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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고개에서 내려다본 충북 영동 고향마을(용화면 창곡리). 두메산골이지만 이곳도 구제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마을 고개에서 내려다본 충북 영동 고향마을(용화면 창곡리). 두메산골이지만 이곳도 구제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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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에는 집에 내려올 생각마라."

어제(24일) 밤늦게, 충북 영동 시골에 계신 아버지께서 대뜸 전화를 걸어와 하신 말씀이다. 충남지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구제역이 터지자 차단방안으로 우선 자식 단속부터 하고 나선 것이다. 25일에도 충남 공주에서 도내 12번째 구제역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자식이 주로 대전충남권에서 취재를 하고 있으니 노파심에서 그러시는가 했다.

"걱정 마세요. 구제역 취재는 하고 있지만 구제역이 발생한 현장 농가를 가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 톤이 더 커지고 표현도 완강해졌다.

"글쎄, 오지 말라면 오지 마!"

고향마을이라고 해야 최근 외지에서 들어온 집을 합쳐 모두 10가구 남짓하다. 영동읍에서도 시내버스를 타고 40분 정도를 가야하는 두메산골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설날이면 지금도 집집을 모두 돌며 마을 어르신들께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빼먹기라도 하면 '누구네 집 아들은 설 쇠러 안 온 모양'이라는 얘기가 금세 돌 정도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앞장서서 고향에 발도 붙이지 말라니.

"우리집 소도 소지만 만약 면소재지에 덜컥 병이라도 생기면 다 니가 옮긴 게 되니까, 그리 알아라. 실제로 또 그렇고…."

설이 끝난 뒤에 만약 마을에 구제역이 생기면 동네 사람들은 물론 부모님께서도 내가 옮긴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누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지 않느냐'며 쐐기까지 박으신다. 고향마을은 작지만 외지에서 내려와 정착한 분들이 한우농장을 하고 있는 등 가구의 절반 정도가 소를 키우고 있다. 시골 부모님도 7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다. 아래 위 마을도 사정은 비슷하다.     

구제역, 설날 이전에 종식시킨다더니...

2010년 12월 3일, 충남도가 경북 안동의 양돈농장과 역학관계가 있는 보령시 천북면에 있는 2개 농가에서 사육하고 있는 돼지 2만 191마리를 살처분했다. 하지만 한 달 뒤인 지난 3일, 천북면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사진은 보령시 천북면의 한 돼지 농장에서 방역요원들이 돼지들을 살처분장소로 몰고 있는 모습.
 2010년 12월 3일, 충남도가 경북 안동의 양돈농장과 역학관계가 있는 보령시 천북면에 있는 2개 농가에서 사육하고 있는 돼지 2만 191마리를 살처분했다. 하지만 한 달 뒤인 지난 3일, 천북면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사진은 보령시 천북면의 한 돼지 농장에서 방역요원들이 돼지들을 살처분장소로 몰고 있는 모습.
ⓒ 보령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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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틀린 말씀은 아니다. 구제역 발생 현장은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저런 취재를 이유로 충남지역을 쏘다니고 있고, 고향 마을 분들도 모두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 부주의로 자칫 방역망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 또한 큰일 아닌가.  

게다가 향우회 등에 설 연휴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자치단체가 늘어나고 있다. 구제역이 발생한 당진군에서도 군수 명의로 재경 향우회와 재인천 향우회 등에 '구제역 확산 방지를 위해 이번 설 명절에 고향 방문을 가급적 자제해 달라'는 협조문을 보낸 바 있다.

결국 "네… 알겠습니다" 했는데도 아버지께서는 "허투루 듣지 말고 절대 오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신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번 주말에 아버지 77번째 생신이 들어 있다. 아버지는 당신의 생일 때도 내려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설 연휴에 내 스스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처량하기도 하지만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는 갑갑증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연초에도 같은 이유로 시골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지난 중순경에는 전북 무주군에 취재를 갔다가 인근에 사는 여동생 집을 지나쳐왔다. 여동생집 또한 축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쉬워하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통해 "정부에서 일제히 백신접종을 하고 있어 1∼2주만 지나면 더 이상 확산은 없다고 한다, 설 이전에 종식시킨다고 하니 설에 보자"고 말했다.

일부 지역, 군청과 관공서까지 방역에 무방비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새해 첫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가고 있다. 왼쪽부터 정진석 정무수석, 임태희 대통령실장, 이 대통령, 백용호 정책실장,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새해 첫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가고 있다. 왼쪽부터 정진석 정무수석, 임태희 대통령실장, 이 대통령, 백용호 정책실장,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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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지난 5일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충남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요 거점에 대해 백신 접종을 벌이고 있어 항체가 형성되는 다음 주까지가 구제역 확산의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며칠 뒤 맹형규 행안부장관은 충남 논산을 방문해 "설 이전에 조기 종식토록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제역은 갈수록 태산이다. 이중 삼중 방어막을 뚫고 경남까지 구제역이 확산됐다. 살 처분 매몰 가축만 250만 마리를 훌쩍 넘어섰다.

문제는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야 하느냐는 거다. 방역당국은 25일 현재 충남도에 필요한 돼지 41만 5000마리 분 구제역 백신조차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설 이전 접종도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그 이유라는 게 정부와 지자체, 축산농가간 우제류 사육 통계치가 맞지 않아 백신수급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란다. 말 그대로 통계 부실이 부른 오류이고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격'이다. 여기에 더해 구제역 감염경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방역당국은 "구제역 발생으로 잠정폐쇄된 축산농가에서 4대 보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실직 종업원들이 전국으로 흩어지고 있다"며 "구제역 차단을 위해 축산종사자들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오마이뉴스> 등의 지적에도 눈감고 있다.

충남지역시민사회단체의 조사결과 도내 대형마트 등은 구제역 방제를 위한 '발판소독기 설치' 등 최소한의 조치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지역은 군청 등 관공서까지 무방비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앞으로 1∼2주가 고비,  1∼2주가 고비… 하는 사이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정부가 뭘 했느냐고 타박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여행은 가급적 피하고, 축산농가 방문도 삼가달라"는 호소를 두 달 동안이나 지속할 때는 정부당국의 사과 한마디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정부 시책을 믿고 기다리다 연말에 이어 아버지 생신에도, 설에도 움직일 수 없게 된 불효자에게 또 다시  "구제역은 인체에 무해하니 집안에서 육류나 많이 소비해 달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 쇠고기, 돼지고기 값이 소비하기 어려울 만큼 천정부지로 치솟은 사실이나 제대로 알기나 한 것일까?


태그:#구제역, #설, #방역, #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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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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