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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무장대와 토벌대가 무력충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제주4·3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큰 사건으로 꼽힌다.
 1948년 무장대와 토벌대가 무력충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제주4·3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큰 사건으로 꼽힌다.
ⓒ 4.3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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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춘~ (무사) 삼춘~ (무사게) 어디 감수꽈 (장에 감쪄)
아덜 메누리 손~지덜 온덴 허난~ 괴기 사레 장에 감수꽈~
(* 무사 : "왜?"라고 되묻는 제주 방언)


제주도에는 촌수를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삼춘(삼촌)'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 풍습이 있다. 제주 노래 <삼춘>의 제주삼춘은 뭍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온다는 소식에 고기를 사러 시장에 간다. 하지만 60년 만에 고향을 찾은 장기영(48·부산 동래구)씨 가족을 반기는 삼춘들은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영화 <지슬>을 촬영한 곳이자 4·3 당시 실제 주민들이 피신했던 선흘리 동굴.
 영화 <지슬>을 촬영한 곳이자 4·3 당시 실제 주민들이 피신했던 선흘리 동굴.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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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제주시 애월면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인 장씨는 4년 전 어머니를 여의면서 본인이 4·3 유족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마을에 제사가 있어 음복을 하거나 돈을 모아 돼지를 잡아먹는 '돗추렴'을 하느라 밤늦도록 불이 환했던 1948년 11월,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이 주민들을 몰살한 애월면 하가리의 후손이다.

"가족들 다 죽고 딸 하나만 겨우 챙겨서 동산으로 피신한 조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숨어 살면서 어머니께 항상 옷을 정갈히 하라고 말씀하셨대요. 사람이 죽으면 주변에서 염하고 수의를 입히지만, 우리한텐 그걸 해줄 삼춘 하나도 안 남았다면서. 어미가 딸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채비 잘하라는 말 아닙니까? 저희 어머닌 자식한테 한 말씀도 안 하시고 그 끔찍한 세월을 평생 안고 사셨으니…."

장씨가 아픈 가족사를 안 뒤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제주도에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온 것은 4·3을 소재로 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을 보고 나서다. 선댄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면서, 4·3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있는 <지슬>이 장씨의 슬픔을 덜어준 것이다.

영화는 '해안선 5km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소개령을 피해 동굴로 피신한 주민들과 토벌군 이야기를 다룬다. 3만의 4·3 희생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지슬>은 실제로 신위(神位 : 영혼을 모셔 앉히다), 신묘(神廟 : 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飮福 : 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눠 먹음), 소지(燒紙 : 신위를 태우며 염원함)의 위령제 순서에 따라 내용이 진행된다. 감독의 바람처럼 <지슬>이 '죽은 이를 위로하고, 아프게 사는 이들은 치유하는 씻김굿'이 될 수 있을까?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어우늘, 리생이, 드르구릉 등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가졌던 중산간지대 마을들이 4.3이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당시 마을을 지키던 팽나무와 표지석만 남아 있는 데가 많다.
 곤을동, 어우늘, 리생이, 드르구릉 등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가졌던 중산간지대 마을들이 4.3이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당시 마을을 지키던 팽나무와 표지석만 남아 있는 데가 많다.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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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우리는 65년 전 조천읍 선흘리 주민이 되는 겁니다. 어디 선흘리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순이 삼춘'도 좋고, 총도 피할 수 있을 만큼 달리기가 빠른 <지슬>의 몰다리(말다리) 상표도 좋고, 온통 돼지 걱정뿐이던 원식이 삼춘도 좋고, 찰진 욕을 내뱉던 용필이 삼춘도 좋습니다. 그해 11월 토벌대 공세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어간 주민들이 돼서, 진짜 제주를 느껴봅시다."

전날의 폭우는 그쳤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바다는 여전히 하얀 포말을 쏟아내던 지난 7일, 제주4·3도민연대 양동윤 대표가 이끄는 4·3역사순례에 예년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집안 어른들이 희생된 하가리 인근의 '육시우영' 밭을 차마 못보고 돌아온 장씨 가족과 요코하마에서 온 일본인 여행객들 그리고 <지슬>에서 '용필삼춘'으로 열연한 오멸 감독의 페르소나 배우 양정원씨도 함께했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곳에는 액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에, 누구도 다시 그곳에 살지 않는 풍습이 있는 제주도에는 4·3의 비극을 간직한 마을들이 곳곳에 있다.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된 뒤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고 버려진 중산간지대 마을은 2005년까지 조사된 것만 108곳. 마을 단위 중 큰 피해지로 손꼽히는 조천읍 선흘리는 제주 북동지역 함덕리에서 한라산 쪽으로 6~7km 올라간 곳에 있는 대표적인 '잃어버린 마을'이다.

제주방언으로 숲을 가리키는 '흘(仡)'이 지명에 들어갈 정도로 숲이 울창한 선흘리는 예로부터 땅이 비옥하고 땔나무가 풍부해 축산과 농업이 발달한 부촌이었다. 특히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지대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숲인 '곶자왈'에는 당시 선흘리 주민이 식수로 썼던 골연못이 남아 있어, 물 귀한 섬에서 큰 마을을 이뤘던 선흘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자연동굴과 아름드리 나무가 많은 곶자왈이 선흘리 주민들의 최후를 기억하는 장소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양동윤 대표는 "가을걷이한 곡식과 가축을 두고 갈 수 없었던 주민들이 며칠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곶자왈에 숨어 지내다 변고를 당했다"며 "군인들이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소개령에 따라 해안으로 이동한 일부 주민까지 고문하면서 자행된 강경진압작전 초기에 선흘리 주민들이 대부분 희생됐다"고 설명했다.

"숨어 지낸 지 나흘 만에 '반못굴', '목시물굴', '밴뱅디굴'이 줄줄이 발각돼 총살당했습니다. 주민이 가장 많이 숨어 있던 목시물굴의 한 생존자는 돌도 안 지난 딸이 자꾸 우니까 토벌대에게 들킬까봐 입을 틀어막았는데, 숨이 막혀 아이가 죽었다고 증언했습니다. 4·3평화기념관에 위패로 모신 희생자 207명 사연만 해도 이렇게 가슴 저미는데, 아직 저 깊은 곳에 묻힌 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불타는 섬, 질식한 역사

 입구가 봉쇄된 다랑쉬굴. 아래 사진은 1991년 다랑쉬굴이 처음 발견된 뒤 내부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입구가 봉쇄된 다랑쉬굴. 아래 사진은 1991년 다랑쉬굴이 처음 발견된 뒤 내부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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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개의 제주 오름 중 유일하게 분화구 셋이 함께 있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을 닮은 '용눈이오름'은 21년 전 시신 11구가 발견된 4·3 비극의 또 다른 현장 '다랑쉬굴'을 품고 있다. '용필삼춘' 양정원씨는 "영화 후반부 동굴 속에 무차별로 총을 쏘아대는 군인들을 내쫓기 위해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울 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기침을 토해내고 눈물범벅이 돼 고통스러웠다"면서 "촬영 내내 다랑쉬굴 희생자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 18일 구좌읍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있는 다랑쉬굴을 발견한 토벌대는 수류탄을 던져 밖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다. 굴 밖으로 나가도 죽기는 매한가지라고 여긴 주민들이 안에서 버티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고 입구를 봉쇄했다. 굴이 발각되기 전 다른 곳으로 이동해 목숨을 구한 채정옥(2003년 구술증언 당시 81세·남)씨는 "다음 날 소식을 듣고 달려간 다랑쉬굴 안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다랑쉬굴은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 4·3연구소 회원들이 1991년 12월 처음 발견했지만, 당시 엄중한 사회현실을 감안해 공개를 미루다 이듬해 4월 1일 세상에 알려졌다. 9살 남자아이를 포함해 희생자 전원이 무고한 주민으로 밝혀지자, 제주 4·3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이 사건을 축소할 목적으로 새벽에 인도한 유해를 45일 만에 화장하고 다랑쉬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봉쇄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콘크리트가 제거됐지만, 여전히 굴 입구는 토석으로 막혀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굴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항아리나 가마솥, 질그릇 같은 생활용품이거나 낫, 곡괭이 같은 연장들이어서, 피난민 생활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들인데 당국에선 이것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입구를 막았습니다."

제주4·3연구소 김창후 소장은 "별다른 사후관리조처도 없이 버려지다시피 한 다랑쉬굴의 현재 모습이 제주4·3을 평가절하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며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 사이에서 주민들이 대량 학살당한 '제노사이드'가 4·3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에 참여한 대학원생 서윤지(28·서울 신월동)씨도 "4·3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참극의 역사인데 관련 유적지가 이 정도로 허술한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번도 고발된 적 없는 죄
 
 목시물굴의 또다른 입구는 엉성한 철근으로 막혀 있을 뿐,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다.
 목시물굴의 또다른 입구는 엉성한 철근으로 막혀 있을 뿐,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다.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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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은 작은 안내판을 보지 못하면 주변 잡초지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노천 한가운데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있다. 선흘곶자왈의 동굴들도 상황은 비슷한데, 반못굴은 이미 당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주변이 허물어져 표지석만 대략적인 위치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또 목시물굴은 주변에 개인 농장이 생기면서 양봉장 진입로를 이용해야 접근할 수 있다. 목시물굴 양쪽 입구가 농장과 양봉장 허드레공간과 연결된 만큼, 농장주의 일상생활 범위 안에 있는 동굴이 유실될 위험이 높다.

4·3도민연대 양동윤 대표는 "주민들이 인근 밭에서 학살되거나 집 근처 숲과 동굴로 몸을 피신했기 때문에, 4·3유적지 대부분이 현재 제주 전반의 일상적인 공간이자 사유지"라며 "대부분 개인 소유자들이 알아서 주의하지만, 4·3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공간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건 국가의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4·3은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4·3은 여태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했을 만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일생을 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제주도민 윤관영(33·일도2동)씨는 "어떤 사연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백비(白碑)라고 하는데 4·3은 아직까지 이름조차 못 지은 백비 같은 역사"라고 말했다. 진혼곡을 대신하는 <지슬>의 엔딩곡 <이어도사나>나 <맨도롱 또똣해사 살아집주(세상살이도 봄같이 따뜻해야 살아진다)> 등 용필삼춘의 제주노래가 울려 퍼지자 오름을 뒤덮은 풀들도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맨도롱 또똣해사 살아집주"

 표시된 부분이 각각 다랑쉬굴과 목시물굴. 4.3유적지는 표지석만 있을 뿐 별다른 보존장치 없이 노천에 그대로 방치돼 있어 유실 위험이 높다.
 표시된 부분이 각각 다랑쉬굴과 목시물굴. 4.3유적지는 표지석만 있을 뿐 별다른 보존장치 없이 노천에 그대로 방치돼 있어 유실 위험이 높다.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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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중략)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중략)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 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만 갇힌 채 한 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1978년 발표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 30년을 참회하는 이 대목에서, 4·3 65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4.3평화기념관에 남겨진 추모글들.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65년이 지난 현재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4.3평화기념관에 남겨진 추모글들.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65년이 지난 현재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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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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