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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님께 대체로 고분고분한 편이다. 어렸을 때는 농부이셨던 부모님을 따라 논틀바틀 다니며 잔일을 도와드릴 때가 많았다. 중고등학교 다니면서도 크게 부모님 속을 썩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성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나름대로 '범생이'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지금도 동네 어른들은 나를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체로'였다. 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철저하게 내 멋대로 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국물도 없는'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실망과 걱정의 눈빛을 내보이던 아버지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우리 집안 형편은 매우 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장학금이든 아르바이트든 뭐든지 열심히 해서 마쳐보겠노라며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공부를 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부모님께서는 내가 어디 조그만 직장이라도 어서 빨리 들어가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공부가 좋았다. 직장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 지시나 명령을 따르며 사는 게 체질에 맞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공부를 더 하겠노라며 당당하게 말씀드렸다. 실망을 넘어 좌절(?)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당신들은 나를 더는 어쩌지 못하셨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대체로 순종적인 자식들을 더 귀애한다. 누가 그러지 않겠는가. 부모인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서 기분까지 맞춰주는 자식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자식들도 그런 '메커니즘'을 알기에 좀더 풍요로운 생존 전략(?) 차원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반항하고 사고를 쳐야 한다

<욕망해도 괜찮아> 겉그림
 <욕망해도 괜찮아> 겉그림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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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 끝까지 자신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점. 부모가 자신들의 욕망을 순종적인 자식에게 투사하고 싶은 마음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도 서울대에 가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너는 할 수 있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너에게 무슨 지원이든 아끼지 않겠다."(50쪽)

다행히도 그 자식이 뼛속까지 '순종적'이다. 그래서 죽자사자 열심히 공부한다. 마침내 자식은 서울대('서울대' 대신에 부모가 원하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해도 된다)에 합격한다. 졸업하기 전에 벌써 고시에 합격하여 중앙정부 부처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걷는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부모에게 맞춘 결과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다. 가끔 행복이란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결혼도, 부모님의 뜻에 따라 중매를 통해 '양갓집 규수'를 얻는다.

그런데 결혼 이후부터 문제가 생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엄마 말에만 순종하던 아들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천하에 없던 착한 내 아들이 여우 같은 년을 만나서 괴물이 돼버렸"(296쪽)기 때문이다. 아들은 나름대로 중립을 취하지만 그 때문에 두 여자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반항'과 '사고'를 주문한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반항하고 사고도 치면서 '개겨보라'는 것이다. 좀 억지스러운가. 하지만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불효자 노릇을 한 뒤에라야 "천하의 불효자식이 장가들더니 사람 됐네"(296쪽)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속된 말로 아버지한테 개긴 놈은 살아남고 순종적인 애는 무너지는 거지요. 그만큼 독립된 개인으로 서는 게 중요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부모님이 당장은 서운해하시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그런 독립된 자세가 옳습니다. 그런 독립은 빠를수록 좋고, 부모님의 섭섭함도 빨리 지나갈수록 서로에게 좋습니다.(297쪽)

아버지(부모)에게 '개긴다'는 것은 권위와 규율과 규범, 곧 '계(戒)'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욕망에 충실함을 의미한다. '색(色)'에 솔직한 것 말이다. <욕망해도 괜찮아>의 저자인 김두식 교수가 시종일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규범은 절대적이지 않다

저자에 따르면, 규범은 '수단'일 뿐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 규범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저자는 이를,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그린 독일 영화 <몰락>(Der Untergang, 2004)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최후의 히틀러가 숨어든 베를린의 벙커 주변은 이미 소련군의 탱크와 포성으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몰락 일보 직전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철저한 규율과 군기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들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독일의 '심장부'가 아수라장 속에서 무너지고 있을 때, 독일의 법을 지키겠다며 나선 '계'의 수호자들이 있었다. 판사, 정당대표, 국방부 장교나 무장 친위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특별재판부'로 명명된 '인간 사냥꾼'들이 바로 그들이다. 독일 역사가인 요아힘 페스터는 전쟁 막바지의 3개월 간 거의 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이들 손에 처형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총통에 대한 맹세를 지키겠다고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쓰러져 간 이들도 가장 규범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이 아노미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계'에 속한 그들의 아노미적 자살을 보면서 저는 몇 번이나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야, 그 맹세, 규범 다 쥐뿔도 아니야. 네가 사는 게 중요해. 그냥 총 버리고 도망쳐!" (중략) 마지막 순간까지 엉터리 사법시스템에 충성하는 사냥꾼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출전도 찾을 수 없는 "악법도 법"이라거나 "나쁜 법도 무법보다는 낫다"는 말들은 오랜 세월 이런 믿음을 대변해왔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그런 믿음을 갖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규범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싸이코패스 못지 않게 위험합니다. (247쪽)

규범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주변사람들에게 친아버지처럼 친절하다가도 10분 후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서류에 서명할 수 있는"(240쪽) 인간이 만들어낸 허술어낸 제도일 뿐이다.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특별한'(?) 악인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 진부함"(240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만든 그 "수많은 악마적 시스템의 가면을 벗겨낼 수 없"(241쪽)다. 저자가 강조하는 규범에 대한 의심도 이런 전제 위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지랄'을 억제해라?

저자 김두식 교수는 인권 문제를 다룬 전작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2010)에서 '지랄(에너지-기자 주) 총량의 법칙'이라는 재미 있는 용어를 사용해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이 책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쓴다.

(ㄱ) 우리는 성장하면서 '지랄'을 떨어야 한다. 곧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분출하면서 에너지를 써야 한다.
(ㄴ) 그렇지 않으면, 이 '지랄 총량의 법칙'에 따라 '훌륭한 어른'이 된 후에 (성장기에 떨지
않은) '지랄'을 떨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른바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예의 '지랄'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4당 5락'(4시간 자면 대입에서 성공하고, 5시간 자면 실패한다는 '야만적인' 속어)과 같은 말을 내뱉는 교사와 학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겉으로는 멀쩡한 '훌륭한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지랄'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40~50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지분거리고, 돈과 권력에서 자신들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찾는 행태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결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고3을 맡은 올해는 이런 말을 일부러 더 자주 한다. 몸이 힘들면 야자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쉬고,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친구와 함께 영화도 한 편 보라고 이야기한다. 교실에 앉아 있는 게 능사가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욕망이 억눌린 상태임에랴.

갖은 '똥폼'을 다 잡으면서 자신은 성인군자인 것처럼 근엄한 태도를 보이며 살아가는 이들이 다른 이들을 자기 멋대로 더 쉽게 비난하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자신이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43쪽)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한결 따뜻해"진다. 그 누구보다도 도덕과 절제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특히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저자의 메시지다. 도대체 진보주의자가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 창비 | 2012.03 | 13,500원)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창비(2012)


태그:#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색계, #규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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