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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후 밀린 원고를 쓰느라 며칠 전에야 조국 교수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가 쓴 <진보집권플랜>을 집어 들었다. 재미와 매력에 푹 빠져 단숨에 읽었다. 대담집이어서 깊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정말로 기우에 불과했다.

 

"책 마쳤습니다. 오늘 하루 아주 행복했습니다. 구체적 정책적 대안에 대해 매우 공감합니다. 콘텐츠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놀랐고 또 반했습니다. 근육이 미발달된 교수님을 정치판으로 떠밀고 싶진 않으나 향후 큰 역할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조 교수 트윗에 남긴 감상문이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오자 걱정이 밀려왔다. 조 교수가 제안한 정책을 시행하려면 진보진영이 대통령은 물론이고 총선도 압도적으로 이겨야 하는데, 그가 제안한 전략으로는 2012년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진보진영에 희망은 없는가. 선거를 30년 가까이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또 과거 선거를 거의 대부분을 정확히 예측한 경험에 비추어 길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진보진영이 그 방법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조 교수와 토론을 통해 그를 설득할 수 있다면, 그를 통해 진보진영이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토론을 위해 독후감을 논쟁적으로 써보기로 했다.

 

진보적 정책 추진하려면, 압도적 다수의 지지 필요

 

나는 어느 지점에서 그와 생각을 달리하는가. "전제에 적극 공감, 총론 반대, 각론 찬성"이 내 독후감 총평이다.

 

정치에 대한 깊은 애정, 이론을 공부하지만 끊임없는 현실에 대한 탐구, 사회참여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에 깊이 공감한다. 무엇보다 국민을 바라보는 긍정적이고 따뜻한 그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진보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는 옛날에 이랬는데...'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든지, 유권자에게 왜 그렇게 투표를 하냐고 나무라서는 안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투표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시각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각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와 현실에 대한 진단과 분석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 대안의 실천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양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이지만  순서를 바꾸어 미래의 문제를 먼저 짚어 보고, 이어서 과거와 현실의 진단에 대해 논의해보자.

 

참여정부가 집권준비가 덜 된 정부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터를 잘 닦았고 또 노무현 대통령이 철학이 있는 지도자였기에 더 좋은 정책을 실시하지 못한 것이 단지 무능하거나 의지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본다.

 

조 교수가 제안한 정책들 중 일부는 단지 아이디어가 없어서 참여정부에서 실천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실시하려면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참여정부 이전에는 기록조차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았다. 복지를 위해 축적된 정부의 역량이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복지를 위한 기초 통계자료도 충실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복지를 확대하기 전 통계청의 규모를 2배 늘이는 것부터 했다.

 

어떤 정책이 만들어지려면 사회전체적인 수준이 그 정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책의 입안뿐만 아니라 실행도 성공할 수 있다. 의석 과반수만 가지면 아무법안이나 통과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의원의 자율성이 존중되고 안개모 같은 단체가 열린우리당 내에 만들어져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면 벽에 부닥치는 것이 민주주의다. 물론 폐지가 아니라 대체입법을 택하지 못한 전략적 미스는 지적할 수 있지만 과반수 의석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실제로 미국 같은 나라에서 여당이 대여섯 석 넘는 과반수를 확보하면 언론은 대통령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조 교수가 제안한 획기적인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려면 압도적 다수의 여론적 지지가 있어야 하고, 의회 내 압도적 다수당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정책의 기틀을 다질 때 사회적 대타협이나 여야 간 대연정을 통해 이룩했다. 이런 극적인 타협은 전쟁이나 대공항 등의 위기 시에나 가능했다. 어느 나라에서 이런 조건 없이 진보정권 5년 만에 달랑 과반수의석으로 사회적 임금을 도입했는지 예를 들어주면 좋겠다. 그러한 사례가 있다면 배우고 또 배워야 할 것이다.

 

투표행위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좌우한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시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천신만고 끝에 당선되었고 직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은 겨우 100석을 넘겼을 뿐이다. 압도적 보수일변도 사회에서 언론·검찰·재벌의 특권층이 인맥으로 똘똘 뭉쳐 개혁을 방해하는데 왜 이런 정책 하나 못했냐고 탓하는 건 현실인식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닐까. 열린우리당이 힘으로 통과시킨 게 사학법 하나였는데 한나라당은 장기간 사학법반대 장외투쟁을 했다. 조 교수가 대통령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고견을 듣고 싶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오기와 독선의 정치, 부자감세, 기독교 편애 등을 보면서 우리도 뒤늦게 깨달은 게 있다. 진보진영도 다음에 정권을 잡으면 저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더 과감하게 질러보지도 못하고 지레 겁먹고 자기검열을 했던 점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통찰은 이명박 정부를 경험한 후에 갖게 되는 사후통찰력(hindsight)이지 참여정부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생각은 아니었다고 본다.

 

게다가 지금 이명박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가 독선과 불통 때문인데 진보진영의 지지자가 원하는 정책이라고 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해서야 되겠는가. 노 대통령이 상대를 배려하고 국민의 여론을 존중하는 정치를 했기에 지금이라도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이고 국민들이 6·2지방선거에서 이 정부를 심판했다고 본다.

 

조 교수가 제안한 진보정책을 성공 시키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관념적 진보지식인들의 문제는 유권자나 선거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정책을 내놓으면 국민이 당연히 지지할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람은 때로 자신이 원하는 것(wants)과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needs)을 헷갈릴 때가 있다.

 

정치, 특히 투표행위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좌우한다. 따라서 대중이 연대하는 이타적 존재가 되려면 만인의 투쟁을 경험한 후거나 의식화에 의해 깨어남을 겪은 다음이다. 게다가 민주정치는 독재와 비교하여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시간이 걸리고 그 효과는 정권이 지난 다음에나 나타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년의 독재로 이룩한 업적과 대비되는 대안의 정책을 진보정권 5년 안에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곤란하다. 이는 더 큰 실망과 정치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왕궁의 철옹벽에 조금씩 금이 가도록 하자

 

한국의 진보진영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다. 진보진영이 권력이라도 잡아본 건 김대중, 노무현 두 거인 덕분이었다. 지난 대선에 패배한 건 그런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이 잘못해서 지금 진보가 이렇게 분열되고 무기력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미래는 없다.

 

진보진영의 미래는 자신의 역량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국민이 역동성이 있는 위대한 국민이라는 조국 교수의 인식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엘리트는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도 문제가 많다. 국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져 있다. 진보지식인이 먼저 그들의 과대망상에 대해 반성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본다. 조 교수의 긍정적 시각이 이러한 회의주의자들에 대해 한 방 날린 것 같아 속이 시원하면서도 그들의 진단과 인식을 무의식 중에 받아들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단번에 진보를 이룰 순 없지만 기회가 날 때마다 성공사례를 만들어 보수왕궁의 철옹벽에 조금씩 금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역량을 축적해 가다보면 우리도 언젠가 진보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장기적 비전과 과정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이해를 제공해야 한다. 조급한 대중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는 대신 역사의 진보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 과정인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인내해야 결실을 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할 것이다.

 

아직도 빨갱이 포퓰리즘 비판이 난무한 나라에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진보를 말하고 희망을 키울 수 있는 것도 두 대통령의 업적 덕분이다. 자신의 몸을 던져 진보진영을 지켰고 유작으로 '진보의 미래'를 남긴 대통령에게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자산을 소중하게 지키지 않은 한, 국민도 진보진영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말하기 전에 과거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정확하게 대중에게 전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조기숙 기자는 전 청와대 홍보수석입니다. 이 글은 blog.daum.net/leadershipstory에도 올렸습니다.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오마이북(2010)


태그:#조국, #진보집권플랜, #독후감, #진보의역량, #역사의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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