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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고장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날을 잡아 볍씨를 고르고 못자리를 만들고 자란 모를 쪄서 물을 댄 논으로 나르는 일은 집안 식구들이 하는 일이라면 모내기는 마을의 행사였다. 하얀 옷을 입은 이웃들이 못줄을 따라 줄지어 서서 모를 심었는데 못줄을 잡은 아저씨의 농섞인 호령소리에 누군가의 구성진 노래 소리를 더하면 논에는 희망을 담은 흥이 넘쳤다.

거기에 새참의 기쁨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모르는 길손까지 불러 앉히고 고봉밥을 권하던 인심은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 때 모내기는 민족적으로 희망을 심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논에는 이앙기만 오락가락하고 논둑에는 늙은 논 주인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지난 시절 농경사회에서 토지는 부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생명의 원천인 더 넓고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의 가치는 매우 높아 토지의 쟁탈전은 매우 심각했었다. 역대 왕조는 어떻게 하면 토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 하는 점에 고심하여 무수히 전제(田制)를 바꾸어가며 토지가 개인에게 집중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실제 성공한 사례는 드물었다. 토지를 향한 인간의 집념과 욕망을 법과 제도만으로 규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고려의 멸망도 그 저변에는 토지제도의 문란이 있었고, 조선의 국력이 쇠한 이면에도 토지제도의 실패가 한 원인이었다.

산업화된 요즘은 토지는 농업 생산기반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 생산 기반으로 변화되었지만 가치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재벌들은 물론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들의 상당수가 다양한 형태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토지에 대한 인간의 집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또 2차 산업에 이은 금융 서비스 등 3차 산업의 발달로 인해 일부 토지는 생산수단이 아니라 황금 알을 낳는 투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도시 목이 좋은 곳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되기도 했는데 이는 아직도 토지가 탐욕의 대상으로 중요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골의 순수한 농경지로서의 논은 농산물의 가치 특히 땀 흘려 농사를 지어 생산해도 그 중요성만큼 대접해주지 않은 상대적으로 낮은 쌀값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농촌에서 거래되는 밭의 가격이 논보다 훨씬 높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소유 경지 면적이 대부분 1ha(약 1만㎡로 3000평이다)미만인 우리 농가의 현실과 농촌의 고령화로 인한 일손의 부족으로 인해 소규모 농가에서는 집에서 먼 깊은 골짜기 논은 아예 버려두거나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지어도 논을 '계륵'취급하고 있다. 광주에서 가까운 우리 마을 안 쪽에 있는, 예전에는 다랑이 논이었는데 지금은 묵정밭이 된 것도 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25일, 이종하기에 좋은 날씨라며 홀로 서있는 박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더니 노인의 이야기는 길었다. 모를 심는 논은 약 1200평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상당히 높은 재산 가치를 지닌 논을 보는 노인의 표정에는 신바람도 없고 기대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논 1마지기(200평)당 쌀의 수확량은 기후 토질 등이 다른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개 80kg짜리 4가마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서는 '왕건이 탐낸 쌀'이라는 상품으로 전국에 알려진 '청무'라는 품종의 벼를 쓰는데, 쌀맛은 좋지만 소출이 80kg짜리 4가마가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노인이 논 한마지기에서 생산한 쌀을 그냥 4가마로 잡고 정부의 목표가격 17만4천 83원으로 계산했을 경우 약 69만 원이 된다. 다시 노인의 논은 6마지기라고 했으니 24가마의 생산이 가능하다는 말이 되고, 그것을 정부의 목표 가격으로 환산하면 쌀의 현금 가치는 약 410만 원이 된다.

그렇다면 박 노인의 논 6마지기에서 쌀 24가마를 생산하기 위한 투자비용은 얼마나 될까?
노인의 말에 의하면 1마지기당 초기비용으로 모판을 만드는데 종자대금으로 약 3만 원과 비료 대금 9만 원이 든다고 했다. 노인의 논은 6마지기이니 기본으로 72만 원의 든다는 계산이 된다. 거기에 트랙터와 이앙기를 불러 일을 시키면 15만 원이 든다고 했는데 벼농사 초기비용으로 99만 원이 들어가는 셈이 된다. 그밖에 우렁이농법으로 했을 경우 우렁이 종패 값이며 기본적인 병충해 방제 농약 대금이 추가되는데 그 비용이 못해도 10만 원 정도라고 했다.

박노인이 쌀 24가마를 수확을 위해서는 지대와 투입한 노동 가치를 계산하지 않더라도 약110만 원의 초기 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정부가 제시한 목표가격으로 계산했을 경우 논 6마지기 농사를 지은 박 노인의 순 소득은 어림하여 약 300만 원으로 볼 수 있다(박 노인의 말대로 1마지기당 소출을 3가마 반으로 했을 경우 소득은 훨씬 더 낮아질 것이다). 이른 봄 모판을 만들고 한 여름 피를 뽑고, 수확한 후 햇볕에 말리는 일은 최소한 두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지대는 제외하더라도 2월부터 10월까지 여러 과정에 두 사람이 투입한 시간과 노동의 가치가 300만 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 계산이라면 박노인의 열배쯤 되는 1만2000(60마지기)평 논을 가진 사람의 소득이 연간 약 3000만 원이라는 결론인데 우리나라 농촌에서 그 정도의 논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나라의 대부분 농가가 평균 3000평이 못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도저히 쌀농사만으로는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농촌에 남으려 할 것인가!

"나이 먹은 우리를 써주는 데도 없고, 있는 땅 놀리기 아깝고, 우리 식량하고 또 자식들한테 보내고 그래도 조금 남으면 수매해서 가용쓴다고 생각함시로 하는 일이제 돈 벌자고 하는 일이라요?"
"농사 지어서 부자 된 사람 봤소? 억대 수입이라고 하는 농가도 있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런 집들도 기계 살 때 융자 받은 것, 시설자금 영농자금으로 융자받은 것 갚고 나면 우리하고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그리고 해마다 농사가 똑 같이 잘 되는 것도 아닌데 한 두해 반짝하면 끝이제. 골병만 처지는 것이 농사지라."

집에 와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았더니 여러 사람들이 올린 글의 내용은 마을 박노인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에게 쌀은 무엇이었나? 

80년대 초까지도 쌀은 비쌌다. 보통 서민들에게도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 때가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귀물이었다. 그래서 국민 대부분은 지겹게 잡곡밥을 먹었다. 그나마 춘궁기에는 그것도 없어 나물죽을 먹었고, 나물죽도 없어 점심은 거르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쌀 부족 때문에 50년대 말에는 교사와 공무원 월급도 현재의 베트남에서 수입한 안남미라는 찰기 없는 푸석한 쌀을 배급하기도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교직에 발령받은 72년도 쌀값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5천 원 정도로 기억한다. 첫 월급이 2만 4천 원 가량이었는데 쌀 다섯 가마 값이 채 안 되는 금액이었던 셈이다. 당시 하숙비가 5천원이었다. 그때까지도 쌀값은 국민 소득 수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정부에게 높은 쌀값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서민 생활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쌀값 잡기에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고 본다. 우선 새로운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보급하여 쌀의 생산을 늘렸고 한편으로는 쌀의 수요를 줄이자는 취지에서 정부는 거의 강제적으로 혼분식을 장려하였는데 당시로는 쌀에 비해 가격이 낮은 밀가루를 대량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학생들 점심 도시락을 검사하여 혼분식 이행 여부를 확인한 것도 70년대의 웃지 못 할 풍경이었다. 그로 인해 70년대에는 밀가루 음식이 우리 식생활에 깊이 파고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즈음 가난한 서민들은 밥 대신 밀가루로 만든 라면이나 빵 등을 주식으로 했다고 기억한다. 알고 보면 정부가 쌀의 생산 증대, 밀가루 수입 증대를 통해 노린 것은 산업화에 필요한 값싼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 특히 친 정부적인 사람들은 쌀로 대표되는 농촌을 희생시켜 산업화를 추진했던 정부의 정책이 보릿고개에 허덕이던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는 정책으로 미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농업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식량 자급률이 22.6%로 떨어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아쉬운 대목이지만 재벌위주의 수출정책으로 추진한 산업화의 속도를 늦추고 적어도 농업생산을 증대시키는 정책을 병행했어야 옳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의 경제 성장은 조금 더뎠을지라도 외국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는 수출 위주의 가공무역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우리 산업의 핵심을 지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눈치를 보는 일도 매년 300억 달러가 넘는 무역 역조현상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산업화가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 빵을 얻기 위해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던 세월이었다는 회한이 남는다.

쌀의 자급이라는 목표는 이루어졌는가?

이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얀 쌀밥을 많이 먹지 않는다. 정체도 불명한 이국적인 식품에 맛 들여진 백성들이 밥의 양을 줄인 탓에 쌀이 남아도는 기현상까지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마침내 지난 정권이 소원하고 추진했던 대로 현재 우리나라는 쌀 자급률이 100%를 넘었다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쌀의 자급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정부가 바라는 만큼 쌀 생산이 증가하였기 때문일까? 설명하기보다 농수산부 통계자료를 발췌하여 인용해보고자 한다. 

연도/생산량(톤) : 1971년/3,997,635  1981년/5,062,975  2001년/5,514,796 2006년/4,679,991  2012년/4,006,000

우리나라 쌀 생산은 2001년을 정점으로 생산량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데, 2012년 수확량은 혼분식을 장려했던 70년대에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쌀 수확의 증가로 인해 쌀의 자급이 달성되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 셈이다. 그럼에도 쌀의 자급률이 비록허상일지라도 100% 달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국민 식생활의 변화로 쌀의 소비가 줄어든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민 식생활의 변화는 언뜻 보면 개인의 선택 같지만 사실 깊이 보면 정부가 의도적인 정책 때문이었다고 본다.

오랫동안 국민들을 계도한 정부의 공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아무튼 쌀의 생산 감소는 그만큼 세계적인 식량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만약 식량이 무기화 될 경우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이 상상 이상이라는 점에서 큰 문제라는 생각을 한다. 

최근(5월13일) 농수산부에서는 쌀 목표 가격을 2005년 80kg당 17만 83원으로 결정한 후 8년 만에 4천원 인상한 17만 4천 83원으로 결정 고시하였다. 8년 만에 고작 2.4%인상이라니! 그럼에도 농어촌 지역구를 출신인 국회의원도 많지만 어떤 '의원나리'도 정부의 쌀값대책을 따지고 걱정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민생을 살리겠다고 큰 소리를 내지만 민생의 대상에서 농민은 제외되고 있음을 사실적으로 증명해준 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기막힌 정부의 결정에 주류 언론 역시 농민의 편에서 다른 물가가 얼마나 올랐으며  또 우리 쌀값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쌀의 국제시세 변동이나 앞으로 우리 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한 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언론은 마치 쌀값이 크게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쌀값 인상에 화가 난 시민이 쌀값인상을 알리는 현수막에 불을 질렀다는 기사 같지 않은 기사나 흘렸다.

도시민을 위한 택지전용, 논에 벼대신 특용작물 전환, 또 4대강 사업으로 기름진 하천부지를 파헤치는 등 식량의 생산기반인 절대농지를 파괴한 정부.  제나라 백성들에게 정체가 의심스럽고 안전하지 못한 식품, 결과를 알 수 없는 유전자조작식품을 먹이면서 배부르게 해준 것이 자신의 공이라고 내세우는 얼간이 정부. 그런 정부에 침묵하는 야당, 그런 정부를 지지하는 언론들. 그러는 가운데 쓰러져가는 농촌.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농산물. 그런데 아직도 식량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진 현실을 외면하고 쌀값만 올랐다고 합창하는 꼴이라니!
 
식량의 위기는 현실이다.

최근 양파 등 농산물 가격이 전년에 비해 "폭등"했다고 비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장에서 양파는 물론 다른 농산물 가격도 계속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국민들이 아는 대로 농촌의 노령화로 인해 농촌의 생산 기반은 거의 붕괴상태이다. 그로 인해 마늘 고추 참깨 양파 등 양념류는 물론 도라지 고사리 등 산나물도 농촌의 5일장에서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중국은 우리에게 '깐마늘'을 수입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지 않는다. 우리 아니더라도 세계적으로 마늘의 수요는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늘 생산량이 수요를 앞지를 날이 머지않았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세계 인구는 증가하는데 주요 곡물 생산국들의 곡물 생산량은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의 감소로 인해 밀과 옥수수 콩의 세계 시장 가격은 해마다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밀의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중국 인민들의 소득향상으로 쌀 수요는 증가하여 세계 식량 시장의 불랙홀이 되고 있다. 또 동남아시아 주요 쌀 생산국들의 수확량 감소, 일본쌀의 세슘 오염도 곡물 가격에 영향을 준다는 분석이 보인다.밀과 옥수수와 쌀은 관계없는 작물 같지만 인류의 중요한 주식이라는 점에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쌀값은 밀과 옥수수의 가격상승에 연동되어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농지의 무분별한 전용으로 우리 농촌의 생산 기반 붕괴, 세계적인 곡물 가격의 상승, 식량을 자원화하려는 움직임 등 쌀값이 오를 수밖에 없는 요건이 두루 갖추어진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더 나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로 인해 가뭄, 홍수 태풍의 피해가 재앙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한반도의 기후 변화는 더 심각하다는 진단이다. 이러한 기후 변화도 쌀을 비롯한 곡물 생산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 우리 정부는 쌀 증산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목표가격을 정하여 쌀값 인상을 억제하면서 농민들의 증산의욕을 꺾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1인당 GDP가 5천 달러를 밑도는 중국에서 쌀 20kg 한 포대의 소매가격이 약 2만원이라고 한다.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는다는 우리나라에서 20kg 한 포대의 소매가격은 최상품이 5만원이다. 해묵은 정부미는 3만원 한 적도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쌀값을 중국 쌀값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 국민 소득에 비해 쌀값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새겨볼 일이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또 시급히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역사가 가르쳐준 사실이지만, 전쟁은 물론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서민들이었다. 흉년으로 인한 기근에 가장 먼저 죽는 사람들도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었다. 그렇게 쌀과 밀의 가격이 오르게 되면 식량 자급률이 20%초반을 밑도는 우리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면 결국 고통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의 몫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 밀 옥수수 등의 국제시세 상승으로 인해 국내 쌀값이 10%만 뛰어도 서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지고 국가의 부담은 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권의 안정을 바라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이제 정부 그리고 정치인들이 먼저 식량의 자급 없는 산업화는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각성하고 목전의 이익만을 위해 생존의 근거를 파괴하는 어리석은 정치는 그쳐야 한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쌀 생산을 늘리고 식량 자급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농민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결코 농민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우선 직불금을 인상해서라도 쌀의 생산을 늘리도록 유도해야 한다. 농촌이 안정되면 귀농 인구가 증가하여 실업률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가져올 것이다.

이제 문득 정신이 든 것처럼 대다수 언론들이 '슬로시티'니 '힐링'이라는 말로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 이는 병들어 지친 백성에게 웃음을 강요하며 약 올리는 꼴밖에는 아닐 것이다. 농어촌을 선거구로 하는 국회의원들은 농촌의 현실을 깊이 살펴야 한다. 언론도 상황을 바로보고 미래의 길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국민 없는 기업의 존립이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업도 지혜롭게 모든 국민들이 공생할 수 있는 길,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국민들도 농촌의 안정과 쌀 수확의 증대야말로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는 첫 번째 일임을 알았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쌀, #모내기, #식량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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