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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과 을(乙)의 간격이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진 것일까.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근로계약서 상 갑과 을의 관계는 동일한 지위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갑과 을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가르는 표현이 되었다. 어떤 실력이나 구조의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을 향해 '네가 갑이야'라고 말하는 농담 역시 보편화 되어있다.

요즘 '갑을 관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한 표현이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계급을 가르고 우월의식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현대백화점은 10일부터 3500여 개 협력사와 체결하는 모든 거래 계약서에 '갑을' 표현을 금지하기로 했다. 물론 호칭의 변화가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표현의 변화만으로 '갑을 문제'가 개선될 수 있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갑의 횡포

신문, 뉴스, 라디오 등 각종 매스컴과 사람들의 입에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이름이 하염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 대변인이 미국의 대사관 인턴을 성추행한 이 사건의 파문은 날이 갈 수록 더해지고 있다. '갑'의 횡포를 감추기 위해 피해 여성의 방을 몇 번이고 찾아가 만나려 했다는 정황마저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남양유업의 대국민 사과 현수막을 '윤창중 대변인 감사합니다'로 바꾸어 패러디 한 사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윤창중 사건 덕에 남양유업 밀어내기 파문이 묻히고 있는 상황을 적절히 비꼰 것이다. 남양유업의 불공정거래는 '갑을 문제'를 공론화시킨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그리고 지난 10일 숙대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기업 인사 담당자의 '막말'을 고발한 글이 올라왔다. 해당 강사는 "오늘 수업 태도 안 좋으면 회사 돌아가서 **생들 절대 안 뽑는다고 말할 거다"라는 말로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며 여대생을 비하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강사의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태도는 학생들에게 불쾌감뿐 아니라 취업에 지장 받지 않기 위해 그 불쾌감을 드러낼 수조차 없다는 서러움을 안겨주었다. 그 게시물의 제목은 '갑의 횡포를 여실히 느꼈던 성공취업실전 강의' 였다.

갑(甲)갑한 시대가 찾아오다

1990년대 케인스 시대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대한민국은 무한 경쟁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 속에서 승리한 자들은 '갑'이 라는 계급을 얻는다. 그리고 '갑'은 '을'을 아무렇게나 주무를 수 있는 비합법적인 특권을 가지게 된다. 자본이 계급을 나누고, 법조차 특권층의 입맛대로 조리되어 '을'에게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고 있는 사회다.

앞서 언급한 윤창중 사건,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횡포, 인사 담당자의 막말 파문 모두 갑과 을의 계급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밀어내기를 감당하지 못하면 그대로 '빚'으로 떠안게 되는 대리점주, 취업에 악영향을 줄까 봐 불쾌함과 치욕마저 감춰야 하는 취업준비생들, 잘릴까 봐 최저임금조차 요구하지 못하는 알바생, 거대한 '갑'의 주무름에 아무 말도 못 했을 시대의 '을'들은 그야말로 계급사회 아래 핍박당하고 있다.

'을'은 혼자가 아닌 우리'들'

갑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라는 큰 틀을 무슨 수로 개선하겠느냐는 회의에 잠식되기도 하지만 그리 비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11년도 제정된 도가니법과 지금 묵사발이 되어가고 있는 윤창중, 점차 확산되고 있는 '남양유업 불매운동'을 볼 때,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고충은 개인이 아닌 잠재적 '을'인 국민 전체의 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의 수보다 을의 수가 현저히 많은 사회인만큼 그들의 연대는 무한히 조직할 수 있다. 최근 거성 모바일 피해자들이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소송을 준비하는 것 또한 그의 한 형태이다. 알바들의 노조인 '알바연대' 역시 인권이라는 말이 사치였던 그들을 보호하고 사장님과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생겨났다. 알바연대의 회원인 '알바생'들은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피해받던 그들 스스로가 나선 당사자 운동이다.

이처럼 을의 태도 변화는 호칭의 변화만큼이나 중요하다. 갑의 횡포를 하루 하루 버틸 수는 있어도, 밝은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 그들의 억울함을 눈감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는 순간, 문제는 깊은 속에서 숨겨진 채 불어나게 된다.

미국에서는 성범죄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는 이에게 법적 책임을 지게 할 수도 있다. 윤창중 사건의 피해 여성이 곧바로 성추행 사실을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사회에 '피해자의 권리'가 그들의 인식에 자연스레 자리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을'들에겐 갑갑한 세상을 개선하려는 피해의식이 필요하다.


태그:#갑과 을, #윤창원, #남양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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