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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투표하러 시골 다녀오겠습니다."
"주소 여기로 옮기지 않았어요?"
"예."
"그럼 다녀오세요."

1997년 12월 17일 15대 대통령 선거일를 하루 앞둔 수요일. 담임목사님께 수요예배를 마치고 부모님댁에 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해 8월 결혼을 했지만 아직 주소를 옮기지 않아 모든 적이 경남 사천 부모님 댁에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 살던 곳은 경남 통영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려고 가는 거잖아요"

지금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뚫려 통영에서 시골집까지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2차선 국도였습니다. 자가용은 2시간 걸렸지만 차도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택시나시내버스를 타고 통영 시외버스터미널을 갑니다. 그리고 통영-사천간 시외버스 타면 고성을 들러 사천까지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사천에서 시골집까지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로 1시간입니다. 족히 3시간은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하룻밤을 자야했습니다. 목사님 허락을 받고, 밤늦게 시골로 내달렸습니다. 버스 안에서 나누었던 아내와 대화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여보 내일 드디어 새날이 올 거요."
"그렇게 믿어요?"
"당연하지. 50년만에 정권 교체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해요."
"이회창 후보가 만만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물론 만만하지 않겠지. 하지만 반드시 김대중 후보가 될 거요.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처럼 1박 2일로 투표하려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지. 당연하지. 김대중 '대통령'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가 대통령이 되면 감격, 감격, 또 감격일 거요. 생각만해도 눈물납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해 1박 2일 동안 투표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집은 이른바 '골수경상도' 집안입니다.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세뇌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텔레비전을 처음 샀는데, 당시 광주 KBS가 나왔습니다. 뉴스 시간만 되면 채널을 돌려버렸지요. 특히 중 2때 1980년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동네 전체는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광주민주항쟁이 아니라 '광주사태'였습니다.

1박 2일,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나선 이유

대학에 들어가면서 광주민주항쟁 진실에 눈을 뜨면서 김대중은 '빨갱이'가 아니라 '선생님'으로 변화기 시작했습니다. 생애 첫 투표가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지역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김영삼을 지지해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1990년 3당 야합을 하는 김영삼을 보면서 그에 대한 눈꼽만큼의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김대중이었습니다.

드디어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 선거를 벼르고 별렀습니다. 그 때는 부산에 살았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공공연히 김대중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다 신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교회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목사님 선거하러 시골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그 먼 곳까지?"
"그래도 대통령 뽑는 선거잖아요."

"누구 찍을지 정했어요?"
"예. 전도사니까, 누굴 찍을지 알겠네."
"…"
"김영삼 아냐?"
"…"
"전도사가 말이야. 당연히 장로 찍어야지."
"…"

당시 김영삼 후보는 장로였습니다. 교회 분위가는 다 김영삼이었습니다. 1992년에 롯데 자이언츠가 빙그레 이글스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부산 사람들은 덩달아 김영삼도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김대중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장로를 찍어야 한다고 은근히 압박했지만

목사님께 차마 "김대중 찍겠습니다"라는 말을 못하고 그 먼 부산에서 경남 사천으로 투표하러 갔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택시를 타고, 부산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사천행 버스를 탔습니다. 사천에서 집까지 완행을 탔습니다. 부산 자취방에서 집까지 무려 4시간이 걸리는 장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잤습니다. 왜 김대중 대통령 만들려고.

"아버지 어머니 김대중 찍으세요."
"그러마."

"말씀 그렇게 하지 말고 김대중 꼭 찍으세요. 김영삼 찍지 말고."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아이가."
"내가 왜 부산에서 집까지 1박 2일 동안 투표하러 왔는지 아세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네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당연히 찍어야지."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했지만 결과는 김영삼 당선이었습니다. 1박 2일을 수고가 헛되었습니다. 다음 날 밤 부산 서면에서 친구 전도사와 함께 통음을 했습니다. 그날 비가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가 꼭 김대중을 지지한 이들 눈물처럼 보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배반한 김영삼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목사와 전도사와 신자는 장로를 찍어야 하는지 머리를 감싸고 감싸고 생각했지만 이해할 수없어 분노했습니다.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전도사가 말입니다. 그 때 다짐했습니다.

이인제 연설보고 흔들리는 동생을 향해 "안 된다! 김대중 찍어라!"

5년 후 반드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5년을 벼르고 별러 1997년 12월 17일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통영에서 사천 시골집으로 갔습니다. 1992년보다 김대중 후보 당선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때마침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가 후보자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내동생이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를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이인제 후보 연설을 보더니 약간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이인제 연설 잘 한다."
"뭐 이인제가 연설을 잘해?"
"마음이 조금 흔들린다."

"연설 잘하는 것 하고, 대통령이 잘하는 것은 다르다. 김대중 찍어야 한다."
"물론 김대중 찍어야겠지."
"찍어야겠지가 아니라 찍어야 한다. 내가 왜 너 형수와 함께 통영에서 1박 2일로 투표하러 왔는줄 아나. 바로 김대중 대통령 만들려고 왔다. 흔들리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김대중 찍어야 합니다. 알겠죠."
"알았다. 이제 고마해라."

동생 마음을 다잡고 긴밤을 보냈습니다. 투표장까지는 또 차를 타고 15분은 가야했습니다. 걸어서가 아니라 차를 타고 말입니다. 투표장으로 들어가 투표용지를 받고, 기표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김대중에게 한표 꾹 눌렀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통영으로 돌아왔습니다. 1박 2일의 긴 투표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18시. 한국갤럽이 발표한 출구조사 결과 김대중 후보 39.9%, 이회창 후보 38.9%였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것처럼 기뻤습니다. 아내를 부둥켜 안고 방안을 돌았습니다.

"여보 김대중이 이겼다! 이겼어!"
"아직 출구조사잖아요."
"개표결과도 비슷할 거예요. 김대중이 이겼어요. 이겼어!"


"1박 2일 투표기가 헛되지 않았네요"

얼마나 기뻤는지 경기도 구리에 살고 있던 신학을 같이 공부한 5살 형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형에게 영향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저를 올바른 정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형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개표를 지켜봤습니다. 드디어 김대중 후보가 1032만6275표(40.27)를 얻어 993만5718표(38.74)를 얻는데 머문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온 밤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여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어요. 대통령이 되었다고."
"그래 축하해요."
"오 감사합니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시다니."
"1박 2일 투표기가 헛되지 않았네요."
"그래요. 1박 2일 투표기가 헛되지 않았어요."

20년 전인 1992년과 15년 전인 1997년 나는 이렇게 김대중을 대통령 만들기 위해 1박 2일을 투표하는데 보냈습니다. 지금은 투표장까지 걸어 1분입니다. 격세지감입니다. 그런지 그 때만큼 감흥과 열정은 없습니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등 대통령 후보들은 아직 나에게 1박 2일을 시간내서라도 투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1박 2일을 시간내서라도 투표하려 갈 수 있는 자질과 능력 도덕성을 갖춘 분이 있으면 과감히 한 표를 행사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나의 투표권 수난기' 응모글입니다



태그:#투표수난기, #김대중, #1박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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