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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생각 같아서는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다. 어쩜 이 영어라는 존재는 나를 이렇게도 괴롭히는 것인지.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한숨이 절로 나오곤 한다.

영어의 압박감이란
 영어의 압박감이란
ⓒ 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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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 놈의 영어

이는 호주에 온 사람들의 공통의 고민이다. 10시간도 넘게 날아서 이 머나먼 나라에 큰 결심을 하고 왔건만,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영어 한마디 더 써보고자 애꿎은 시내를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도, 막상 현지 사람들을 만나면 말 한마디 건네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호주에 오고 나서 한 육 개월 정도까지는 다들 초조하고 불안해 하곤 한다(사람에 따라 이 불안감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다).

나는 애초에 호주에 가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어떤 큰 목표를 세우지 않았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면 영어, 일이면 일, 여행이면 여행. 이렇게 뚜렷한 목표를 세웠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좀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먹고사는 일이든 영어든, '경험'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호주에 온다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영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 의사를 전달하고, 사고 싶은 것을 사거나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을 만큼의 영어 실력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초기에 영어에 대해서 그다지 큰 부담을 느끼지 못했다. 학원에 다니며 처음 인터뷰 한 날 만난 에일린과 스텔라,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어려운 주제의 대화를 나눌 때 약간의 불편은 있었지만, '그 정도쯤이야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호주에 온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마트에서 판매원이 건네는 일상적인 말조차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표현하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 한 가득 있는데 아는 단어가 없어서 말을 못하거나 간단한 영어책도 페이지가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만큼 해석이 안 되는 거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왜 이럴까'라는 생각만 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영어가 늘 수 있을까.

그 때 같은 방 룸메이트였던 혜미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언니, 나 아무래도 영어가 너무 안 늘어서 미치겠어요' 라고. 나의 말에 언니도 초기에 영어 때문에 고민이 정말 많았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호주인 매니저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면서, 언니는 누구나 다 겪는 과정이니까 너무 초조해 말고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

맞는 말이다. 겨우 6개월 만에, 겨우 1년 만에 어떤 언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보다는 훨씬 많은 영어를 실생활에서 접하고 말하게 되지만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듯,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처음 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같은 반 친구보다 영어가 느리게 느는 것 같아 속으로 고민이 많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실력 차이일 뿐, 나중에 다시 보면 그렇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나의 필수품. MP3, 스케줄러, 그리고 네팔에서 사 온 달력.
 나의 필수품. MP3, 스케줄러, 그리고 네팔에서 사 온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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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영어가 빨리 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성과가 하루아침에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영어를 접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가지고 있는 MP3의 라디오 기능을 이용해서 현지의 라디오 방송을 시간 날 때 마다 듣는 것, 그리고 어학원에서는 아무리 자신이 없어도 무조건 영어로 대화하는 것(생각만큼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인 친구들이 많은 학원에서는 더욱 더. 그래서 외국인이 많은 학원에 다니라고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나 식사할 때 텔레비전 방송을 많이 보는 것 등이 있다.

호주도 우리 나라처럼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아침에 하는 뉴스나 드라마, 그리고 호주판 아메리칸 아이돌인 '오스트레일리아 아이돌'을 주로 즐겨보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그냥 보고 듣는 거다. 그러다 보면 지나가는 표현들을 하나씩 건지게 되고, 그것들을 친구들 만났을 때나 마트에 갔을 때 한 번씩 써보면 되는 것이다.

또 될 수 있으면 초기에 그래머 인 유즈 책을 공부하자. 한국에서 한차례 공부하고 가면 더욱 좋다. 책과 함께 동영상 강의를 같이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어려운 문법을 꼭 공부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돌아갈 때 즈음에는 '아, 문법을 알아야만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법을 안다는 것은 그 상황에 알맞은 시제와 어순을 배열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몇 쪽씩이라도 정해두고 그래머 인 유즈 책 한 권을 다 푼다면 영어를 배우는 기본 자세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친구들과 함께했던 바베큐 파티
 친구들과 함께했던 바베큐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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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하나의 신기한 경험과도 같았다.
 외국인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하나의 신기한 경험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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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인 것은, '자신이 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영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남들처럼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영어라는 언어를 학문으로서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속으로 '이 정도면 됐지, 뭘'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나쳐가던 어느 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문득 영어를 배운다는 건 나의 'boundary'를 넓혀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취직을 위해,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영어라는 그 언어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그 때 나는 비로소 영어의 필요성을 몸으로 절감했다. 평소에 쓰던 말이 아닌 언어 하나를 배움으로서 나는 다른 나라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들과 같은 것을 느끼고,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그 전에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 것 단 하나였다. 

영어가 쉽게 쉽게 느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조금씩 그 재미를 알아가고 있어.
하나하나 끊어져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던 문장들도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1/5에 불과하지만, '트루먼 쇼'의 짧은 대사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어.
점점 더 이해하고, 잘 말할 수 있게 될 거야.
조급해 하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자!

호주의 다가구 주택. 보통 학생들은 집 한 채에서 방만 따로 쓰는 쉐어(Share)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주의 다가구 주택. 보통 학생들은 집 한 채에서 방만 따로 쓰는 쉐어(Share)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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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의 추억

브리즈번에 머물렀던 9개월 동안, 나는 총 5번의 이사를 했다.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다고 볼 수 있지만, 사람이 살던 보금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혼자 하는 살림이기 때문에 '이사라고 해봐야 별 것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짐을 쌀 때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물건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음식을 해먹기 위한 각종 조미료에서부터 옷 한 보따리, 노트북, 카메라, 각종 책과 잡동사니 등을 정리하고 버리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집, 내가 앞으로 살 공간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되고, 그 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니까. 보통 호주에서는 혼자서 방을 쓰게 되면 비용의 부담이 크므로 대개 2인 1실로 쉐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운이 좋게도 나의 경우에는 함께 지냈던 룸메이트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의외로 처음 사람을 만나면 털털한 척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 룸메이트가 되었던 혜미 언니와 집을 소개해 주었던 은경이와도 계속 친하게 지냈고, 그 뒤로도 인복이 있었는지 대부분 좋은 집주인과 룸메이트들을 만나 잘 생활했던 편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적응하기 어려웠던 적도 있기 마련이다.

한 번은 너무나도 외국인 쉐어를 하고 싶어서 일본,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 친구들이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집의 분위기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겨우 한 달 남짓 살고 나왔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집에 살고 그 집의 분위기가 어떤가는 참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집의 침대.
 첫 번째 집의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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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간 집에서 살 때는 참 즐거웠다. 학교를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는 웨스트엔드 산책도 하고, 골목 골목을 지나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일이 끝나고 돌아온 혜미 언니와 수다를 떨면서 하루를 정리하곤 했다. 또 크리스마스나 새해처럼 기념일 같은 날에는 함께 장을 봐 와서 요리를 해가며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렇게 아직 호주가 낯설었던 나에게, 맨 처음 친구가 된 은경이와 혜미 언니는 좋은 가족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집. 그 때 나는 이사를 하겠다고 집주인에게 2주 전에 미리 얘기를 해놓고(집을 옮기기 전에는 최소 2주일 전에 미리 집주인에게 말해 주는 것이 예의다) 집을 알아보다가 운이 좋게도 호주 사람이 하는 쉐어 하우스에 방을 구한 참이었다. 낡았지만 큰 유리창에 테라스까지 붙은 2층 집의 가장 큰 방을 계약하고서 나는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이사 갈 날만 기다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집주인과의 오해가 생겼으니 미안하지만 다른 곳을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고. 나는 어쩔 줄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당장 나가기로 한 날짜가 코 앞인데. 내가 예상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들만 벌어지던 한국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뜻밖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법.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웨스트엔드 바로 위에 위치한 하이게이트 힐의 한 유닛을 구했다. 그리고 호주에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 중의 한 명인 은하를, 나는 바로 이 집에서 만났다.

처음에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는 은하를 봤을 때, 나는 참 '곱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첫인상이 무색하지 않게 은하는 한 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때론 언니나 가족처럼 나를 챙겨 주곤 했다.

우리가 함께 생활하던 방은 붙박이 옷장에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붙은, 조금 좁다 싶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그 방에서 우리는 빨리 영어가 늘고 싶어 영어로만 말하기로 약속하기도 하고 밤마다 침대에 누워서 서로의 고민을 얘기했다. 내가 학교를 잠시 쉬고 5존의 액세서리점에서 판매원으로 일 할 때는 아침마다 바쁘게 나가는 나를 위해 은하가 손수 수프를 끓여주거나 밥과 반찬을 준비해주기도 했다. 나는 가지고 온 돈이 거의 떨어져 가는 가난한 학생이었고, 은하도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한정된 금액만을 가지고 온 상태라, 우리 둘은 늘 알뜰한 소비를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챙겨주고, 부담스러워 할까봐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은하를 보며 언니였던 내가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가까워졌던 은하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는 미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울 것 같아 차마 나가지 못했다는 은하의 얘기를 듣고서, 만나기로 한 곳까지 숨차게 달려갔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은 사람은 잘 자도 때린 사람은 잠 못 잔다'는 속담이 있듯이 더 많이 주었던 은하에 비해 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챙겨주지 못했던 나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카지노에서 함께 했던 시간과 밤마다 얘기를 주고받았던 그 날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정도로.

브리즈번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3존 첨사이드. 저 건물이 도서관이다.
 브리즈번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3존 첨사이드. 저 건물이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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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웨스트엔드에서의 생활을 거쳐 나는 일터가 있는 3존 첨사이드로 집을 옮겼다. 갑작스럽게 시작하게 된 일이라 기간이 정해져 있는 단기 쉐어를 구해 들어갔고, 시간이 지나 나가야 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을 때쯤 마침 한국에 있던 사촌 언니도 일을 그만두고서 호주에 오기로 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장 두 사람이 같이 살 만한 방을 구해야만 했었다. 시티 부근에는 매일 나오는 방이 많지만, 이곳 첨사이드는 3존이고 사는 사람들이 대개 호주 현지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살만한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선 브리즈번' 사이트에서도 외국인을 위해 마련 된 영어 페이지로 들어가서 클릭해 보거나 여러가지 글들이 붙어있는 동네 도서관의 알림판을 매일 같이 체크하기도 했다.

그렇게 5존에 있는 수영장이 딸린 호화스런 집이나 호주인 집주인과 함께 쉐어 할 수 있는 집에도 가보기는 했었지만 샤워는 5분 내로 하라는 둥(호주는 일정 분량 이상의 물을 사용하게 되면 벌금을 낸다), 방에서 시끄럽게 수다는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둥의 조건을 내 걸어 '이런 집에서는 살 수 없겠다'라는 생각을 굳혀가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때, 기적과도 같은 타이밍으로 선브리즈번에 올라온 글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바로 전화를 해서 그 집을 찾아 갔고, 아슬아슬하게 길에서 자는 홈리스 신세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주인집 언니는 호주에서 공부하시는 아저씨와 초등학생인 딸과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 분이셨다. 내가 일하던 와가마마에서 먹는 식사 외에는 잘 만들어 먹지 않던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매일 같이 김치며 각종 반찬을 챙겨주시곤 했다. 생각해보면 일을 할 때가 호주에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을 텐데, 생각보다 그 어려움을 못 느꼈었던 걸 보면 아마도 언니가 곁에서 그만큼 잘 챙겨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나는 이 집에서 브리즈번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들과 추억을 쌓으며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 놓은 가정집 풍경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 놓은 가정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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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나라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서로 정을 나누고 산다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나는 이사를 하면서 배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집에 적응을 하는 모든 과정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 그럼으로 인해 이 모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때로는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적응을 하는가 하면, 끝끝내 견디지 못해 튕겨져 나와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거치면 거칠수록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나의 어느 한 부분이 점점 둥글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나라에서 생전 처음 만나는 누군가와 함께 한 때를 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정해진 인연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자리에 앉아
모서리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호주 남자를 바라본다.
흰 피부와 옅은 금발의 머리, 그리고 곧게 선 코.
나에게는 이렇게도 낯이 설어서,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리도 다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사람도.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그게 지극히 당연할 일일 것이라고.
내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가족과, 친구와,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와 같은 생김을 하고 있어서
그게 당연한 일 일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007년에서 2008년까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했던 내용입니다. 이 '나의 호주'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 됩니다. 사진이나 이외의 글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http://blog.naver.com/hyukibyul로 오세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그:#나의호주, #호주 워킹홀리데이, #브리즈번, #이사,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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