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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전에 나와 같이 다녔던 수화통역사를 만났다. 그때는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다. 지금도 우리는 만나면 서로의 목에다 손을 대고 어! 어! 하는 제스처를 하며 웃는다. 기계공포증이 있는 나는 불혹이 다 되어 운전면허를 땄지만, 주행연수도 주차방법도 전혀 배우지 않은 채로 운전대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그 시점에 우연히 대학 사회교육원에서 시행하던 내 서예강좌에 들어온 젊은 여성장애인이 비문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여성장애운동을 시작했다. 사무실이 없어 서예실을 다울교육센터의 교육장으로 사용하면서 비영리시민단체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법인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국비와 지자체에 예산을 지원 받는 부설기관도 몇 개 생기고 관용차량과 사무실에 컴퓨터도 수십 대가 있지만 시작할 때는 내가 쓰는 개인 컴퓨터가 바로 사무컴퓨터였고 내 애마가 바로 사무실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공용차량이었다.

애마가 생기는데 도움을 주었던 언니와 오빠들은 이구동성으로 "차라리 옆 사람을 빌려줄지언정 차량은 빌려주는 게 아니다"라고 충고했지만 내게는 애마가 단순한 내가 소유하는 물질이 아니라 매일 얼굴을 보며 한 사무실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끼리 나누어야 하는 소중한 그 무엇이었다.

순식간에 발생한 사고... 다행히 많이 안 다쳤다

사무실에 손님만 오면 뒷문으로 도망을 가서 꽃사슴이라고 별명을 얻은 총무겸 간사가 초보운전을 하다가 골목길에서 간격을 조절하지 못해 트럭과 접촉하여 앞문에서 뒷 범퍼까지 옆으로 길게 흉터가 났다. 수리비가 200만 원 가량 나와 보험처리를 했다.

그 뒤로 꽃사슴간사는 한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고 내게 무척 미안해했다. 그러나 나는 꽃사슴에게 액땜을 크게 했으니 앞으로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우리 단체에서는 중증여성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 꽃사슴은 다시 운전을 해야만 했고, 꽃사슴이란 별명은 나중에 철사슴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서로 바빠 못 만나지만, 이제는 지역 상담소장으로 일하며 베테랑 운전자가 됐다. 아픈 부모님이나 위험에 빠진 여성들을 태우고 종횡무진 전국을 누빈다.

어느 날 나는 수화통역사와 서울에 출장을 가야할 일이 생겼다. 복잡한 서울시내를 운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조치원까지만 살살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한 손님이 와서 처리하다 보니 기차시간이 빠듯했다. 마음이 바빠서 그랬기도 하고 원래 내가 이리 저리 잘 넘어지기도 하는 등 덜렁거려서 그랬는지 출발하자마자 사고가 났다.

차를 주차장에서 빼내기 위해 기어를 주행으로 바꿔놔야 했는데, 후진으로 해놓고 엑셀러레이터를 밟아버린 것이다. 차는 순식간에 큰 소리를 내며 주차장 뒤 초록색 철조망과 간이 담벼락을 넘어뜨리고 3m 가량의 아랫집 마당으로 떨어졌다. 내 옆의 수화통역사는 뒷좌석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고 나는 운전대와 거울에 이마를 부딪쳐서 피가 났다. 아랫집에서 아침 식사 후 누워서 쉬던 팔순의 할머니가 깜짝 놀라서 나왔고, 골목길의 문방구 아줌마와 분식집 아저씨도 뛰쳐나왔다.

차량은 비탈진 언덕 아래로 굉음을 내며 떨어졌는데도 뒤집히지 않고 그냥 반듯하게 뒷집  잔디마당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기적같다고 말했고 놀란 할머니는 "아이고! 내가 늙었길래 망정이지 얼매 놀랐는지 내 뱃속에 애가 있었으면 떨어졌을꺼여! 큰일났을꺼여! 그런데 야들이 많이 안 다친 게 신기해여..."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평소 차량이 운행중에 정지하거나 무슨 탈이 나면 한밤중에도 달려오던 잘 아는 정비소 사장님이 있었다. 그분께 연락을 했다. 사장님은 오자 마자 우리를 약국으로 데려가 청심환부터 사주셨다. 그리고 차는 뒷범퍼와 전조등과 운전대 거울 외에는 크게 상한 게 없으니 우선 우리보고 출장은 취소하고 병원부터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새 차인데 차가 참 불쌍하구먼..."하고 혀를 차셨다.

그러나 수화통역사와 나는 정비소 사장님이 주시는 청심환을 먹고 택시를 타고 조치원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수화통역사보고 그냥 병원에 가라고 나 혼자 다녀온다고 했는데 통역사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냥 나를 따랐다. 서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야만 한다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서울에서 워크숍을 소화하고 밤에 숙소에서 잘 때 둘이다 끙끙거렸다. 사람들이 사준 쌍화탕과 진통제를 먹고 견뎌야 했다. 서울의 일정을 소화하고 청주로 내려 오자 마자 우리는 정형외과에 갔고 여기 저기 엑스레이를 찍고 둘이 다 목에 깁스를 했다. 깁스를 푼 뒤에도 목과 허리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지금도 우리는 만나면 그때 일을 생각하면 웃는다. "우리가 그때 미쳤나봐... 어떻게 우리가 서울로 출장을 그대로 갔을까?" 아마도 난 크게 안 다친 것에 감사했고 그래서 할 일은 꼭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던 것 같다. 수화통역사도 나와 함께 다닌 지 10년이나 됐기 때문에, 내 의사를 존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때의 나의 애마는 나만의 애마가 아니라 이 땅에 필요한 좋은 단체를 만들기 위해 황무지를 일구듯 뛰어다니던 우리를 지켜주며 힘을 줬던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애마이야기 기사 응모



태그:#청각장애운전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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