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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윤리'라는 이름 아래 배웠던 철학가들. 수능이 끝나자마자 잊고있던 그 이름을 뜻밖의 대학 강의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철학과 역사를 만나다

미학 수업에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미(美)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었고, 인간 이성을 되찾은 영웅적 철학자라고 생각했던 데카르트가 환경 수업에서는 '인간 중심적 환경 윤리'에 힘을 실은 부정적 인물로 나타났다.

철학이 이처럼 다양한 학문에 자연스레 등장했던 이유는 철학의 역사가 곧 시대의 역사를 함께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당대를 주름잡는 철학은 그 시대의 고민을 오롯이 안고있다. 따라서 미학의 기준에 대한 고민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정당한 시각에 대한 갖가지 고민들은 깊은 사유로 이어지고, 이는 곧 하나의 철학으로 귀결된 것이다.

철학은 파편처럼 흩어진 역사적 사실들을 의미있게 엮어 주는 날실이고, 역사는 허공에 떠도는 사변들을 현실로 풀어주는 씨실이다.

시대의 가장 큰 고민은 과연 무엇일까. 미(美)와 환경 역시 중요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고민보다 심각한 고민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내세웠던 이상적인 국가론은 이러한 고민 끝에 만들어진 정치관이다. 전쟁만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가르지 않는다. 전쟁 그 위에 군인을 위한 철학이 있었으며,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철학이 있었다. 결국 세계사와 철학은 결코 떼어놓고 볼 수 없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윤리'는 수능 출제 흐름을 따르느라 역사의 흐름과 만나기 어려웠고, 대학에 와서 배워보려했던 철학 강의는 지루하고 딱딱해 수강을 포기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책<철학, 역사를 만나다>는 여러가지 철학적 갈증을 해결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고대의 플라톤에서 시작해 현대의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마무리 되는 구성은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철학의 시대적 흐름을 간파할 수 있게 한다. 저자의 비유처럼, 허공에 떠돌던 철학자들의 이상 세계를 그 시대의 혼란을 풀기위한 현실적 방안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철학과 역사의 만남은 굳이 '만남'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 없이 이미 '한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을 덮을 때 쯤 <철학, 역사를 만나다>라는 제목은 '철학(과) 역사를 만나다'처럼 여겨진다.

철학, 역사와 함께 캐스팅되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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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다른 매체 또는 다른 학문 영역과 함께 엮어 이야기하는 책들은 이미 많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괴로움>은 말 그대로 철학적으로 시를 해석해 읽어낸 책이며,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회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풀어내 소개하는 책이다. 이 두가지 책은 시와 영화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며 동시에 철학을 조금 우리와 조금 가까운 매체(시 또는 영화)로 접할 수 있어 철학에 대한 거부감을 감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앞서 소개한 두 책과 비교한다면, 철학과 역사가 만난 이 책은 흥미적 요소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결합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만남으로써 따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더 가벼워진다. 역사만 배울 때 이해하기 어려웠던 전쟁의 계기나 시대상이 철학 사상으로 풀어주니 막히는 데 없이 읽히게 되고, 또한 철학만 공부할 때는 어렵기만 했던 사상들이 실제 시대를 예로 들어 설명하니 이해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하나 보조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균형있게 역사와 철학을 함께 소개해 두 분야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역사를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동등한 선에서 함께 이야기하므로 더 객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얻기에 좋은 책이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라는 제목은 철학과 역사를 꺼리는 이들에게 전혀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두 학문을 조금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데리고 수업하려 했던 저자의 센스가 묻어나오는 흥미로운 소제목과, 곳곳에 배치된 시각 자료들이 독자를 배려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고전 문학이 본격적인 재미를 전하는 중심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기나긴 서론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듯, 철학과 역사를 배워보고자하는 욕심만 조금 부린다면 이 책은 기꺼이 그들에게 '역사 속으로 떠나는 즐거운 철학 여행'을 선사할 것이다.

통치철학, 온고지신

한 개인의 철학이 곧 국가의 철학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국가 정신에는 '스토아 철학'이 있었다. 스토아 철학은 모든 일은 이미 우주의 섭리에 따라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 의지와 감정에 휩쓸리지않고 살아야한다는 정신을 주장한다. 이는 곧 주어진 몫에 최선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 정신'과도 어울리기 때문에 로마가 전쟁을 통해 국력을 키우기에 적절한 시대사상으로 작용했다. 한편, 유교의 대가인 공자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예를 설파했지만, 그래서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결국 공자는 권력자들이 자신을 포장하는 데 쓰였을 뿐, 실제 정치에 가담하거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처럼 철학이 시대를 움직이든, 권력자가 철학을 택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철학은 한 국가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던 철학은 시대에 따라 곪아 국가를 몰락하게 만들기도 한다. 형벌로 형벌을 없애는 강력한 법을 내세웠던 법가는 진나라를 중국 대륙 통일의 승리를 맛보기도 했지만, 결국 일방적인 독재 정치에 20년도 버티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걷게 했다. 하나의 철학이 곧 진리가 되는 법은 없으며, 아무리 이상적인 철학일지라도 실제 정치를 이끌 수 없는 것이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에서 저자는 하나의 철학이 가진 성과(正)와 한계(反)를 전달하며, 우리에게 또 다른 '합(合)'을 도출해내길 바라는 듯하다. 수많은 철학자가 깊은 고민 끝에 도출한 '이상 세계' 그리고 이를 실제 시험한 세계의 역사를 담은 이 책은 현 시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주자학의 시대처럼 정책 경쟁이 아닌 명분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아닌지, 십자군 전쟁처럼 같은 목표를 향해 가야할 집단을 '선vs.악'으로 나누어 소모전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앞선 역사를 디딤돌로 삼고 늘 경계하며 지켜봐야한다.

성년의 철학, 새로운 고민과 만나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호에 만족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서양 정신이 아버지 같은 신과 왕에게 기대어 안온함을 찾는 어린아이와 같았다면, 이후 서양사상은 국민 자신이 세상의 주인임을 인식하는 '성년(成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145p)

나는 여태껏 철학을 어떻게 배워왔던가. 그저 주입식 교육에 따라 암기하고 문제를 풀며 점수를 매겼던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 또는 다른 학문과 접목시켜 곁가지처럼 배웠던 강의, 내가 위로받기 위해 찾았던 철학 심리학 책. 철학은 꽤 오래도록 내 곁에 있었지만, 나는 철학을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 취했을 뿐 철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
<철학, 역사를 만나다>가 들려준 고민의 과거는 내가 서 있는 현재 시대를 고민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개인에 머물렀던 철학이 '성년의 철학'이 된 것이다. 무거워만 보였던 '철학'과 '역사'를 가볍게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책을 덮자, 나는 다시금 무거운 고민과 만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철학, 역사를 만나다> 안광복 지음/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 2005.12.20 / 페이지 수 205 /9800원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세계사에서 포착한 철학의 명장면

안광복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05)


태그:#철학, 역사를 만나다, #철학,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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