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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심순덕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전문

지금도 나는 '어머니'하고 그 단어만 입에 담아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골에서 도회로, 도회에서 다시 시골로, 부침의 세월 속에서 이삿짐을 꾸려 옮겨다녀야 했던 가족사를 새삼 들추지 않아도 경제적 능력이 없던 지아비와 함께 적지 않은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의 그 지난한 세월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생활의 방편으로 시골에서 도회로 옮긴 후 제대로 삶터를 잡지 못하고, 장사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시장에 자판을 깔았을 때는 그 절박함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것도 연탄화덕에서 파와 감자 등속으로 붙임개를 붙여 파는 것이다. 수익도 수익이었겠지만 정말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장사였다. 그러나 그 장사를 위해 매일 밀가루 반죽을 하고, 연탄화덕에 불을 붙여 10리가 넘는 시장까지 그것을 머리에 이고 나가야 했다.

시장바닥에서의 장사로는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이번에는 옷 보따리를 이고지고 시골로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하루는 섬으로 들어가는 차를 탔단다. (영화 <친정엄마> 한 장면.)
 시장바닥에서의 장사로는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이번에는 옷 보따리를 이고지고 시골로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하루는 섬으로 들어가는 차를 탔단다. (영화 <친정엄마> 한 장면.)
ⓒ 영화 <친정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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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바닥에서의 장사로는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이번에는 옷 보따리를 이고지고 시골로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하루는 섬으로 들어가는 차를 탔단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섬들이 연육이 되지 않아 승객을 태운 버스는 차도선을 이용해 섬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어머니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섬으로 이동한 버스가 출발해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먼지만 날리며 달아나는 버스 뒤를 쫒아 갔다. 길모퉁이를 돌아가던 버스가 다행히 어머니를 발견하고 세워주는 바람에 차를 탈 수 있었고 짐도 챙길 수 있었단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표현이 가능하지 당시상황을 생각하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버스를 쫒아가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습이 겹쳐 눈시울이 붉어진다.

초등학교를 네 번이나 전학 다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우리 식구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야 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자라나는 아이들 때문에 더 이상 도회에서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이다.

중학시절부터 공부한답시고 집을 나와 혼자 자취를 해야 했던 나는 주말이나 명절, 방학에만 집엘 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한가위라 시골에 내려갔다. 차례를 지내고 온 가족친지들이 모여 성묘를 하러 다니는데 할머니 산소에서 어떤 여인이 너무나 섧게 울고 있었다.

마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절절한 슬픔이 적셔있는 통곡이었다. 명절날 누구인가 의아해하며 가족들이 가까이 가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무덤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계셨다. 얼마나 슬프게 울고 계시는지 그 소리를 듣는 사람 모두가 눈시울을 훔쳤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렇게 서럽게 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 또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신산스런 삶에서 매일매일 겪어야 하는 허탈한 일상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렇게 서럽게 울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학교에 다닌다고 객지를 떠돌고 있었으니….

그런 어머니의 어려운 삶을 알기에 맏이였던 나는 어머니에게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아들로 남으려 애썼다. 방학 때 집에 가면 가능한 어머니의 일손을 덜어드리려 노력했다. 겨울이면 어머니가 산속에 꾸려놓은 철나무를 집까지 다 옮겨야 했고, 여름이면 밭이랑에 매놓은 지심을 밭두렁으로 퍼내야 했다. 조그만 보탬으로라도 어머니를 지탱해 주고 싶었다.

그런 어머니가 10년 전 저 세상으로 가셨다. 어느 날 문득, 말 한마디 없이, 늘 조용하고 건강해 뵈던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 잠을 자듯이 그렇게 가신 것이다. 부음을 전해들은 나는 어머니 곁에서 어릴적 할머니 무덤 앞에서 울던 어머니만큼이나 슬프게 울었다. 꺼이꺼이 복받치는 설움에 목이 메곤 했다. 무언가 내가 할일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불효가 나를 그토록 슬프게 했다.

비운(悲雲)으로 덮인 하늘에서는 사선을 그으며 빗발이 쏟아지고, 파도는 밤새 빗발을 달래며 뒤척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가슴속에 맺혀있던 앙금과 슬픔의 찌꺼기들이 다 씻어지는 듯했다. 아침이 되니 뒤척이던 파도도 갯벌만 드러내놓고 멀리 밀려나 있었다.

시골에서는 그래도 부잣집 소리를 듣던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온갖 귀여움과 호사를 누리면서 자랐다던 어머니가 평생을 객지로 시골로 옮겨 다니며 감당해야 했을 고생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힌다. 슬플 때도 웃고, 힘들어도 웃고, 할머니가 보고 싶어도 웃던 어머니, 늘 강한 줄만 알았던 어머니는 혼자서 속으로 슬픔을 삭이며 그 많은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처녀시절 어머니께서 예쁜 수를 놓아 만들었다는 베개와 이불들이 장롱 가득 동화속의 침구처럼 내 기억 속에 아직도 각인되어 있다. 그 고생을 하고도 하늘나라로 떠나신 어머니는 종종 내 꿈 안에서 당신이 이불위에 수놓은 꽃만큼이나 곱고 단정하게 웃고 계신다. 보고 싶은 어머니...

덧붙이는 글 | '나의 어머니' 응모 글입니다.



태그:#어머니, #엄마, #심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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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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