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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학교를 졸업한 A는 취업과정에서 면접용 정장 때문에 곤혹스러워했다. 한 기업의 공개채용 서류과정에 합격했는데, 면접에 입고 갈 정장이 없었다. A는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를 다녔다. 4년 넘도록 고시원을 전전했다. 졸업은 했지만, 여전히 고시원에서 아르바이트로 버티며 취업을 준비 중이다. 그런 A에게 정장 값 수십만 원은 부담스러웠다. 이제야 등록금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지신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기도 마땅찮다.

"누가 나 정장 좀 빌려주지 않을래?"

결국 A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직 졸업을 못한 사람이 태반인데, 친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정장을 가진 이가 드물었다. 한 친구가 경조사용으로 입는 새까만 정장을 빌려줬다.

그것도 서로 체형이 달라, 입어보니 모양새가 어색했다. 좀 더 깔끔한 모습으로 면접장에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면접 날 아침, 친구들은 A를 배웅하며 그 모양새를 보고 낄낄거렸다. 하지만 전철역 개찰구를 지나는 A의 뒷모습에는 모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열린 옷장(Open Closet)'에 대해 들었을 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싶었다. 열린 옷장은 정장을 기부 받아, 청년구직자와 공유하는 비영리 민간단체다.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열린 옷장 사무실이나 누리집(http://theopencloset.net/)을 방문하면, 2만 원에 일주일 동안 정장을 빌려 입을 수 있다.

꼭 면접용이 아니더라도, 특별한 행사를 앞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정장을 빌려준다. 지난 3월 27일, 열린 옷장 사무실에서 한만일 공동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평범한 직장인 세 명이 만들어낸 '공유'의 가치

열린 옷장은 정장을 기부 받아, 청년구직자와 공유하는 비영리 민간단체다. 지난 3월 27일, 열린 옷장 사무실에서 한만일 공동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열린 옷장은 정장을 기부 받아, 청년구직자와 공유하는 비영리 민간단체다. 지난 3월 27일, 열린 옷장 사무실에서 한만일 공동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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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세 명의 열린 옷장 공동대표) 우리 모두 '무언가 스스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희망제작소를 찾았더라고요. 직장인의 무료한 일상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죠."

열린 옷장은 평범한 직장인 세 명이 뭉쳐서 만들었다. 열린 옷장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한만일(33)씨, 김소령(43)씨, 박금례(34)씨가 그들. 열린옷장에서 일하기 전에 각자 프랜차이즈 영업기획, 카피라이터, 휴대폰 개발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인연을 맺은 것은 2011년 희망제작소의 'SDS(Social Designer School, 소셜 디자이너 스쿨)'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처음에는 세 명이 직장인 밴드처럼 주말에 만나 '뭘 만들어볼까?' 고민을 했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싶지만, 마땅한 게 없더라고요. 그러다 옷장에서 잠자는 면접용 정장들에 생각이 닿았어요. 옷을 재활용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공유'한다면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질 거라고 여겼죠."

지난해 7월, 열린 옷장은 누리집을 열며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뗐다. 처음에는 세 명의 공동대표가 일주일에 이틀씩 번갈아가면서 일을 맡았다. 지금은 한만일, 김소령 대표가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금례 대표도 틈날 때마다, 열린 옷장의 업무를 돕는다.

열린 옷장은 20벌의 정장으로 시작했다. 공동대표의 지인들이 십시일반 입지 않은 정장을 기부했다. 대여자는 일주일에 2~3명 정도였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보유 정장만 600벌이 됐다. 대여자도 하루 2~3명으로 예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청년구직자에게 1만 원이면 정장을 대여해준다'며, 여러 매체에 소개된 덕분이다. 공동대표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많은 직장인들도 청년구직자를 위해 선뜻 정장을 내놓았다. 열린 옷장의 취지에 공감한 몇몇 연예인들도 동참했다. 계속 '재능기부' 형식의 도움도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인수네 세탁소'는 무료로 '열린 옷장'의 정장을 관리해준다. 기부 받은 정장 중 오래된 디자인을 요즘 트렌드에 맞게 수선해주는 디자이너도 있다.

또 한 이미지컨설턴트는 열린 옷장 사무실을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대여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정장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컴퓨터나 프린터를 지원해준 곳을 비롯하여, 기부자에게 스킨케어 상품 등을 증정하겠다는 업체도 나타났다.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인수네 세탁소'. 이곳은 열린 옷장의 취지에 공감, 무료로 정장을 관리해주는 '재능기부'를 해주고 있다. 왼쪽부터 세탁소를 운영하는 배동석씨 부부, 한만일 열린 옷장 공동대표, 김소령 열린 옷장 공동대표.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인수네 세탁소'. 이곳은 열린 옷장의 취지에 공감, 무료로 정장을 관리해주는 '재능기부'를 해주고 있다. 왼쪽부터 세탁소를 운영하는 배동석씨 부부, 한만일 열린 옷장 공동대표, 김소령 열린 옷장 공동대표.
ⓒ 열린 옷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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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1만 원에 정장을 대여해드렸어요. 운영비를 충당하기엔 솔직히 부족했죠. 좀 더 많은 정장을 기부 받아서 보관·관리하려면 대여료를 올릴 필요가 있었어요."

올 3월부터 정장 대여료를 1만 원에서 2만 원으로 올렸다. 열린 옷장의 토대를 단단히 하고, 더 많은 정장의 대여를 위해서다. 그래도 기존의 정장 대여업체들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값이다.

정장 대여비 1만 원으로는 대여자와 정장을 주고받는 택배비도 안 됐다. 대여료를 2만 원으로 올린 요즘도 운영비를 제하면 사실 남는 건 없다(그나마 무료로 장소를 대여해 준 주변의 도움으로 월세는 면하고 있다). 한만일 공동대표는 "열린 옷장이 발전 동력을 얻으려면, 대여횟수가 많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4월 초까지 누리집 정돈과 더불어 기부 받은 정장 목록을 전산화시킬 예정이다. 무엇보다 대여자가 정장 사이즈를 쉽게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정장마다, 사이즈, 기부자, 대여자 등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열린 옷장은 4월초까지 기부 받은 정장 목록을 전산화시킬 예정이다. 무엇보다 대여자가 정장 사이즈를 쉽게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열린 옷장은 4월초까지 기부 받은 정장 목록을 전산화시킬 예정이다. 무엇보다 대여자가 정장 사이즈를 쉽게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 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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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으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단순히 정장을 빌려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진출해 있는 기부자와 청년구직자인 대여자 사이에 따뜻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한만일 공동대표는 열린 옷장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열린 옷장은 공유하는 정장에 '이야기'를 담는다. 처음 기부자가 열린 옷장에 정장을 보낼 때, 간단한 개인정보와 사연을 덧붙일 수 있다. 대여자도 정장을 되돌려주며, 소감을 적어 보낸다. 서로가 원한다면, 기부자와 대여자가 서로 소통하는 일도 가능하다.

열린 옷장이 만들어진 취지처럼, 정장이 연결고리가 되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 직장인 기부자들이 청년구직자들을 응원하고, 실질적인 조언을 줄 수 있는 '멘토'가 되도록 말이다. 이를테면 광고인을 꿈꾸는 청년구직자를 광고업계서 일하고 있는 기부자와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어떤 대여자들은 덕분에 합격했다며 합격증을 보내주기도 했어요. 그럴 때가 가장 뿌듯하죠. 직장인이 된 대여자가 기부자로 바뀐 경우도 있어요. 고맙다며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오는 대여자도 있고요."

열린 옷장은 이렇게 쌓여나간 이야기가 단순한 옷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리라 믿는다. 한만일 공동대표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유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사람과 사람이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대여자들이 열린 옷장과 기부자들에게 보낸 편지.
 대여자들이 열린 옷장과 기부자들에게 보낸 편지.
ⓒ 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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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자가 열린 옷장과 대여자에게 보낸 편지. 열린 옷장과 청년구직자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가 적혀있다.
 기부자가 열린 옷장과 대여자에게 보낸 편지. 열린 옷장과 청년구직자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가 적혀있다.
ⓒ 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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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옷장', '기업 옷장'도 만들어 나갈 계획

열린 옷장은 3월 서울시가 추진한 '비영리 민간단체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이들은 '서울시 옷장'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4월부터 12월까지, '열린 옷장'은 옷장정리 컨설턴트와 서울시내 60~70여 가구를 직접 방문할 예정이다.

각 가정은 필요한 옷과 불필요한 옷을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서, '열린 옷장'은 가구의 불필요한 옷들을 기부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1석 2조다. 그렇게 기부받은 옷으로 '서울시 옷장'을 꾸미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기업들과 함께 '기업 옷장' 프로젝트도 진행중이다. '공익재단법인 동천'의 직원 등 800여 명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정장을 판매하는 업체들의 지원도 있다.

한만일 공동대표는 "아무래도 업체들이 신상품을 보내주면, 대여자들의 트렌드 수요를 더 만족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열린 옷장이 값싸게 대여해주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까 염려하는 업체가 많았다. 하지만 대여자들이 일자리를 얻은 뒤, 업체에 감사편지 등을 보내면서 반응이 크게 달라졌다.

한만일 공동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대여자들이 해당 업체에 대한 좋은 입소문을 내주기도 한다"며 "지금은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꼭 품질이 좋은 정장이 아니어도 좋아요. 오래 되었더라도 재능기부자들의 수선을 통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열린 옷장에 가장 필요한 건, 더 많은 정장들을 기부 받는 일이에요."

열린 옷장은 더 많은 청년구직자들 위해, 항상 기부자들을 기다린다. 정장을 기부하고 싶다면, 열린 옷장 누리집을 통해 연락처와 주소를 남기면 된다. 정장 이외에도 가방이나, 스카프, 넥타이, 구두 등 면접에 필요한 물품이라면 기부가 가능하다.

대여를 원한다면, 열린 옷장 사무실을 찾으면 된다. 누리집을 방문, 사이즈나 디자인 등을 선택하고 택배로 받아볼 수도 있다.

열린 옷장 사무실에 찾아온 대여자가 남긴 메시지. 열린 옷장은 이렇게 쌓여나간 이야기가 정장에 단순한 옷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리라 믿는다.
 열린 옷장 사무실에 찾아온 대여자가 남긴 메시지. 열린 옷장은 이렇게 쌓여나간 이야기가 정장에 단순한 옷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리라 믿는다.
ⓒ 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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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열린 옷장, #공유경제, #비영리 민간단체, #면접용 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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