일련의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은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물인 직선제에 대한 전면 부정인 셈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된 후 치러진 6번의 대통령 선거는 총풍 사건, 차떼기 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관이 여론 조작에 앞장서고 경찰 책임자가 거짓 내용 발표를 주도하고, 여기에 여당과 보수언론까지 나서 범법 행위를 동조하고 비호한 행위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스럽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적 직접 선거의 틀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지난 18대 대선은 실질적 직선제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금까지 드러난 국정원 댓글 사건의 내용만 보더라도 권력이 밀실의 야합으로 대통령을 만들어내던 과거 체육관 대통령 선거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2012년 12월 19일. 국민들에게는 한 표를 행사하는 소중한 날이었지만, 국정원과 이명박 정부에게는 은밀히 내정한 후보(?)의 당선을 확인하는 날이었단 것인가.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도 다르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NLL 포기 발언을 했고 이는 곧 영토 포기와 같다고 몰아붙였다. 영토를 북에 넘긴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선 후보의 안보관이 같을 수밖에 없다는 추론적 결론으로 새누리당은 여론을 자극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응은 쉽지 않았다.

검찰 수사 결과 발표 이후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으로 궁지에 몰린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또다시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카드를 꺼내들었다. 야당뿐만 아니라 학계와 법조계에서 정상회담 내용 공개는 법에 위반될 뿐더러 좋지 않는 선례를 남길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소용 없었다. 국정원은 '명예를 지킨다'는 이해되지 않는 이유를 내세워 요약본을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했다. 다음날 일부 언론에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그대로 공개됐다.

그러나 결과는 새누리당과 국정원의 의도와 반대로 돌아갔다. 요약본뿐만 아니라 공개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체 내용 어디에도 NLL 포기 발언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의 서해평화구상안이 합리적이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오히려 궁지에 몰린 건 새누리당과 국정원이었다. 이어 지난 대선 때 김무성 의원의 유세 발언이 정상회담회의록 전문과 거의 흡사해 회의록 전문이 불법적으로 유출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또한 국정원이 만든 요약본과 언론사에 공개된 전문 내용 일부가 달라 악의적 편집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의 NLL 발언 발설자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이 6월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의원에게 다가가 해명한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의 NLL 발언 발설자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이 6월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의원에게 다가가 해명한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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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정상회담회의록 공개를 둘러싼 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리 혼란스러울 것도 없다. NLL 포기 발언 논란 또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은 봉인된 국가기밀을 절차도 없이 풀어, 내용을 왜곡해서 대선에 이용했다. 정권과 국가정보기관과 여당이 모의해 불법을 자행했고 민심을 왜곡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신성한 날, 국민의 소중한 한 표가 그들의 왜곡된 음모의 거수기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대로 넘어가지 말자

1일 여야가 국정조사에 합의했지만, 국정조사 위원의 구성과 범위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진선미 의원 등이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의 피고발인이기 때문에 국정조사 위원으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게 새누리당의 주장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주장이 아니더라도 국정조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과 한편이 되어 국정을 유린한 새누리당이 과연 무엇을 밝혀내고 단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국민들을 TV 앞 구경꾼으로 전락시키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는 멈추어 버렸다. 이 엄청난 범죄는 국민이 나서지 않으면 단죄할 수도 고칠 수도 없다.  국민들이 구경꾼이 되면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히지 않는다. 형식적 직선제가 있다고 한들 이런 음모가 판친다면 여전히 체육관 대통령 만들기와 다름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지난 일은 덮고 넘어가자고 말하지 말자. 지난 과오를 바로 잡지 않겠다는 건 미래에 똑같은 잘못을 용인하겠다는 것과 같다. 내년 지자체 선거에서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반복될 뿐이다.


태그:#국정원 대선 개입, #N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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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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