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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을 결정지은 요소 중 하나는 '장년세대의 불안'이었다. '하우스 푸어'에 은퇴를 앞둔 또는 은퇴한 장년세대의 불안감이 그나마 불안감이 덜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다. 우리 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희망이 아닌 불안이다.

비단 장년세대만 불안한 것도 아니다. 취업을 앞둔 젊은이도 실적 경쟁에 내몰리는 직장인도 불안하긴 다들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다들 불안할까. 어떻게 하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희망이 아닌 불안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은 이에 대해 흥미롭고 깊은 통찰을 준다. 근대 서양의 역사를 살피며 불안이 삶을 지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먼저 알랭은 불안의 원인을 정의한다. 우리의 불안은 사랑받지 또는 존중받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서 온다고 한다.

아기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존재하는 것만으로 애정을 받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회에서의 성취는 지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랑받고 존중받기 위해 높은 지위에 대한 갈망이 생기지만, 높은 지위는 얻기도 어려우며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기에 불안이 생긴다. 즉, 사회에서 제시하는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면 존엄을 잃고 존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지배한다(<불안> 8쪽) .

권력과 지위가 없으면 불안한 속물의 사회

<불안> 표지
 <불안> 표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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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가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사실은 이러한 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은 관례에서 나왔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정반대의 의미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됐다.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1892년 <펀치>에 실린 만화는 속물의 세계를 잘 보여 준다. "스파이서 월콕스 집안사람들이 가네요. 엄마!" 봄날 아침 하이드파크를 걷던 딸은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어머니가 대답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불안> 36쪽)

"임대 아파트 단지 애들하고는 놀지 말라"는 우리의 풍경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아래에는 두려움이 있다.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인간으로서 대접을 못 받는다는 두려움이 속물근성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신문 또는 미디어가 불안을 더욱 심화시킨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기에 언론의 분위기가 그들의 사고를 결정한다.

그래서 책에는 영국인이 높은 지위와 귀족 계급에 매달리는 원인이 궁극적으로 신문에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신문은 매일 작위가 있는 사람과 유명한 사람이 존엄한 존재라고 역설하며, '상류사회' 사람들의 파티·휴가·생일 등 시시콜콜한 기사를 양산한다. 신문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더 초점을 맞춰준다면 지위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 것이라며, 당시에 개탄하는 의견도 전한다. 우리의 미디어 환경도 결코 이보다 덜하지 않다는데서 우리의 불안감도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정치적으로 예술과 철학을 하라!

그러면 불안에서 벗어날 해법은 없을까? 알랭 드 보통은 해법으로서 '정치적 변화'를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이데올로기 분석이다. 우리를 불안케 하는 능력주의와 지위 그리고 가난에 대한 관점이 근대에 형성되고 강조된 이데올로기임을 이해하는 정치적 관점을 말한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라는 정식처럼 이데올로기가 결코 진리도 자연스럽지도 않음을 분석하고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다고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이해는 사회의 관념과 씨름해보는 첫 단계다. 그것만으로도 무조건 선망과 피해의식, 수동적인 우울함에서 벗어나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하는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예술과 철학을 활용하자는 것이 알랭의 제안이다. 예술과 철학은 지배적인 사회 통념이 허구일 수 있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게 만든다고 한다.

19·20세기의 거의 모든 위대한 소설에서 우리는 표준적인 사회적 위계에 대한 공격 또는 회의 그리고 경제적 자산이나 혈통보다는 도덕적 가치에 따른 순위 재배치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서 우리의 공감이 이끌리는 사람은 호화로운 집에 사는 마담 드 뉘싱겐이 아니라 더러운 하숙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빨 빠진 고리오 영감이다(<불안> 183쪽).

사상가 몽테뉴는 우연이 능력 보다 앞서서 한참 앞서서 행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며, 성공이 오로지 개인 능력의 산물만은 아님을 말했다.

책에는 이처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예술과 철학의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고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면, 이것도 예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과 철학이 이렇게 가깝고도 필요한 것인데, 잊고 지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그 잊은 자리에 우리는 불안을 달래줄 대중 매체의 달콤한 오락거리들로 채워왔다. 신데렐라 꿈을 대리 만족하면서 달콤했지만, 돌아온 현실엔 불안이 기다린다. 불안함은 또다시 달콤함을 찾게 하는 순환을 만들어 왔다. <불안>은 새삼 예술에 대한 욕구를 일깨워준다.

18대 대선에서 바랐던 안정, 차기정부가 이뤄줄까

<불안>을 읽고 나면 우리가 불안한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근대 능력주의가 불안을 낳은 것이라면, 우리는 경쟁과 탈락의 위험이 더욱 심화된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7대 대선의 '부자 되고 싶은 욕망'이 배반당했듯이, 18대 대선의 '안정을 바라는 욕망'도 배반당할 가능성이 크다. 보수 정권이 불안을 낳는 사회구조의 변혁을 꾀하리라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적 권력층이 보인 속물성을 생각해도 그렇다.

보수정권에 배반당하기보다는, 알랭이 권하는 정치적인 예술과 철학을 해보는 것이 불안을 치유하는데 더 나아 보인다. 여기에 더해 알랭이 권하는 공공성을 주목해 보자.

알랭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지기 때문이라 말한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떨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불안> 330쪽).

도시의 공적인 공간이나 시설이 그 자체로 훌륭할 때에도 개인적 영광에 대한 야심은 어느  정도 줄어든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불안> 333쪽).

서울시 누리집에 가면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공유도시' '마을공동체' 사업을 알리는 홍보물을 볼 수 있다.
 서울시 누리집에 가면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공유도시' '마을공동체' 사업을 알리는 홍보물을 볼 수 있다.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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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마을공동체'나 '공유도시'라는 개념 아래 서울시에서 행하는 노력들은 매우 의미 있어 보인다. 불안한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의 실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공공의 영역을 늘리는 것, 알랭 드 보통이 권하는 이런 불안 해법들. 숙고할 만하지 않은가. <불안>에는 이밖에도 불안한 시대에 숙고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덧붙이는 글 | <불안> (알랭 드 보통 씀 |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12. | 1만4000원)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은행나무(2011)


태그:#불안, #알랭 드 보통, #18대 대선, #공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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