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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느끼는 게 있다면, 박범신의 문장력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의 문장은 <촐라체>를 읽고 있는 나를 히말라야 산맥, 온전히 그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토록 그의 문장은 신비로웠다. 그래서 2년 만에 읽는 그의 소설은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많은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서를 끝낸 내 입에선, '역시 박범신!' 하는 말이 나왔다.

나는 영화로 <은교>를 먼저 보았다. 워낙 개봉 전부터 홍보도 많았고, 박해일과 김무열 역시 연기력에서는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생각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뭐랄까……요란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자극적인 걸 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영화를 PR했을 뿐, 영화 <은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책을 읽고 나니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책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가 죽은 뒤부터 시작된다. 변호사 Q, 그리고 죽은 이적요와 서지우 이 세 사람의 시점에서 소설은 전개된다. 영화보다 책이 더 마음에 드는 이유 중 하나다.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내용이 전개되니 그들의 내면에 대해서 더 빠르고 깊은 이해가 가능했다. 교수님께서 <은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노추(老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영화 속 이적요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추(醜)를 표현하기에 그는 너무 추(醜)하지 않았다. 감독은 이적요를 더욱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어야 한다. 18살 은교를 보는 칠순 노인의 눈빛에서 나는 사랑도, 욕망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적요 자기 자신도 은교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변태적 성욕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엔 결국 너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화장(火葬)>에서 주인공의 행동에서 나는 혼란을 느꼈다. 김훈의 문체는 너무도 담담하다. 하지만 보는 이에겐 왠지 모를 불편함을 준다. 중년 남성의 시점에서 죽음은 그렇게도 담담한 것일까. 가장 사랑하는 여자이자 사랑하는 자식의 어머니였던 그녀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감정의 요동이 없다. 병들어 죽어가는 아내를 간병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선 찬란한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는 회사 여사원을 생각한다. 두 여자의 모습은 극명히 대비되면서도 아이러니함을 준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두 여자의 모습이 어찌 이토록 다를까.

시신을 화장(火葬)하면서도 주인공은 자신의 직업인 화장(化粧)을 잊지 않는다. 화장(化粧)은 '추은주' 그녀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성에게 화장은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존재다. 이러한 모습에서 젊은 '추은주'와 화장(化粧)은 일맥상통한다. '은교'와 '추은주'는 젊다. 소설 속 그들의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그 이유는 바로 자신들은 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을 땐 그 소중함을 모르나보다. 영화 속에서 영화 속에서 이적요는 서지우의 문학상 수상 자리에서 축하 인사를 위해 단상 위에 올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아, 늙어간다는 건 저런 것일까. 늙음이라는 족쇄에 묶여 사랑하는 여자를 안지 못하는,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젊은 서지우를 보며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그의 처지…….

마음이 좋지 않다. 박범신, 그는 존재의 내밀한 욕망을 뛰어난 문체로 표현해냈다. 인간의 욕망은 때론 그렇게 파멸을 몰고 온다. 공허함이 내 온몸을 감쌌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늙어가겠지. 그 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나의 추함을 이겨내야 하는가. 은교를 처음 만난 날, 의자 손잡이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던 그녀의 하얀 팔. 그리고 투명하게 보이는 푸른 정맥. 검버섯 핀 초라한 이적요의 몸과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나와는 너무도 다른 젊음을 가진 이를 사랑하는 상실감……둘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 일일까?

아니, 어쩌면 <화장(火葬)>을 읽으며 내가 느낀 건, 정작 더 고통스러웠을 사람은 주인공이 아니라 뇌종양에 걸린 아내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추(醜)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병들어가는 몸이 싫고, 매일같이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이다. 그 고통을 그녀는 죽음으로서 끝낸 것이라 생각한다.

서지우의 죽음 역시 슬프다. 별을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는 그는 결국 문학적으로도, 그리고 한 남자로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그는 과연 은교를 사랑했을까. 혹, 스승에 대한 빗나간 존경과 사랑이 그렇게 그를 나락으로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이적요에게 없는 '젊음'을 가졌지만 '천부적 재능'을 갖지 못했던 서지우.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과 결국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인간은 항상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한다. 그것은 곧 욕심이 되고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을 놓았을 때, 얼마나 편해질 수 있는지 알기를 바란다.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문학사상사(2004)


은교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2010)


태그:#은교,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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