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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이 다되어 가니 이직 할수록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해야 합니다.
▲ 작업 장갑 나이 50이 다되어 가니 이직 할수록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해야 합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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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 나이 마흔여덟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특별히 잘하는 기술도 없었기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첫 일자리가 현대조선소(현재 현대중공업) 사환이었습니다. 사무직 사원들 심부름 해주는 게 주된 일거리였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소에 들어가려면 용접, 취부, 샌딩, 도장 같은 기술이나 자격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조선소 사환으로 다니면서 현대공고 야간반 학급에 진학해 3년간 다녔습니다. 그러나 기계조작과 기술연마에 영 소질이 없던 저는 아무 자격증도 따지 못했습니다.

저처럼 중졸자 중 백여 명이 넘는 이들이 낮엔 일하고 오후 6시부터 10시경까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야간반 학급에 다녔습니다. 그 중에도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3년 동안 여러가지 자격증을 따기도 했고, 어떤 동기는 대학에도 진학했습니다.

야간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사환으로 들어간 이들은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자격증 가진 동기는 현장으로 가고 아무 자격증 없는 몇몇은 그만 두게 됩니다. 저도 조선소를 그만 두었습니다.

야간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의 생각에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그 사이 나이가 차서 국가에서 신체검사 받으러 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본적이 강원도라 평창까지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방위 판정을 받은 저는 그 해 3월(1985년) 울산 집 근처에 있는 부대에 귀속되어 방위병으로 14개월 복무 후 소집해제되었습니다

방위병 소집해제 후 저는 야간업소에서 일했습니다. 조용필이라는 가수를 보면서 저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수로 성공해서 오겠다며 서울로 가출도 했습니다. 그 때 인간극장에도 나오고 어느 방송인 도움으로 음반까지 낸 김소희라는 누나 뻘 되는 분을 찾아 가기도 했습니다. 야간업소 따라 다니며 노래 하는 모습도 보고 그 누나 집에 같이 가 하룻밤 신세도 졌습니다. 지금은 어찌 살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영등포역 근처 한 식당에 취직해 가수되는 길이 없나 알아봤지만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서울 간 지 1년여 만에 알게 됐습니다. 저는 서울로 가출한 지 1년도 안 되어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울산 집으로 내려 왔습니다.

"창기야, 너도 이제 나이 찼으니 진득허니 직장이나 구해서 다니거라."

10년 동안 가구제조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근무

서울서 내려온 저는 다시 한동안 백수로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직장 구해 다니라 채근했지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저는 뭘 해 먹고 살아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중 현대종합목재라는 가구제조 회사에서 단순 노무직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면접도 보고 기다렸습니다.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고 그때부터 10여 년 동안 정규직으로 다녔습니다. 1988년 1월 20일 입사해서 1998년 말까지 다녔으니까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울산 공장에 있다가 부산 영업소 갔다가 다시 용인공장으로 전출을 갔습니다. 1990년 후반부터 국가 경제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면서 가구제조업체인 우리회사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때 저도 더이상 희망 없는 기업에 다니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했고, 퇴직했습니다.

용인공장에서 희망퇴직한 저는 동네 꿀벌 치는 분의 도움을 받아 퇴직금 탄 돈으로 꿀벌 20여 통을 샀습니다. 하지만 멋 모르고 시작한 꿀벌 치기는 금방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장 수입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족 생계비는 매월 들어가는데 꿀벌 치는 일은 세월이 흘러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시골서 살고 싶었으나 시골서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결국 가족 생계가 어려워 서울로 이사를 갔습니다.

'서울은 크고 넓으니 우리 가족 먹고 살 자리 하나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전세 3000만 원짜리를 얻었습니다. 1년 후 다시 사당동 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저는 단순노동이 가능한 일자리를 찾아 보았습니다. '벼룩시장'을 매일 가져다 뒤졌으나 별다른 업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IMF라는 생소한 영어가 많이 들려 왔습니다. 잘 나가던 금융기관이 파산하거나 합병되었습니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다 세상 망하는 거 아닌가'하고 걱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날 '교차로' 등 무료신문을 뒤지다 은행 청원경찰을 뽑는다는 광고를 봤습니다. 은행이 아니라 파견업체였고 저는 파견된 하청노동자였습니다. 가족 생계가 달린 문제라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압구정에 있는 평화은행에 출근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 평화은행은 다른 은행과 합병했고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다시 일자리를 잃고 기다리다가 다른 은행으로 가서 청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파견직이라 어딜 가나 70만 원이 한 달 월급이었습니다. 아내는 그것으로 서울서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말했지만 그나마도 벌지 않으면 입에 풀칠도 못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서 70만 원 월급을 받으며 청원경찰 생활을 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아이들은 자꾸 커갔고 생활비는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아내는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생활비를 보충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서 이렇게 벌어 가지고는 도무지 안 되겠다. 울산 다시 내려가자."

결국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울산으로

답답해 하던 아내가 결국 서울 생활 접자고 했습니다. 그때가 2000년 5월경. 울산엔 허름한 연립주택를 장만해 두었습니다. 알뜰한 아내가 그나마라도 장만해 둔 게 다행이었습니다. 저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어렵더라도 서울서 한 번 버텨볼 것인가 아니면 서울 생활 접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 갈 것인가. 결국, 서울 생활을 접기로 했습니다. 기술도 학벌도 돈도 없는 저에겐 서울 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울산 살던 집으로 가게 됩니다.

2000년 5월 중순에 울산으로 내려와 다른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면서 일자리 있으면 좀 알선해 달라 부탁도 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5월을 보내고 6월을 보냈습니다. 노동부 고용센터에서 하는 취업박람회에 갔다가 취업 기회를 잡았습니다.

"우리 회사 들어 와 한번 일 해 볼래요? 현대자동차 사내 협력업체이고 이제 새로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합니다."

박람회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당장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주·야간도 좋고 특근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닌 지 10년이 다 돼 가던 어느날 구조조정이 일어났습니다. 단종되는 공정을 없애고 새로운 기계를 들여 놓는 공사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2000년 7월 3일부터 시작해서 10여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왔는데 저더러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허탈했습니다. 정규직은 새공정 완료될 때까지 월급을 받으며 휴가를 보내게 했지만, 비정규직인 저에겐 무급휴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정리해고 시켜 버렸습니다.

2010년 3월 15일 그렇게 저는 정리해고 되었습니다. 울산이 싫어졌습니다.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마침 인터넷 카페 모임을 통해 제주도에 살고 있는 분을 알게 됐습니다.  "제주도로 귀농하고 싶은데 좀 도와 주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그 분이 도와 주겠다고 했습니다. 같은 해 4월 2일 또다시 무작정 제주도로 날아 갔습니다. 제주도 서귀포 쪽에 있는 농업연구원에서 실시하는 귀농교육도 100시간 받으면서 귀농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힘들어졌습니다. 우선 가족과 따로 살아야 하는게 문제였습니다. 가족이 모두 제주도로 이주했다면 뭐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족은 울산에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생활비를 벌어 보내야 할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생활비를 이중으로 들여야 하는 꼴이 됐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농업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농촌 현실에 눈뜨면서 '돈 없이는 귀농도 어렵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개월 만인 같은해 7월 2일 제주 귀농의 꿈을 접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울산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일자리를 알아봤습니다.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그것도 잠시, 다시 그만 두었습니다. 다른 일자리도 알아 보았으나 하청의 하청인 2차, 3차 하청뿐이었습니다. 단순반복하는 일에만 길들여진 저는 복잡한 일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습니다.

노동조합이 없는 중소 하청업체는 회사 마음대로 작업시간을 늘려 일을 시켰습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 30분까지 출근해 오후 8시 30분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쉼 없이 기계처럼 일하는 그곳에 적응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출근을 중단했습니다.

저는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판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서울 양재동 본사 앞 상경 집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 현대차 본사 서울 양재동 본사 앞 상경 집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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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에서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판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최병승이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이 대법원까지 올라간 '해고무효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 건'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사용사업주가 2년을 초과하여 계속적으로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2년의 기간이 만료된 날의 다음날부터 파견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본다"는 근로자 파견법(1998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법률)에 따라 파견근로자로 인정받았습니다. 2000년 7월에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에 입사한 저는 최병승 조합원과 같은 내용으로 현재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저는 가족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6개월짜리 계약직 일자리를 찾아 임시로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1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다시 5개월 후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이직을 해야만 합니다. 하기 싫어도 계약만료되면 어쩔수 없이 그 일자리를 내놓아야만 합니다. 그게 냉엄한 현실이니까요. 이젠 이곳저곳 직장 찾아 다니는게 지긋지긋합니다. 현대자동차가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저를 포함한 비정규직을 모두 직접고용 시켜줬으면 좋겠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인정한 불법파견인데 현대자동차는 왜 외면하고 방치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날 저는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못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놀 때 보니 운동화 바닥이 벌어져 너덜거리고 있었습니다. 새 운동화 한 켤레 사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사주는 아비 심정을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알까요?

현대자동차 측으로부터 정리해고 당하고 복직요구를 하고 있는지 1년하고도 2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자동차에서 직접 고용으로 다시 들어가 정년 퇴직때까지 일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더 나은 보수, 더 나은 일자리 때문에 이직을 한다지만 저는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는 일이 힘겹기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직 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 입니다.



태그:#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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