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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고등학생 시절, 나는 대학 진학에 뜻이 없었다. 지겨운 공부를 계속하자니 너무 끔찍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협박으로 인해 수능 시험장으로 가게 되었고 원서까지 쓰게 되었다. 깊은 뜻이 있어 쓴 원서가 아니었기에 학교와 전공도 각각 달랐다. 그리고 합격 된 세 군 데 중에서 가장 좋은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이 나와 문학과의 첫 만남이었다.

별 생각 없이, 마치 돼지가 도살장에 질질 끌려가듯이 만나게 된 문학이었지만 생각 외로 잘 맞았다. 풍부한 감수성 덕분이기도 했지만, 사실 고등학생 때도 문학에 아주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닌지라 공부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점은 수능을 위해 암기하듯 배웠던 언어영역과 대학에 와서 전공과목으로 배우는 문학과의 차이였다.

언어영역을 위해 시를 공부하는 방식은 대개 이러했다. 한 편의 시를 크게 작가와 시대와 작품으로 분리한다. 한 작가를 정형화시키고, 시대적 배경을 암기하고, 시에 쓰인 기법들과 서술적 특징은 다른 작품들에도 적용되니 용어로 알아둔다.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해 몸 속의 장기들을 분리하듯 배웠으니 즐거울 리 만무했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시는 확연히 달랐다. 한 작가의 특징을 몇몇 작품으로 획일화할 수 없으며, 같은 작가가 같은 주제로 작품을 창작하더라도 심상은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문학 안의 시는 무한정 자유롭다. 공부할수록 그 깊이의 끝을 알 수 없어 재미있다면 재밌겠지만, 또 어렵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대구형무소에서 수인번호가 264여서 원록이라는 본명 대신 이육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는, 그 시인을 대학에서 처음 배웠을 때의 충격은 잊지 못한다. 많은 시 중에서도 광야나 청포도, 절정이 아닌 노정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노정기(路程記)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배쪼각
여기저기 흐터져 마을 이 한구 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푸고
삶의 틔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엿다
남들은 기벗다는 젊은 날이엿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갓해
소금에 짤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울넛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버서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빈저주도 안엇다
쫏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믜이양
다 삭어빠진 소라 깍질에 나는 부터왓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너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삶이 티끌과도 같아 보잘 것 없고, 능동적이어야 하는 꿈도 몰래 가는 무동력선이자 이동을 못하는 배인 '쩡크'처럼 수동적이라고 길을 떠돌아다니는 기록을 시로 남긴 작품에는 한 명의 나약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젊은 날에 여기저기 흩어져 후줄근한 항구와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여정이 반복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여정 동안 거치는 어촌들은 지구 남반부에서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남십자성마저도 반겨주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에 뛰어난 감성까지 더하여, 소금에 절고 부풀어 오르는 배의 돛과 물결에 밀려오는 거미와 삭은 소라 껍데기가 곧 자신이라고 여겨졌으리라.

이렇게 노정기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당함과는 달리 소극성이 드러나 있는 시이다. 이육사전집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노정기에서와 같은 태도의 시가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시인이기 이전에 사상가이고 혁명가였기에 문학은 부수적인 삶의 일부였다.

다른 시인들도 매년 약 70만 명이 동시에 치르는 시험을 위해 실제와는 다르게 평가된 면도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본인의 시에 대한 문제를 모두 틀렸다며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진짜 작가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미스터리하다"고 말한 최승호 시인이 이해된다.

삼 년 터울이 지는 수험생 동생의 문학책을 펼쳐보니 암기식 수업에 의한 베껴 쓰기가 나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삼 년 터울이 지는 수험생 동생의 문학책을 펼쳐보니 암기식 수업에 의한 베껴 쓰기가 나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 권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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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그럴 수밖에 없는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이미 많은 학생들에게 시인은 다양한 측면을 지닌 인격체가 아니라 항상 같은 마음으로 시를 찍어내듯 창작하는 지루한 두 글자 또는 세 글자로 기억되고 있다. 3년 터울이 지는 수험생 동생의 문학책을 펼쳐보니 암기식 수업에 의한 베껴 쓰기가 나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시간이 흘러도 수업 방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깊게 공부할 학생은 반도 되지 않을 텐데, 결국 많은 이들이 평생토록 무척이나 아름다운 학문을 접하지도 못한다.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언어와 예술 중에서, 언어에만 치중하는 이 교육제도는 바뀌어야 마땅하다.


이육사의 육사시집

이육사 지음, 우즈워커(2014)


태그:#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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