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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유래 속에 담긴 신라불교

절이라는 말의 유래는 '모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모례'란 말이 '털례'를 한자말 반 우리말 반 섞어서 만드는 신라식 단어인 거죠. 그러니까 털례는 털네즉, 털이네 집이란 뜻이고, 여기서 '털'이 '절'로 바뀐 것이라는 거죠. 일본어에서 절이 '테라'인데 이것도 역시 '털례'에서 나온 거라고 합니다.

모례가 절의 기원이 된 까닭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습니다. 묵호자라는 고구려인이 신라에 포교를 하러 왔으나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고, 모례란 사람이 그를 숨겨줘서 그 집에 굴을 파고 포교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모례네 집에 대한 이야기는 신라 미추왕 때부터 나옵니다. 이때 아도화상이 모례네 집에 머물렀다고 하고, 눌지왕 때 묵호자도 모례네 집에서 머물렀고, 심지어 법흥왕 때 묵호자도 모례네 집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례네 집은 모례란 사람의 집이 아니라 절이란 말이었습니다.

신라불교의 첫 도래지인 모례네집에 있는 우물의 예전 모습
▲ 모례네 집 우물 신라불교의 첫 도래지인 모례네집에 있는 우물의 예전 모습
ⓒ 구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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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자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검은 물을 들인 옷을 입은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호자'란 말이 붙은 것은 아무래도 생김새가 신라인들과 다른 뚜렷한 이방인의 모습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불교 포교승들이 인도에서 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인도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은 묵호자로 같아도 그때그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출신 성분이 확실하게 알려진 묵호자는 눌지왕 때 묵호자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고구려에 머물렀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떠나는데, 그 여인이 나중에 낳은 아들이 묵호자입니다. 묵호자는 아버지를 찾으러 중국으로 갔다가 승려가 되어 돌아와 다시 신라로 포교여행을 온 것이지요.

모례네 집 이야기와 묵호자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의 근거가 되는데요, 바로 신라가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호자는 언제나 비밀 법회를 열어야 했고, 그 장소가 모례네 집인 것이지요. 고구려도 백제도 불교는 전래되자마자 받아들여졌습니다만 신라에서만 유독 불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불교가 신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지만 왕실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승려들은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들의 영원한 복을 빌어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왕실에서였을 뿐이었지요. 다른 귀족들이나 신라 사람들 눈에 그것은 단지 왕실에서 모시는 산신령 중 하나로 보였을 뿐입니다.

신라가 오랫동안 고대국가로 나아가지 못했던 까닭은 귀족들의 힘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데요, 이들의 힘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숲이 가진 신성한 권력이었습니다. 신라는 그래서 신화의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숲은 삼한시대의 신성한 소도와 같았습니다. 신라는 가장 뒤떨어져서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까닭에 이 신성한 숲의 권력을 누를 이데올로기가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라의 왕권을 독점하기 시작한 김씨 가문의 힘도 계림이라는 숲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이 처음으로 독점한 시기를 마립간시기라고 하는데, 이때 이 숲의 신성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금관입니다.

숲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 신라 금관 숲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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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시기는 마립간 즉 칸 중에서 제일 높다는 의미의 마루=마립인 간 혹은 칸이 지배하던 시대를 의미하니까 이때에 이르러 김씨가문은 다른 귀족보다 우월해졌던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왕은 아닙니다. 사로국을 이룬 6촌장들의 모임인 화백회의에서 임금을 추대했던 이사금시기보다는 권력이 집중된 시기였지만 여전히 칸 중의 칸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칸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던 시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화려한 금치장물들은 이시대의 것입니다.

왕과 마립간의 차이는 법률에 있습니다. 마립간시대에 형벌의 권리와 인신구속의 권리는 그 지역의 칸이기도 한 귀족에게 있었습니다. 이 권리가 왕에게 넘어간 것은 왕이 그만큼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만이 하늘이 내린 신성한 권리를 대신하여 사람을 벌주고 가두고 죽일 권리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이 권리를 순순히 내놓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숲의 힘을 빌어 신성한 하늘의 권리의 대리자들이었습니다.

이차돈의 순교

마립간 시대를 끝내고 왕의 시대를 연 첫 임금인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시킴으로써 인신구속의 권리를 귀족들에게서 빼앗았습니다. 더군다나 이해에 대대적으로 보급된 우경은 신라 농촌공동체 사회를 붕괴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경이 보급되기 전 농촌의 생산력은 너무 낮아서 집단적 협동농업만이 유일한 살길이었습니다. 생산도구 없이 사람의 협동만으로 잉카문명을 만들었던 것이 청동기사회의 협동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는 지역공동체의 수장의 힘이 절대적입니다. 이 공동체에서 쫓겨나면 끝장이니까요.

우경이 보급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공동체의 간섭이 거추장스럽게 되면서 이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해줄 왕의 출현을 반기게 된 것이지요. 이들에 의해 점점 왕권은 강화되기 시작하고, 고대사회는 붕괴되어갑니다.

법흥왕은 이런 지역공동체의 붕괴에 기름을 부었는데요. 대대적인 저수지 정비작업을 단행합니다. 물론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을 통제한 것도 왕실이었고, 만들어진 저수지의 소유권도 왕실이 갖습니다. 물을 손에 쥔 자가 세상을 손에 쥐는 곳이 농업사회였으니 귀족들의 신성한 권리는 차츰 수족이 잘려나간 채 마지막 보루인 이데올로기만 남은 것이었지요. 이들을 보호하는 산신령만 몰아내면 완벽하게 신라는 왕실의 통제아래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마립간시기가 시작될 때부터였습니다. 고구려의 힘을 등에 업고 김씨가문이 마립간이 되었으니 고구려의 문명이 휘몰아쳐 들어오면서 불교도 유입된 것이지요. 그것이 오랫동안 신라에 불교의 포교를 방해했습니다. 귀족들은 마립간의 힘에 대한 자기보호본능으로 인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이지요.

법흥왕은 법률을 발표했지만 그 법률의 이데올로기, 즉 신성한 하늘의 권리가 왕에게 없는 상황을 타개해야 했습니다. 이때 열렬한 종교적 신념의 소유자인 이차돈이 엄청난 일을 벌이고 맙니다. 바로 귀족들의 성스런 숲인 천경림을 파괴한 것이지요.

이것은 귀족들을 격분시켰습니다. 천경림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고, 귀족들을 보호하는 산신령의 근거지였습니다. 만일에 법흥왕이 직접 건드렸다면 역풍에 왕실이 무너질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당연히 이차돈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고,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날 흰우윳빛 피가 솟구쳤는지, 혹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그것의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그 일을 계기로 귀족들은 불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뒷면에는 순교 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비의 건립연대는 817년(헌덕왕 9)으로 추정된다.
▲ 이차돈 순교비 뒷면에는 순교 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비의 건립연대는 817년(헌덕왕 9)으로 추정된다.
ⓒ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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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귀족들은 신라왕실에 협력하지 않으면 고립되는 상황을 앞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차돈의 순교가 벌여졌고, 그것은 그들을 벌벌 떨게 한 것입니다. 왕이 기꺼이 자기 측근을 벌 줄 정도로 엄하고 엄한 법률의 정의. 그 매서운 칼날을 보면서 최후의 방어막을 스스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차돈이 순교 후 신라에는 상대등이 설치되었는데요, 상대등은 귀족이 추대하고 왕이 임명하는 재상입니다. 과거 이 역할은 왕의 몫이었습니다. 귀족회의의 수장일 뿐이었던 마립간시대는 상대등의 설치와 함께 실질적으로 왕의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김부식은 지증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했지만 그를 지증마립간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성스러운 숲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서 그곳에다 흥륜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만 이 절에 기거한 승려들은 대부분 천경림에서 산신령에게 예배하던 무속인들이었습니다. 기묘한 절충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차돈은 왕과 귀족간의 절묘한 타협을 이끌어낸 촉매제 구실을 한 것이지요. 흥륜사는 오래도록 무속의 본거지이고, 도깨비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일부 귀족들과 들은 여전히 불교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여전히 불교는 왕실불교였던 셈이지요.

그렇지만 이차돈의 순교가 가져 온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변화는 이때부터 신라가 '중고기'로 접어들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신성한 혈통'의 시대. 중고기는 바로 그런 신성한 혈통의 시대입니다.

이 혈통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불교가 부여한 혈통,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혈통인 '성골'의 시대인 것이지요. 그래서 중고기 신라왕들의 왕호는 불교식이며, 신라 역사상 유일하게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시대입니다. 부처의 혈통을 가진 가문이 중국이나 고구려의 연호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혈통의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상징물 제작에 열을 올렸던 때가 중고기이기도 합니다. 신라 3보라고 일컬어지는 장육존상, 옥대, 황룡사 9층석탑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첨성대까지 만들어지게 됩니다. 혈통이 위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아름다운 건축물은 거듭거듭 만들어집니다. '위기는 건축을 낳는 법'인가 봅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를 전통식 왕명의 시대인 상고기, 불교식 왕호의 시대인 중고기, 중국식 시호의 시대인 하고기로 나눕니다. 중고기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때까지로 성골왕의 시대입니다.)

원광의 대승불교

왕실불교는 오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과 유착한 종교는 내부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원광이 살던 시대 신라의 모습이었습니다.

원광은 어릴적부터 지적호기심이 남달리 강했습니다. 노자, 장자, 석가 등 수많은 사상들을 두루 섭렵하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광이 머물던 삼기산에 어느 승려가 암자를 짓고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갔지만 그 승려는 원광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수행만 할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만한 모습에 실망하여 돌아왔지요.

그 승려에게 실망하고 분개한 사람이 원광만은 아니었나봅니다. 암자가 사람들의 통행을 버젓이 막고 있어서 항의했는데도 승려는 못들은 척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불경을 외우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시끄러워 마을 사람들이 다시 항의했습니다만 여전히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성난 마을사람들에 의해 암자는 파괴되었습니다. 원광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암자 속에서 왕실의 보호아래 오만해진 불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국립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왕실은 정책적으로 승려들을 유학시켜 지식인으로 키웠습니다. 승려들은 지적인 독선과 권력을 등에 업은 오만으로 백성들을 불편하게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배척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광법사와 검은여우'이야기입니다. 여우는 귀신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며, 죽을 때는 반드시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하고 죽음으로써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조상숭배의 상징적 동물입니다. 설화에서 여우는 일반 백성들의 대변자입니다.)

이후 원광은 중국으로 떠납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학문을 닦아 지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수나라에 의한 통일전쟁시기였습니다. 전쟁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 고통을 바라보며 출가를 결심하고 승려가 됩니다. 학문은 자신의 구원보다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 후 원광은 수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이름난 승려가 되었습니다.

600년, 원광은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광은 다른 승려들과 확실하게 달랐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을 다 존중했습니다. 유교,불교,도교를 아울렀으며 심지어 전통신앙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가 삼기산에서 본 것은 전통신앙과 불교의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신라의 지방은 여전히 전통신앙을 믿고 있었는데 승려들은 경주출신이거나 유학파들이 많아서 굉장히 자부심이 강해 둘은 융합하지 못했습니다. 원광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백성을 무릎 꿇리는 불교를 버리고,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이 모시는 신령님의 이야기까지 들어주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뒤떨어진 나라였던 신라가 중고기 국가적 위기속에서도 똘똘 뭉쳐 삼국통일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스스로 낮은 데로 내려온 원광의 불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불교를 더 일찍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사찰이나 탑이 남아있는 곳은 딸랑 수도뿐입니다. 그들의 불교는 귀족불교로 왕실과 돈 많은 귀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어줬습니다. 그에 비해 신라의 불교가 마을마다 풍성했던 것은 이렇게 스스로 낮은 데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부러움을 사고 있는 북유럽의 복지제도의 바탕에는 기독교적 사랑이 있었습니다. 신라불교가 절대적으로 강력했던 것도 이런 사랑을 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삼국 중 사원을 중심으로 한 민간 의료와 교육, 구휼에 앞장섰던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직접 수레위에 약과 의사를 데리고 먼 변방에 소외된 백성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불교의 신성한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통령을 무릎 꿇리게 한 조찬기도회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그래서인지 원광의 이야기가 더욱 새롭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출 줄 알았기 때문에 사회통합의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태그:#대승불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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