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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인이 점심 메뉴를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 덜어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모두를 만족하는 절묘한 조합은 없었다. 사진은 지금까지 우리의 입을 즐겁게 만들어준 식당들의 간판들.
 특정인이 점심 메뉴를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 덜어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모두를 만족하는 절묘한 조합은 없었다. 사진은 지금까지 우리의 입을 즐겁게 만들어준 식당들의 간판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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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간보다 정확한 배꼽시계, 오전 11시가 넘어가자 '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반짝거린다. 아…,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나 보다. 오늘은 왠지 시원한 냉면이 당기지만, 그래도 항상 '밥을 먹어야 힘을 낸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니 그러지도 못하겠다.

1분 1초라도 알뜰히 쓰기 위해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시작해보지만, 막상 점심시간이 되어도 결정을 못 내렸다. 어쨌거나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어느새 사라지고 점심 고르는 걸로 똘똘뭉친 팀원들. 하지만 막내 신입부터 밤새 달려 속 쓰린 이사님까지 어느 장단에 맞추어 메뉴를 골라야 하는 걸까?

"오늘은 뭘 먹으러 갈까요?"
"아무거나!"

그렇지 않아도 요즘 업무 스트레스로 이만저만이 아닌데 점심 메뉴선정 스트레스까지 겹치니 여기 '멘붕' 하나 추가요. 박 과장의 질문에 무심코 "아무거나!"를 외쳤던 이 불편한 상황, 지금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다. 그러고 나서는 특정 메뉴를 권유하면 "또 거기야?"라고 거부했던 이 불편한 상황들…. 점심시간마다 매일 고비를 맞이하는 건, 팀원들의 혈액형이 모두 O형과 B형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일까?

탁월한 '젊은 감각'으로 점심메뉴 고르라고 한다면?

오늘 점심 메뉴를 고를 결정권은 다행히 막내에게 주어졌다.

'음…. 오늘은 아저씨(?)들이 자주 가는 김치찌개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내가 아침에 현미밥에 김치찌개랑 계란프라이 잔뜩 먹고 왔으니까, 그러려면 잽싸게 메뉴를 먼저 선수쳐야 할 텐데… 어쩌지?'

사실 막내는 '튀김우동 컵라면+김밥천국 참치김밥'의 절묘한 조합을 가장 선호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팀원들 앞에서면 항상 작아지는 막내, 역시 '아니 아니, 아니 되오!'다.

일단 막내는 최대한 상냥한 표정으로 "김치찌개는 자주 먹었으니까 오늘은 길 건너 라면사리까지 서비스해주는 얼큰한 부대찌개집 어때요?"라고 제안하니 팀원들은 "부대찌개 요즘 방송에서 말 많던데? 다른 걸로 선정해 봐, 젊은 감각으로 말이야~"라며 항변한다. 메뉴 정하는데 젊은 감각이 다 무슨 소용인지, 참 난감하다.

이어 눈치를 살피며 "그럼 설렁탕이나 갈비탕을 먹을까요?"라고 했지만 역시 "그거, 여직원들이 싫어하는데…"라며 동료들이 말끝을 흐린다. 다시 용기를 낸 막내,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를 준비하라면? 기다려! 천국(?)에서 엄마 몰래 김밥과 함께 먹는 라면!"

개콘의 신보라처럼 용감하게 랩으로 애교도 부려보지만 역시 무용지물이다. 멤버들은 여전히 "이건 아니다"며 손사래를 친다. 

결국 어제 먹었던 음식을 또 먹자니 그렇고, 뭐 딱히 먹을 것도 없던 찰라, "이런 우중충한 날씨에는 짬뽕 국물이 당기지 않아?"라며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결국 중화요리 집으로 결정났다.

자장면, 짬뽕, 볶음밥 모두 주옥같은 메뉴... 뭘 먹지?

하지만 중화요리집으로 결정난 것이 모두 끝이 아니었다. 메뉴 정하는 데에만 또 몇 분이 흘러간다. 여기서도 "뭐로 드실래요?"라는 질문에 또 망설여진다. 결국 또 다시 "아무거나"라고 답하고 말았다. 도대체 자장면인가, 짬뽕인가? 자장면을 선택했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니 이 대리의 우동이 더 맛있어 보인다면? 게다가 오늘따라 짬뽕이 맛있다며 후루룩거리기라도 하면 '잘못한 선택'에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자장면과 짬뽕, 볶음밥과 잡채밥 모두 주옥같은 메뉴들 아니겠는가. 팀원들은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오죽하면 '아무거나'와 '짬짜면'이라는 메뉴가 나왔을까.

처음엔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괜찮은 횟집 식당 하나를 뚫으니 점심 메뉴가 매일 바뀌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은 매운탕, 화요일은 회덮밥, 수요일은 새우돌솥밥… 매일 매일 점심시간만 되면 고민하게 되는 메뉴 선택에서 해방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것도 '육해공'중에서 선택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 특히 제육볶음에 상추쌈을 원하는 특정직원(?)의 항의로 어쩔 수 없이 세 달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양한 배달 서비스 이용도 해봤다. 점심 때 반찬만 배달해주는 전문점을 이용해보니 반찬도 매일 다양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먹으니 가격도 절약할 수 있었다. 배달 서비스라 굳이 밖으로 안 나가도 되고 시간도 절약해서 좋았다.

특히 요즘은 배달메뉴도 다양한 메뉴들이 생겨 고민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메뉴에 두 가지 요리의 맛을 볼 수 있는 실속메뉴로 알찬 점심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도시락을 주문하면 회사 앞 벤치에 소풍 온 것처럼 먹는 것으로 어느 정도 기분전환도 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도 밥상 차리는 것을 서로 미루다 보니 결국 점심시간이 다가와도 여전히 미적거린다. 다들 제 일이 바쁜 처지라 서로 눈치만 살피다 보니, 어느새 '미루기+눈치보기+부려먹기'가 생활화 되어 버렸다.

이후 특정인이 메뉴를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 덜어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했다. 순두부, 낙지덮밥, 주꾸미볶음, 부대찌개, 된짱찌개, 김밥+라면, 백반, 짜장면, 칼국수, 생선조림, 생선구이, 불고기뚝배기, 칼국수, 제육볶음 등 특정메뉴는 물론 양식, 한식, 중식, 일식, 패스트푸드 등 원하는 모든 장르까지…. 일단 메뉴를 모두 나열한 후 오로지 '신의 뜻'에 맡기는 사다리타기, 제비뽑기 등 모험을 건 랜덤 방법까지 동원했다.

점심메뉴 오로지 '신의 뜻'?... 아니 아니, 아니되오!

함바식당의 밥값은 1인분에 4000원, 정말 착한 가격이다. 어디 그뿐인가. 메뉴도 1식 4찬 이상으로 매일 바뀐다.
 함바식당의 밥값은 1인분에 4000원, 정말 착한 가격이다. 어디 그뿐인가. 메뉴도 1식 4찬 이상으로 매일 바뀐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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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험적인 무차별 투표방식 역시 예기치 못한 실패와 상처를 겪었다. 점심메뉴를 통해 친밀감을 추구하는 과정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결국, 마지막으로 내놓았던 랜덤 방식 또한 도태되고 말았고 또 다시 점심메뉴 고르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시 점심시간에 주변 식당가를 그렇게 또 전전하기 시작했다.

역시 맛보다는 가격이 우선이었고, 여전히 한 명이 특정메뉴를 제안하면 동의하는 방식이었지만 결국 김치찌개가 압도적이었다. 대학 구내식당도 노려봤다. 영양사가 영양기준에 맞게 매일 다양한 메뉴를 내놓고 거기다가 착한 가격까지…. 메뉴 정하기가 애매할 땐, 학교 관계자처럼 행동(?)하며 가끔 이용해보니 여기도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왠지 젊은이들 밥 뺏어먹으며 죄 짓는 기분이다. 이러고 보니 또 좌불안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론에서 이른바 '함바(건설현장 식당) 비리'가 터져 나온다. 식당 운영자 결정권으로 금품을 받은 공직자들이 기소됐다는 뉴스가 한동안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함바식당은 주로 현금으로 거래되고 일정한 인원이 보장되어 수익이 높아 부패의 온상이 되었단다.

함바? 아, 바로 이거였다. 함바식당, 눈과 귀가 번쩍 뜨이고도 남는 반가운 곳, 너 정말 반갑다. 비리의 온상이면 또 어떤가? 함바식당이 암만 어두워도 예전엔 왜 미처 몰랐던가. 주야장천 점심 메뉴로 고민했건만, 이렇게 사무치게 반가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맛과 영양에 착한 가격까지... 점심투쟁의 종착역은 '함바'

깨끗한 가건물로 만든 함바는 에전의 현장식당과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는다. 영양사가 짠 주간식단표에 얼마나 푸짐하게 퍼 주고 또 맛있는지 먹는 입들이 모두 함박만 해진다. .
 깨끗한 가건물로 만든 함바는 에전의 현장식당과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는다. 영양사가 짠 주간식단표에 얼마나 푸짐하게 퍼 주고 또 맛있는지 먹는 입들이 모두 함박만 해진다. .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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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니 작업복을 입은 이들이 눈에 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식사를 해결하려는 인부들이다. 회사 주변에서 찾은 함바식당의 밥값은 1인분에 4000원, 정말 착한 가격이다. 어디 그뿐인가. 메뉴도 1식 4찬으로 매일 바뀐다. 조금 허름하지만 함바집은 늘 활기가 넘친다.

캐터링(단체급식) 업체에서 맡아서 운영하는 이곳의 오늘 메뉴는 고등어무조림, 우거지된장국, 오징어채 볶음이었다. 메뉴는 1주일 단위로 게시하는데 메뉴도 전문영양사가 지정하니 영양과 위생수준도 전문식당 이상이다. 얼마나 푸짐하게 퍼 주고 또 맛있는지 먹는 입들이 모두 함박만 해졌다.

깨끗한 가건물로 만든 식당은 옛날식 현장식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음식 내용도 달라졌다. 그래서 이 곳을 찾는 손님의 3분의 1정도가 주변 회사의 직장인으로 식당은 항상 만원이다. 밥을 먹는 얼굴들은 더 밝다. 임금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고 있다는 즐거움이 가득하니 함께 하는 우리 팀원들도 즐겁다.

'아침은 신선이, 점심은 사람이, 저녁은 귀신이 먹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충 끼니만 때우다가는 저녁에 폭식이나 과식과 같은 식습관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점심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특별히 먹어야 한다는 진리를 꼭 명심하라.

직장인들이여, 점심메뉴를 고르는 즐거움은 나만의 특권이리라. 딱 하루 한 끼 제대로 먹는 점심, 꼭 제대로 드시라. 배는 고프나, 회사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고 번거로운가? 언젠가 받은 상가수첩을 찾아보지만 뾰족한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렇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패스트푸드를 가까이 하면 결국에는 건강까지 위협할 수있다.

그런데, 이제 함께한 지 한 달째인 이 함바집 밥, 영양 좋고 맛도 좋은데… 군대 짬밥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직장인의 점심투쟁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점심, #함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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