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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레 미제라블> 포스터. 빅토르 위고 원작의 이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듯 '비참한 사람들' 또는 '극빈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레 미제라블> 포스터. 빅토르 위고 원작의 이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듯 '비참한 사람들' 또는 '극빈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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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을 위한 일인데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리케이드를 쌓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의자에 책상이며, 심지어 아끼는 피아노까지 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압군이 밤처럼 다가오자, 사람들은 피 흘리며 절규하는 학생들에게 팔 하나 숨길 문틈조차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들을 구하겠다'며 나선 청년들은 총탄을 비처럼 맞으며 쓰러져 갔고, 변화를 꿈꾸던 젊은이들의 '철없는 반란'은 이렇게 간단히 진압되었다. 아니,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다. 1832년, 파리.

<레 미제라블>이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관객 수를 늘려가고 있다. 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 명을 돌파해 관객수와 예매율 모두에서 1위를 차지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 영화가 '대선 후유증'을 달래는 '치유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한다.

대선결과, 그 충격적인 '미스터리'

이해할 만하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던 젊은 세대는 <레 미제라블>의 시민군 이상으로 절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왜 변화를 원했는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20대 사망원인 1위도 자살이며, 30대 사망원인 1위 또한 자살이다.

이들이 40대가 되면 달라질까? 물론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암 사망률이 자살률을 2위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돌연사 비율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세계 최장 노동으로 인한 과로와 허술한 의료복지가 결합한 결과가 아닐까. 2012년 5월 영국 BBC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인은 한 해 평균 2193시간을 일한다. 2위인 칠레보다 무려 125시간을 더 일한다. '비공식 업무시간'을 뺀 통계가 이렇다.

이 젊은 유권자들이 당선자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절망과 과로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꿈꾸는 게 놀라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맞닥뜨린 대선결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선거 전만 해도 온 사회가 젊은 세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싸워줄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사회 분위기가 얼마나 심상찮았으면, 보수정당 후보가 '반값 등록금,' '선행학습금지,' '4대 질환 전액 국가부담' 같은 공약을 내세웠겠는가.

2012년, 한국. 변화를 꿈꾸던 청년들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 것일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레 미제라블>의 선풍적 인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좌절한 세대가 영화를 통해 실패한 꿈을 되새김질할 뿐이라면, '힐링'보다는 '자학' (혹은 '헬링')에 가깝지 않을까?

장발장은 실수, 용서, 화해, 연민 등 인간적 가치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장발장은 실수, 용서, 화해, 연민 등 인간적 가치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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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은 시대와 문화적 차이를 넘어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낸다. 19세기 프랑스 민중이나 21세기 한국 민중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는 작품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남자들이 무지와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여자들이 빵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아야 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깨우고 마음을 덥힐 책조차 구할 수 없는 곳"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국 관객에게 결코 '먼 나라의 옛 이야기'일 수 없는 것이다. 반도체 회사에서 수십 명이 암에 걸리고, 자동차 회사 부당해고로 수십 명이 자살하고, 이 추운 겨울에 고압 송전탑 위에서 수십 일째 목숨을 건 시위를 한다. 대선 이후만도 5명의 노동자가 자살과 돌연사로 목숨을 잃었다.

일터의 노동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정서, 신체, 성적으로 학대 받는 아동의 수는 지난 10년간 두 배 이상 늘었다. 40만 명이 넘는 초등학생은 방학 때마다 점심을 굶는다. 매년 6만 명의 초중고생이 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거나 가정문제로 학교를 떠난다. 전국 거리를 헤매는 가출청소년은 20만 명이 넘고, 이들 4명중 1 명이 잘 곳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매매춘을 한다.

입시지옥을 뚫고 대학에 가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들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휴학 상태다. 나머지 학생들 다수도 편의점에서 술집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학생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성 평등 수준은 세계 최하위권(135개국 중 117위)으로, 그 결과 성매매 여성 비율이 유럽의 7배에 달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절반은 한 해에 1000만원을 벌지 못하는 빈곤층으로 전락했다(이들 절대다수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

이게 세계 경제력 10위권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는 손을 놓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차라리 낫겠는데, 정부가 적극 나서서 경쟁교육, 노동 유연화, 민영화와 복지축소를 밀어붙여 처참한 국민들의 삶을 더 '미제라블'하게 만든다.

원작보다 비참한 21세기 한국판 <레 미제라블>

<레 미제라블>은 권력자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진실도 드러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 기득권의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법은 부패한 권력자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빵을 훔친 사내는 19년이나 가둬 놓는다. 판틴은 공장에서 일하다 쫓겨난 후 딸을 살리기 위해 머리칼을 잘라 팔고, 이를 뽑아 팔고, 거리에서 남자들의 희롱과 학대의 제물이 되어도 '법과 질서'는 오직 가해자 편을 들 뿐이다.

만일 장발장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면, 떡을 훔친 폐지수집상 할머니의 죄는 추상같이 물으면서도, 수백 억의 조세포탈과 수천 억의 배임 혐의를 받던 기업총수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한국식 법 정의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여배우 장자연을 능욕해 죽음으로 몰고 간 권력자들 가운데도 법의 처벌을 받은 이는 없다.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는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는 장발장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확고히 믿던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던진다. 법이 인간적 가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는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는 장발장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확고히 믿던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던진다. 법이 인간적 가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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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일깨우는 또 다른 사실은, 법이 개인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용서, 화해, 헌신이라는 인간적 가치이고, 장발장은 이를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를 쫓는 자베르 경감은 '법과 질서'의 알레고리로 등장한다.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의 용서에 감화된 후 혼란스러워 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진다. 자베르의 죽음은 이해, 배려, 공감이 법을 넘어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곧 한숨을 만날 운명이었는지, 영화관을 나서자 마자 들려온 인수위 위원장의 취임소감이 나를 무척 당황케 한다. 그는 자랑스레 자신이 '법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레 미제라블>은 자베르가 주연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레 미제라블>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 있다. 우리를 가장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사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위의 (대체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판틴을 시기하고 미워해 직장에서 쫓아낸 것도, 탐스런 머리와 흰 이를 빼앗은 것도 같은 처지의 서민들이었다. 동료를 감싸지 못하는 약자들이 그를 위해 강자와 싸워줄 수는 없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철밥통'과 '귀족 노조'라는 허구에 속아 남의 밥그릇을 뺏는 공모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우리에게 돌아온 거라곤 내 빈약한 밥그릇을 '철밥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장발장의 후회, 되풀이하지 말자

장발장은 옥살이를 한 후 사업에 성공하고, 시장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공장에서 작은 소란을 목격하게 된다. 직공 하나가 숨긴 딸이 있다는 이유로 동료들과 공장장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장발장은 공장장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고 급히 자리를 뜬다. 무심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자베르 경감때문에 마음에 여유를 잃었을 뿐이다.

장발장의 가장 큰 후회는 눈 앞에서 고통 받고 있던 사람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는 판틴의 딸을 맡아 키우는 것으로 속죄한다.
 장발장의 가장 큰 후회는 눈 앞에서 고통 받고 있던 사람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는 판틴의 딸을 맡아 키우는 것으로 속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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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은 이 순간을 눈물로 후회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거리에서 낯 익은 얼굴을 만나게 된다. 한 여성이 거리에서 몸을 팔다 남자에게 조롱당하고 경찰에 끌려가는 데, 바로 자신이 외면한 직공 판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문을 묻는 장발장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곳에 있었지만 나를 외면했어요. 아무 죄도 없는 나를."

한국사회의 비극은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내성을 지니게 됐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 결과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대통령 직선제는 시민들이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결실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싸워서 얻어낸 투표권으로 사회를 구체제로 되돌리는 선택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투표를 인정하지 않았던 지도자를 복권시킨 것이다.

<레 미제라블>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 등장한다. 종교적 사랑, 모성애, 부성애, 짝사랑, 한 눈에 반하는 사랑, 연민, 우정, 그리고 연대. 장발장은 이 모든 사랑을 아우르는 인물이다. 장발장은 혈육이 아닌 코제트를 돌보기 위해 높은 지위와 안락한 삶을 버리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베풀기 어려울) 선물을 준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향해 떠날 자유다.

코제트와 마리우스. 장발장은 코제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시민군 진영으로 들어간다.
 코제트와 마리우스. 장발장은 코제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시민군 진영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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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연대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은 가장 사회적인 선택이 된다. 개혁에 힘을 보탬으로써 코제트뿐 아니라, 코제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지켜낸 셈이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학생들의 혁명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지만, 이들의 희생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된다. 학생들이 바리케이드에서 전사한 뒤 16년 후 2월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혁명의 기운은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각국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에 달하자 이곳 저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오바마를 뽑은 시민들 속에 앉아, 박근혜 나라의 국민도 섞여 함께 박수를 친다.

2012년 대선, 실패하지 않았다

서민을 위해 일하던 정치인이 죽자,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부군과 맞서 싸운다.
 서민을 위해 일하던 정치인이 죽자,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부군과 맞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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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까지 한국사회는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들의 외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이번 대선결과와 인구비율을 놓고 비관적인 전망을 하기도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보수 성향을 지닌 50대 이상 유권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적이라는 50대의 37% 이상(방송사 출구조사 기준)이 박근혜를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대의 34% 가까이가 박근혜 후보를 골랐다는 사실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들 모두가 인주를 묻히는 순간 재채기를 한 게 아니라면, 사람에게 사회적 조건을 뛰어넘는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기에 절망할 필요도 없고, 낙관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이들을 포함한 사회구성원들과 어떻게 나누고 소통해 갈 것인가다. 이것은 5년 후 선거결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까지 얼마나 더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투표하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저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가.
저것은 결코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민중의 의지가 담긴 가락이다.
당신의 심장에서 울리는 고동이 저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때
내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이 노래는 희망의 조건을 말해준다. 당신의 '심장 고동'이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주위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레 미제라블>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될 것이며,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내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태그:#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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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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