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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보살 한 사람과 고시공부하다가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이 호젓하게 기거하고 있는 깊은 산속 '영불암', 오늘은 망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음력 칠월 보름 백중제사 준비로 분주하다. 재를 올릴 손님들을 기다리는 중에 뜻하지 않게 산판에서 일하는 공공근로자가 지게에 시신 한 구를 지고 내려온다. 경찰이 올 때까지 영불암에 모셔둘 수밖에 없단다. 객석에서 볼 때 무대 왼쪽 앞 구덩이 속에 시신을 눕혀두고 연극은 시작된다.

연극 <달빛 속으로 가다> 포스터
 연극 <달빛 속으로 가다> 포스터
ⓒ 서울시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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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나 둘 영불암에 들어선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산에서 솔잎을 따다가 발을 다친 의사와 그를 부축하고 온 중년 남자, 어머니 제사를 모시러 온 처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신은 아무런 말이 없는 가운데, 이곳에 오게 된 각자의 사연이 드러난다.

혈혈단신 월남한 남자와 오래도록 부부로 살았으나 두고온 가족을 잊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을 위해 재를 준비하는 아내. 실종된 후 주검으로 발견되어 몇 년 전 이미 장례를 치른 남편의 제사를 지내러 온 며느리와 여전히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시어머니. 어머니에 이어 약혼자마저 세상을 떠난 처녀의 사연.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아들을 둔 아버지와 그 고문의 진실을 은폐한 의사 등등.

이들의 사연은 모두가 다른 듯하면서도 이어져 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이 다 다르면서도 사연 없는 죽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을 두고 모인 사람들의 말 못할 고통과 슬픔과 후회와 억울함과 분노와 절망이 무대를 채우는 중에도 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은 말이 없다. 때로는 차갑게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울며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안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연극 <달빛 속으로 가다> 나오는 사람들
 연극 <달빛 속으로 가다> 나오는 사람들
ⓒ 서울시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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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들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른 지 오래라는 며느리의 실토에 어머니는 숨이 넘어갈 듯 가슴을 쥐어뜯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진정이 된 후 어머니는 여전히 붉게 핏발 선 눈으로 혼잣소리하듯 내뱉는다. 어쩌겠냐고, 세월이 놓아줄 때까지 사는 수밖에 없노라고.

가슴 아프게도 연극 속에 등장하는 고인들의 죽음의 방식은 주로 자살이다. 연극이 처음 만들어졌던 12년 전이 지금보다 좀 더 의문사와 분단 문제, IMF 경제 위기를 더 절실하게 여겼으리라 짐작해본다. 지금이라고 해서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우리들 삶은 그때보다 더욱 더 눈앞의 문제에서 눈을 돌릴 수 없을만큼 팍팍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죽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계속 우리 곁에 있고, 우리들 삶 또한 계속되고 있다. 물론 달빛도. 그러니 이 연극은 어떤 해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모습을 한 번 들여다보라고 한다. 세월이 놓아줄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내야 하는 곤고한 삶, 남루하기까지 한 일상을 그대로 받아안으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은 무거웠고 마음도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고단한 삶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은 결국 죽음인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세월이 아직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데. 그저 끝까지 걸어가 보는 수밖에. 그 길에 달이 친구가 되어주려나. 달빛 속을 걷다보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길을 놓치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연극 <달빛 속으로 가다> (장성희 작, 김철리 연출 / 출연 : 이창직, 남기애, 강지은, 강신구, 김신기, 주성환, 김현, 최나라) ~ 10/7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태그:#달빛 속으로 가다, #죽음, #사별, #장성희 , #김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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