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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도 봄이 오지 않았던 지난 5일 식목일. 남쪽에는 꽃이 피었으리라 기대하면서 KTX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한 유물을 만날 예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사람들은 제가 어디로 왜 가는지를 묻고는 한결같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
"익산"
"익산? 뭐 때문에?"
"화장실보러."
"화장실?"

전국에 있는 이러저러한 박물관을 찾아 떠나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모두들 달랐습니다. 그도 그럴 법은 합니다. 화장실이라니! 익산에 있는 화장실이 특별한 이유는 1400년전 백제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비밀의 문을 찾아 익산에 도착했습니다만 흐드러지게 맞아줄 것 같은 봄꽃은 보이지 않았고, 봄먼지만이 반겼습니다. 아득한 봄날의 먼지 속에 백제 무왕시대에 있었던 진실이 숨겨져 있겠지요.

시작은 지난 2009년 1월 14일에 벌어진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라진 왕국 백제의 처연함을 닮은 듯 허물어지고 시멘트로 덧입혀져 흉하게 내버려진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보수 복원하기로 결정한 것이 1998년. 2014년까지 예정된 길고긴 작업이 무르익어 이 해체 작업이 마무리되던 그날, 그러니까 2009년 1월 14일에 석탑 내부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습니다.

석탑 해체조사 중 2009년 1월 14일 1층 내부 적심부재와 심주석을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은 미륵사지석탑 1층 제1단 심주석 상면에 마련된 사리공 내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사리장엄 석탑 해체조사 중 2009년 1월 14일 1층 내부 적심부재와 심주석을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은 미륵사지석탑 1층 제1단 심주석 상면에 마련된 사리공 내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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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석탑이 만들어진 까닭이 사리유물을 석탑 중심에 넣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이니 그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예상대로 사리공안에는 사리장엄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리장엄
사리장엄은 사리를 담은 병과 함 그리고 사리를 봉안한 이야기를 담은 봉안기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삼국시대까지 불교에서 예배대상은 사리가 봉안된 탑이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데서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는 자신을 위해 그 어떠한 성전이나 상징물도 짓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탑만은 허락했다고 합니다. 이후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은 예배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불교가 이웃 아시아로 퍼지면서 석가의 사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대신에 다른 사람의 사리나 불경, 작은 불탑이나 불상 등과 같이 불교를 상징하는 것들을 넣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법신사리라고 하는데 진짜 석가의 사리인 진신사리와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탑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부속물인 절까지 만들었으니까 어지간한 경제력을 갖지 않는 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 절은 대부분 왕왕족들만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탑 안에 자기 가족의 사리를 넣어 죽은 가족과 그 후손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리는 특별한 혈통, 부처와 동급이거나 부처가 될 예정이거나 이미 그러했던 가문을 상징합니다.  

이후 불교가 대중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에 의해서도 사찰이 만들어질 정도가 되면서 돈이 많이 드는 불탑신앙은 차츰 불상과 부도로 바뀌어갔습니다. 불상은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집약시켜 표현해 형상화한 까닭에 시대와 사찰의 존재목적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리장엄을 봉안하는 전통도 불상 안에 복장물을 넣어 마감하는 형태로 변화합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왕후가 왕에게 졸라서 원래 못이었던 자리를 메워서 세운 절입니다. 발굴 과정에서 연못 흔적까지 나왔기 때문에 이 사실을 기록한 <삼국유사>속의 설화가 단순한 창작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덕분에 <삼국유사>의 역사적 가치도 높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집어 버린 94개의 글자. 미륵사를 세운 백제 왕후가 사택적덕이라는 귀족의 딸이라는 사실이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커다란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 대로라면 그 왕후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신라 진평왕의 딸과 백제 무왕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대위기를 맞았습니다. 도대체 선화공주는 누구일까요?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에는 가로 15.3cm, 세로 10.3cm의 그다지 크지 않은 금속판이 있었다. 이 금제 사리봉안기에 적힌 글자 속에는 엄청난 사실이 들어있었다.
▲ 금제 사리봉안기 뒷면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에는 가로 15.3cm, 세로 10.3cm의 그다지 크지 않은 금속판이 있었다. 이 금제 사리봉안기에 적힌 글자 속에는 엄청난 사실이 들어있었다.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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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의 위기

<삼국유사>에 나온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서동은 금으로 진평왕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것이 다시 백제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위에 올랐다.'

여기서 진실만을 뽑아내면 이렇게 됩니다.

'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신기한 것은 서동이와 금 얘기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서동이 살던 뒷산은 금덩이 다섯 개를 주웠다는 곳으로 이후 오금산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서동이 말한 금은 돌과 같은 덩어리 금이 아닙니다. 바로 앞 김제는 '금과 벽골제'의 고장이라 지어진 이름입니다. 여기서 나는 금은 돌과 같은 금이 아니라 사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흙처럼 쌓여 있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서동이 말한 금은 실제로 존재했던 금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딱딱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선화공주는 누구일까요?

이 이야기에서 선화공주의 정체를 밝혀주는 단서는 딱 하나있습니다. 금이 가치 있는 물건이란 것을 서동에게 말해주었고, 그래서 서동이 금을 장악하게 해준 사람이 선화공주란 사실이지요. 익산에 사는 촌놈 서동이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치게 한 것이 금. 이 금이 서동설화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인 것입니다.

설화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은유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이것을 증명하듯 설화속 이야기대로 발견되었던 미륵사 앞 연못.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 미륵사 앞 연못 설화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은유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이것을 증명하듯 설화속 이야기대로 발견되었던 미륵사 앞 연못.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 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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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의 진실

왕궁은 해발 40m내외의 구릉에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폭 3m, 남북 490m, 동서 240m의 장방형 담장을 둘렀다. 왕궁내부는 1:1또는 2:1의 비율로 공간을 분할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왕궁리 유적 모형 왕궁은 해발 40m내외의 구릉에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폭 3m, 남북 490m, 동서 240m의 장방형 담장을 둘렀다. 왕궁내부는 1:1또는 2:1의 비율로 공간을 분할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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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의 진실을 밝혀 줄 장소. 그곳이 백제 무왕, 즉 서동이 임금이 된 후에 익산에 지었다고 알려진 왕궁리 유적입니다.  '왕궁'이 있었던 곳이란 것은 이 이름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왕궁리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까요. 이곳에는 확실히 왕궁이 세워져서 마무리 공사까지 마쳤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왕궁은 백제 궁궐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규모도 배치도 완벽하게 황제의 거처였습니다. 인공 못을 만들거나 괴석을 이용하여 자연과 어울리게 만들어진 후원까지 과연 궁남지를 지었고, 왕흥사를 지었던 백제 무왕다운 미적감각이라 여겨집니다.
이 궁궐은 6미터에 이르는 높은 담장에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엿보거나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이곳에 서동설화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첫 번째 열쇠가 바로 화장실입니다.

유적발굴결과를 토대로 복원한 그림.<왕궁리 유적 궁장과 신룡석 산성기원>논문 중에서
▲ 담장복원그림 유적발굴결과를 토대로 복원한 그림.<왕궁리 유적 궁장과 신룡석 산성기원>논문 중에서
ⓒ 박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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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안에서 발견된 화장실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공중 화장실입니다. 규모로 보아선 꽤 큰 공중화장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사용했던 사람이 왕이었을 리 없습니다. 공중화장실이니까요.

화장실 앞에 있는 나무막대는 뒤처리용이다. 화장실 터의 토양분석으로 고대인의 배설물을 조사하여 당대인들의 건강 상태와 식생활 환경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감염된 기생충의 분석을 통해 집단생활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왕궁리 유적 전시관'내에 있다
▲ 공중화장실 복원 모형 화장실 앞에 있는 나무막대는 뒤처리용이다. 화장실 터의 토양분석으로 고대인의 배설물을 조사하여 당대인들의 건강 상태와 식생활 환경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감염된 기생충의 분석을 통해 집단생활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왕궁리 유적 전시관'내에 있다
ⓒ 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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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양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화장실(오른쪽)과 왕궁리유적 발굴결과를 바탕으로 그린 화장실 모양
▲ 화장실 복원도 백제 양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화장실(오른쪽)과 왕궁리유적 발굴결과를 바탕으로 그린 화장실 모양
ⓒ 국정홍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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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흥미로운 것은 이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거처는 여기에서 멀리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집단생활을 했으며, 출퇴근을 하지 않은 채 궁궐에서 그것도 경계가 삼엄한 이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했을까요?

공중화장실에서 멀리 않은 곳, 바로 그 앞에 답이 있었습니다. 바깥세상 출입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지내야 했던 사람들을 위한 건물, 그곳이 '공방'이이었습니다.

왕궁리유적의 서북편에는 금, 유리, 동 등 왕궁에서 필요한 귀중품의 생산과 관련된 제품과 원료, 도가니, 용재(slag), 숫돌, 노의 벽체 편, 토관 등이 수습된 공방폐기장이 확인되어 그 주변에서 이들 제품을 생산하던 공방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유적이 바로 앞 동쪽에 보인다.
▲ 공방터 왕궁리유적의 서북편에는 금, 유리, 동 등 왕궁에서 필요한 귀중품의 생산과 관련된 제품과 원료, 도가니, 용재(slag), 숫돌, 노의 벽체 편, 토관 등이 수습된 공방폐기장이 확인되어 그 주변에서 이들 제품을 생산하던 공방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유적이 바로 앞 동쪽에 보인다.
ⓒ 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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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안에 공방이? 약간 의외이겠지만 사실입니다. 어쩌면  궁궐은 공방을 위해 지어졌을 것입니다.  궁궐만큼 안전하고 비밀스러운 곳이 없을테니까요. 그 공방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이곳에선 금, 금동, 금도금, 유리제품 등을 만들었습니다.

익산은 당시까지만 해도 금강을 통해 배가 닿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 뱃길을 따라 중국에서 문명이 오고, 다시 일본으로 문명이 건너갔듯이 이번에는 물건이 오고 다시 물건이 갔습니다. 김제의 금은 익산에서 수려한 모양을 얻어 뱃길을 타고 세상으로 팔려나갔습니다.

그들이 오고간 흔적도 왕궁리 유적에 남아있습니다. 공방이 있으면 상인이 오고가고, 상인들은 어디서나 수레를 타고 다니는 법입니다. 그래서 상업문명의 상징은 수레라고도 합니다. 왕궁안 유적엔 그들이 다녔던 수레바퀴 자국이 1400여 년이나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궁궐이 이 공방과 그곳의 기술자를 보호하는 곳이며 상인들이 드나들던 곳이라면 서동설화속 금의 진실은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익산 촌놈 서동을 백제 무왕으로 만들어낸 힘도 이것이었고, 익산 출신의 왕실나부랭이에 불과했던 무왕이 귀족들을 제압하며 왕권을 강화하게 해준 것도 이 금의 힘이었습니다. 즉, 서동설화의 진실은 금이었습니다.

왕궁리유적에서 수습된 금은 제품 생산 전단계인 재료 상태의 금막대, 금종이, 금덩어리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한 금연꽃구슬, 영락, 연결고리, 금구슬, 금판, 금못, 제품 생산과정에서 남은 금판 편 등이 수습되어 금의 제련, 정련과 함께 세공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왕궁리유적출토 금제품 제작흔적 왕궁리유적에서 수습된 금은 제품 생산 전단계인 재료 상태의 금막대, 금종이, 금덩어리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한 금연꽃구슬, 영락, 연결고리, 금구슬, 금판, 금못, 제품 생산과정에서 남은 금판 편 등이 수습되어 금의 제련, 정련과 함께 세공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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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의 거짓

서동설화의 진실이 금이라면 거짓의 열쇠는 미륵사입니다. 미륵사를 만든 사람은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비로 천도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 백제를 좌지우지 했던 귀족 사택가문 사람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했으니까요.

'서동설화'를 거짓말로 만들어 환타지세계로 인도하는 사람은 지명법사입니다. 지명법사는 신통방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명법사이야기를 듣고 서동설화는 꾸며낸 이야기란 걸 알게 될게 뻔합니다. 현실적으로 지명법사가 한 모든 일은 불가능한 일들 뿐이니까요.

그러면 왜 거짓을 만들었을까요? 거짓은 진실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이 거짓말 속에 담겨진 진실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를 백제 무왕의 관점에서 보면, 금을 얻어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선화공주의 관점에서 보면 달라집니다. 궁극적 목적은 무왕을 졸라서 미륵사를 짓는 것입니다. 즉 미륵사를 짓는데 돈을 댄 것은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무왕의 진짜 왕후이지만 그 미륵사를 짓도록 졸랐던 사람이 바로 선화공주인 것입니다. 물론 선화공주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미륵사를 짓도록 만든 민심이 만들어낸 환상의 인물로 보입니다.

무왕은 이름그대로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임금입니다. 성왕때까지 전쟁은 고구려와 벌였으니 백제 북쪽 백성들이 고달팠을테지만 그 이후부터는 신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옛가야땅을 두고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과 무려 13번을 싸웠습니다. 이중에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습니다.  

물론 이 전쟁은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오는데 성공하게 했습니다. 왕실이 강하면 외척이나 환관이 힘도 강해지듯 당연히 이 전쟁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무왕과 무왕의 왕후가문인 사택가문이었습니다.

미륵사는 미륵이라는 미래의 부처가 내려와 전쟁에 지친 백제인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신라와의 전쟁에 지긋지긋해진 백제인들은 당시 두나라 왕이었던 무왕과 진평왕의 화해를 꿈꿨습니다.

서동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왕궁리 금은 이곳 백성들이 채취하고 이곳 백성들이 세공했습니다. 지명법사의 신통력이란 것도 결국 이곳 백성들의 고단한 노동의 댓가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왕이 되었고 진평왕의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백제 무왕에게 귀족을 제압할 왕권을 손에 쥐어준 것은 익산 주변 백성들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지명법사의 신통력이 아니고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무왕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익산의 백성들은 무왕의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선화공주가 태어난 것은 이때였을 것입니다. 제발 전쟁을 끝내자는 그들의 외침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던 것이지요. 무왕에게 금을 주어 왕이 되게 해주었던 그 공주님은 평화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졸랐다. 미륵불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왕도 그 왕후도. 권력을 가져다준 그들이 고마웠으니까요.

'서동설화'의 거짓은 익산 백성들의 꿈이란 진실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절의 건물들을 가람이라고 하는데 본당인 금당과 탑이 기본이 된다. 미륵사는 백제 전통의 1금당 1탑 형식이 아니라 3금당 3탑이다. 그리고 탑은 9층이다. 이것은 미륵불의 힘으로 삼국간의 평화와 아홉오랑캐의 퇴치를 상징한 것이다. 전쟁에 지친 그들의 염원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이 미륵사가 창건된 후 무왕은 전쟁을 멈췄다.그림은 미륵사지유물전시관내 전시중.
▲ 미륵사 완성도 절의 건물들을 가람이라고 하는데 본당인 금당과 탑이 기본이 된다. 미륵사는 백제 전통의 1금당 1탑 형식이 아니라 3금당 3탑이다. 그리고 탑은 9층이다. 이것은 미륵불의 힘으로 삼국간의 평화와 아홉오랑캐의 퇴치를 상징한 것이다. 전쟁에 지친 그들의 염원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이 미륵사가 창건된 후 무왕은 전쟁을 멈췄다.그림은 미륵사지유물전시관내 전시중.
ⓒ 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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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록에는 639년에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고 하는데, 이 사리장엄구에는 미륵사가 639년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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