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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정직원이랑 알바랑 뭐가 다른 거예요?"

어린 동생들이 가끔 나에게 질문을 한다. 난들 뭐 자세히 아나. 그냥 정직원은 정해진 월급을 받고 알바는 일한 시간만큼의 시급을 받는다는 것, 정직원은 명절 떡값이 알바보다 많다는 것, 가끔 출근 전 볼일이 있을 때 정직원은 부담 없이 한 시간 정도 늦을 수 있지만 알바는 한 시간 시급이 깎인다는 것, 정직원은 여름휴가가 있지만 알바는 휴가를 보내고 싶으면 일당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다고 아는 대로 말해준다.

나는 일에 대한 계산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맡은 일 열심히 하고 월급 받으면 감사해하고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2005년 24살 때 알바를 했던 주유소의 사장 사모님 때문인 것 같다. 그때는 하루에 열두 시간 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을 쉬었다. 주유 일만 한 게 아니라 세차 일도 도왔다.

한 달에 이틀 쉬면서 일해도 손에는 최저임금

한겨울엔 자가용 삼아 끌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탈 수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집에서 10분을 헉헉거리며 정류장에 가서 좌석버스를 탄다. 전철역에서 내려 바로 오는 마을버스가 있으면 5분 내로 주유소에 도착이 가능했다. 하지만 반에 반은 운이 없어 15분을 걸어서 집에서부터 한 시간 만에 주유소에 도착한다. 그땐 지금처럼 버스정류장에 알림시스템이 없어서 무작정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거나, 아예 일찍 포기하고 빨리 걷는 게 출근시간을 지키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가도 늦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난 지각한 것이 미안해서 퇴근시간이 되도 지각한 시간만큼 더 있다가 퇴근을 했다. 어느 날은 사모님이 나한테 지각이 잦다고 뭐라고 했다. 나는 핑계지만, 출근시간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지각하면 10분 20분 그만큼 더 근무하다 가겠다고 하니 화를 내며 "어디 나라 법이 그래? 그건 너 사정이잖아. 지각하지 마"라고 딱 끊어 말을 했다. 새벽반 할아버지가 그 시간에 퇴근을 꼭 하셔야 해서 안 된다고 했다.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한 달에 네 번 쉬며 하루에 여덟 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정규직 친구들에 비해 나는 30~40만 원 적게 받던 때였다. 화가 났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나도 요령을 피워 출근시간을 딱 지키고 퇴근시간에는 손님이 많든 적든 '칼퇴근'을 했다.

어느 날은 몸이 아파서 일하는 도중에 한 시간 반을 쉬었다. 그달의 월급은 정확히 한 시간 반만큼의 시급을 제외한 금액이 들어왔다. 하루 종일 자동차 매연 마시며 '빡시게' 일하고 인정도 못 받고, 몸이 아파도 배려받을 수 없는 그곳이 '더러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뭐가 아쉬운지 사모님이 나를 몇 번이고 잡았다. 그냥 웃으며 뿌리쳤다. 마지막이니 사장이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기에 집에 가는 길에 한마디했다.

"사모님한테, 있을 때 잘하라고 하세요."

"사장님, 시급 좀 올려주세요"... "알았어, 조만간에"

2006년 초여름, 1년 정도 하던 주유소 일을 그렇게 그만두고 그해 8월쯤 피자집에 배달원으로 들어갔다. 피자메이커를 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었다. 오토바이 운전 경력이 있기에 일단 배달을 먼저 했다. 2006년 당시 최저임금보다 200원 더 많은 3300원의 시급을 받았다. 안전수당이 포함된 것치고는 시급이 많지 않았지만 '빨간 날'엔 배달 건당 300원을 쳐줘서 별 불만 없이 일했다.

3개월 뒤 피자메이커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배달원이 모자랄 땐 배달도 같이 했다. 이른바 '멀티플레이어'였다. 보통 어느 곳에서나 3개월이 지나면 시급을 올려준다. 나는 내근도 하고 배달도 하니까 꽤 오를 거라고 조금 기대를 했지만 고작 100원이 올랐다. 더 이상은 위험을 무릅쓰고 배달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내 일처럼 열심히 한 대가가 고작 100원이라니. 최저임금보다 많더라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래도 다음 달엔 더 나아지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사장은 가끔 가게에 나왔다. 난 그때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저 반년 넘게 일하고 있는데 시급 너무 짠 거 아니에요? 가끔 배달도 하는데."
"알았어. 조만간에 올려줄게."
"사장님 저번에도 그러셨잖아요! 요번엔 좀 팍팍 올려줘요! 3800원으로요! 네?"
"알았어. 조만간에 올려준다니깐~."

매번 그런 식으로 대답만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 달 월급 들어온 걸 계산해보니 3700원이었다. 거 참…. 어이가 없었다. 물론 사장님 눈으로 날 봤을 때 그만큼의 값어치가 없다 생각했겠지만 난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바가 아니라 정직원으로 일하게 해달라고 하면 뭐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안 된다고만 했다. 나중에야 그 까닭 중에 4대보험 부담금 때문도 있다는 걸 알았다.

결국 일한 지 1년을 갓 지난 2007년 10월 말, 그 피자집을 그만두게 됐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만둔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서 다른 피자집에서 정직원으로 일을 하게 됐다. 좋은 사장님을 만난 덕에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월급을 받게 돼서 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일을 계산하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는 말에 대한 관심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별 어려움 없이 일하다 2009년 9월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하루아침에 78명을... 잘려나간 남편의 동료들

피자집에서 일하는 필자의 모습
 피자집에서 일하는 필자의 모습
ⓒ 신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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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뒤 2010년 6월에 신랑이 태양광 반도체 회사의 하청업체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하게 됐다. 1년에 두 번 비정규직들 가운데 정규직 직원을 채용한다고 했다. 신랑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지난가을, 네 번째 타는 월급이 제 날짜에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 자금이 안 돌고 있다는 까닭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윗사람들이 하는 조만간에 준다는 말만 믿고 묵묵히 일했지만 신랑은 그렇지 않았다. 직접 사무실을 찾아가서 월급을 언제 줄 건지 날짜를 밝히라고 했다. 약속을 받아냈지만 회사는 또 날짜를 어겼다. 신랑은 총대를 메고 다시 한 번 찾아가서 약속을 받아냈다. 결국 열흘 뒤에 입금이 됐다.

그 뒤로 올해 1월 정규직 채용 공지가 떴다. 신랑 이름은 없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마디로 신랑이 너무 '나댔기' 때문일 거라는 말들을 했다. 동료들에겐 좋지만 윗사람들 눈에는 거슬렸나 보다. 아직 노조가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나댈 수밖에 없었다. 주임이 사원한테 일 시키기가 불편할 정도라 하니 신랑이 많이 딱딱하게 한 것 같기도 하다. 신랑은 열심히 한 대가가 이런 거냐며 술을 많이 마셨다.

하지만 친한 상사의 설득에 계속 일을 하게 됐다. 더 이상 윗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일했다. 그리고 지난 7월 또 정규직 채용 공지가 떴다. 남편은 정규직이 됐다. 나는 엄청 기뻤지만 신랑은 기쁜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 정규직이 되지 못해 실망한 몇몇 동료들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분위기가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동료들을 보내고 일을 해야만 했다. 남편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비정규직 78명이 전부 잘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회사가 수익률을 70% 이상 올려야 무난히 운영이 된다치면 9월에는 69%밖에 못 얻었기 때문이란다. 그 1%가 비정규직 78명의 월급이라고 했다. 그 돈을 주고 나면 적자가 난다는 까닭으로 한 번에 그 많은 인원이 잘리게 됐다.

마지막 배려로 일이 많은 10월 7일까지 근무를 해주면 모두에게 150만 원씩을 준다고 했단다. 참 대단한 배려 해주네. 하루아침에 잘린 사람에게도, 회사에 남은 사람에게도 너무 비참한 현실인 것 같다. 신랑은 그 뒤로 회사에서 일하는 낙이 없다고 한다. 힘들어도 같이 웃고 떠들며 서로한테 힘을 주던 동료들을 하루아침에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에 너무 힘겨워 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남편이 정직원이 되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바 시절에 농담 삼아 시급 안 올려주면 데모할 거라고 했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번 일로 인해 그냥 보고 지나치던 비정규직에 관한 뉴스를 다시 관심 깊게 보게 됐다.

비정규직 팔자는 사장 만나기 나름인가

나는 올해 2월, 예전에 일하던 '마음 좋은 사장님'이 있는 피자집에 다시 들어갔다. 남편이 첫 번째 정규직 채용에서 탈락한 직후였다. 사실 나는 일을 쉬고 있던 1년 반 동안 짬짬이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전에 일하던 피자집 사장님한테 다시 일하게 해달라고 한 번씩 얘기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정규직이었지만 이번에 들어갈 때는 알바로 들어갔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평일에만 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별 불만 없이 피자메이커 일을 하고 있다. 나처럼 알바로 일하는 여동생들은 시급이 너무 적은 게 아니냐며 투정을 부린다. 그럴 만도 하다. 나이도 어린 녀석들이 편히 앉아 있을 시간도 없이 내내 서서 피자를 만들려니 힘들 것이다. "야,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사장님이 안 올려주겠냐. 한가할 때 눈치 보지 말고 팍팍 쉬어! 어디 힘들어? 안마해줄까?"라며 웃음으로 위로한다.

피자집은 주말에 더 바쁜데도 사장님이 나는 평일에만 근무할 수 있게 해줘서 매우 황송하다. 어쩌면 너무 욕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문득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살기 위해서는 '운 좋게' 사장님을 잘 만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지, 새삼 답답한 마음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 추운 겨울이 온다. 피자 빵을 넓게 펴려면 옥수수 가루가 필요한데, 옥수수 가루는 피부를 건조하게 만든다. 이제 곧 내 양손은 피부가 건조해져서 갈라지고 피가 나겠지. 하지만 아파도 참으며 일해야 한다. 사장님이 사준 핸드크림을 열심히 바르면서.


태그:#비정규직,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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