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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나려, 길과 걸으려 길을 떠났다. 옅은 황사가 허공에 뿌려져 약간은 흐릿한 봄날이었다. 내 발바닥과 다리와 시선이 생전 처음으로 만나게 될 생소한 길을 찾아 나서는 느낌은 늘 그랬듯이 한사코 두근거렸다.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오랜만에 손수 운전대를 잡지 않고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해방감 바로 그것이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산의 능선과 외형이 가깝고도 멀리 굽이치며 신비롭게 겹쳐 보였다. 초록의 색소를 풀어놓은 듯 비색의 물이 담긴 충주호도 고요한 자태로 그곳에 있었다. 산과, 물과, 때때로 그것들을 휘감고 보듬는 의연한 포용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하(山河)가 기꺼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충주 '동량'의 외딴 곳으로 향하는 굴곡진 도로 위에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길에 대해 생각했고, 길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어머니 같은 자연을 생각했다. 그 길을 친구처럼, 가족처럼 함께 동행 하며 허물없이 걸어갈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더불어 그들과 내가 살아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삶의 역사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길을 걸으며 길에게 길을 묻고 싶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길,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의 희망과 단결, 사랑과 분노에 대해 묻고 싶었다. 길이 가진 오묘한 정체성과 본질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도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물어보고 싶었다.

 

길은 나에게,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그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돈되지 못한 온갖 소소한 잡탕 지식들을 총동원하여 애써 주절거려 보지만 이내 머뭇거려지는 초라한 한계.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기어코 길에게 길을 물었다. 그렇게 길을 물으며 걷고자 하였다.

 

"길은 떠남의 공간이자 돌아옴의 공간이다. 또 지향의 공간인 동시에 한걸음 뒤로 물러선 자기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길은 설렘으로, 이미 지나온 길은 추억으로 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사전적 의미가 보여주듯, 상호 소통의 트인 공간이다"...<한태문-부산대 국문과 교수의 글 중에서...>

 

그런 것 같다. 길은 떠남과 돌아옴의 공간, 소통의 공간, 자기성찰의 공간, 설렘과 추억의 공간. 길이 가진 다양하고 광범위한 실체적 연관의 포괄성은 가히 위대하고 거룩하다.

 

길에서 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착해지고 겸손해진다. 가슴 속에 있는 따뜻한 사람의 정이 저절로 발현된다. 연둣빛 봄 색으로 고개를 내민 이름 없는 한 포기 풀을 보며 우리는 자연이 가진 고결한 생명성과 창조성을 체험하게 된다. 고요하고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스스로 철학자가 되고, 부드럽고 온화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감사하게 된다. 게다가 한 줄기 땀방울이 이마에 흐를 때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산 그림자 그늘 속은 또 시원한 휴식처가 된다.

 

충주 동량의 하천면 지동초(폐교를 손 본 곳)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했다. 충주호 리조트를 지나 뒤꼍으로 난 '동량 하천 산척 정암'간 임도를 만나 걸음을 한발 한발 가볍게 내딛었다. 우리는 어우러져 걸었고, 서로 마음으로 사랑하며 걸었다. 길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눈빛으로 서로가 가진 행복한 기운을 주고받았다. 길에서 우리는 그렇게 가족처럼 평화롭게 걸었다.

 

길에서 만난 버들강아지, 생강나무 꽃봉오리는 봄의 싱그러운 기운을 머금어 금방이라도 피어날 것처럼 귀엽고 앙증맞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길가에 늘어선 키 큰 오동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의 아파트와 식당이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층층이 많았다. 멀리 건너편에는 날씬한 몸매에 하얀 옷을 입은 자작나무들의 마을이 있었다. 맵시 있게 무리를 지어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의 모습은 어쩐지 느낌이 환상적으로 새로웠다.

 

길가에 바짝 엎드려 돋아난 냉이와 쑥, 민들레 로제트. 걸으며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 속에 봄기운이 차오르는 듯 싱그러웠다. 길을 걸으며 산 아래로 보이는 초록물빛 충주호의 비경을 감상하느라 갈수록 걸음은 느려졌지만, 마음은 한 층 여유로웠다.

 

임도를 걸어 내려와 산 속에 고스란히 안겨있는 '정암마을'을 지났다. 사람 사는 집이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마을. 눈앞에 호수가 있고, 사과나무 빽빽한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 그 곳은 평화로운 오지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그릇 속에 포근하게 담겨진 사람의 마을이었다. 

 

길에서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람이 교감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육체의 발바닥과 눈을 거쳐 마음속으로, 아니 영혼 속으로 스며오는 알 수 없는 기쁨은 충만함이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길을 누리며 걸었다. 길에서 살가운 바람을 만났고, 예쁜 '노랑턱멧새'도 만났다. 그렇게 걸으며 길에게 길을 물었더니 길은 그 물음에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걸어가라'. 그게 모든 전부였다.   

 

삼탄역 삼거리 '명돌마을'에 도착했다. 충북선 간이역인 삼탄역 근처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초록의 물빛이 유유히 흐르는 삼탄천 위로 철로가 살아있는 한 아마도 기차는 쉼 없이 달릴 것이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길을 행복하게 걸을 수 있게 하신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걸음을 마무리했다.

 

길은 우리 삶의 수단이며 소통의 모세혈관이다. 시원스레 뻗은 대로의 줄기 앞에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숲 속에 난 작은 길, 산허리 언덕의 거친 자갈길, 들녘을 가르는 고요하고 평온한 길...감히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시간의 발자국이 만들어낸 오롯한 길 위로 우리의 삶은 길손이 되어 바람처럼 또다시 여정을 떠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고양올레>모임에서 지난 3월 19~20일 충주 동량면 하천리 ~ 산척면 정암마을 ~ 명돌마을 까지 약 12.5km 도보여행 겸 모꼬지를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고양올레, #고양올레 걷기, #고양 누리길, #충주 정암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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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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