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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하면 '목판'이 떠오른다. 그는 목판화가이고, 인터넷에 둥지를 튼 '이철수의 집' 주소도 목판(mokpan)이고, 간혹 쓰는 아이디도 목판이다. 온 가족의 이름을 다 새겨넣은 문패도 목판으로 만들어졌다. 목판(木板)은 '목판 인쇄에 사용하는 책판 또는 그림판'이라는 뜻도 있지만, '떡이나 과일 등 음식을 담아 나르는 나무 그릇'이라는 뜻도 있다. 그의 작품이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뜻 모두 어울린다.

 

이철수는 먼저, 1980년대 폭압적인 사회에서 선 굵은 저항의 언어를 새겼던 목판화로 다가왔다. 그 시절 그의 작품은 민중미술, 소위 '운동권 걸개그림'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그의 그림이 어느 순간 순해졌다. 일상과 자연에 몰입했고, 성찰과 관조가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여백이 많아졌다. 생각과 고민을 요각(凹刻) 속에 담았고, 남은 이야기만이 철각(凸刻)으로 나타났다. 달라진 표현 방식 탓에 그의 그림을 '변화'가 아닌 '변절'로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남의 시선보다 자신의 내면 고백에 더 귀를 기울였다.

 

작품 초기 10년가량은 민중미술에 무게를 뒀다. 그 두 배에 달하는 기간 동안 선(禪)적인 표현이 어우러진,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 세계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경계선에 1980년대와 1990년대가 만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세계사적인 격동기였다. 그가 충북 제천의 평동마을에 둥지를 튼 것도 그 직전이다. 그의 변화는 오랜 침잠 끝에 나온 것이었다.

 

빠른 세상에서 느리게 살기, 이철수가 사는 법

 

그는 2005년 <오마이뉴스>에 '이철수의 매일메일'을 6개월 동안 연재했다.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듯이 엽서로 전달하는 생활·시사 이야기 코너였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엽서를 통해 소통의 물꼬를 트고 싶어했다. 때때로 그의 메시지는 에두르지 않고 목표점에 꽂히는 창처럼 날카로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실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넘칠 때는 쏟아내는 게 순리라고 여긴 듯했다.

 

5년여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여전했다. 전화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을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도 그랬다. 그는 고정된 틀과 형식에 갇히는 걸 싫어한다. 이철수는 이철수일 뿐, 여러가지 수식과 비교를 거북하게 여긴다.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가 영향을 준 세상에 대해서도 담담하다. 그는 무엇인가 경계를 나누고, 사람 관계를 선으로 연결하고, 그렇게 임의로 만든 기준을 중요한 잣대인양 바라보는 걸 불편해한다.

 

박달재 너머에 사는 이현주 목사, 지금은 고인이 된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권정생 선생은 그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민중예술의 큰 획을 그었던 판화가 오윤도 그의 예술적 성장에 자극을 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조심스러워진다. 무엇인가 틀에 넣고 규정한다는 게 오히려 본질에 접근하는 걸 방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다고 새를 새장 속에 가둬두거나, 예쁘다고 산에 있는 꽃을 꺾어다 집안에 놓아두는 일을 경계하듯이.

 

'열심히 살긴 했지만, 이념에 기대어 산다는 게 허약하다'고 느낀 순간, 그는 새로운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다. '스스로를 정화하지 않고서 사회 변혁을 이야기한다는 게 큰 힘이 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고민했다. 그리고 '미시적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그림의 궤적을 더욱 정교하게 벼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느린 걸음 속에서도 몸살 앓는 강, 한미FTA, 재벌의 탐욕과 노동자의 고단한 삶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빠른 세상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발걸음을 느리게 하는 일, 그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사람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 그게 이철수가 사는 방식이다.

 

2010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중순,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철수의 집을 찾았다. 좀 더 넓어진 마당이 한결 아늑하게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그는 손님의 끼니를 먼저 신경썼고, 직접 농사지은 쌀과 채소로 부인 이여경씨가 정갈한 밥상을 차려줬다. 밥을 함께 나누는 일, 이철수 부부의 기쁨이고 손님의 행복이다. 작업실 한 켠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큰 목판 두 개가 놓여 있다. 부리가 날카롭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날개를 편 독수리다. 그 목판에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리영희 선생을 떠올리며 새기고 있는 작품이다. 그에게는 말보다 칼이 앞선다.

 

- 요즘은 농사를 어느 정도 짓나요.

"2000평 정도. 벼농사는 유기농 우렁이 농법으로 한 지 10년도 넘었어요. 일 년에 열다섯 가마 정도 나와요. 한참 때는 3000평도 넘었는데. 그때는 많이 힘들었어요. 열심히 안 하면 안 되는 건 줄 알고…. 애들이 떠나고 나니까 이제 '군것질 농사'는 잘 안 해요. 과일농사도 많이 줄였는데, 그래도 저 사람(부인)이 참외는 꼭 몇 개씩 심어놓더라구. 벼농사와 고추농사도 줄였어요. 우리 실력으로는 유기농도 쉽지 않아요. 주변 환경이 나빠지고 오염되면 혼자만 독야청청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 가끔 귀농 성공 사례로 인터뷰 요청이 오기도 한다면서요.

"많이 와요. 내가 '엉터리 농사꾼'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죄송한 얘기지만 윤구병 선생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가짜 농사꾼들이잖아요. 밥벌이 따로 있고 농사에 목매지 않아도 되고. 실농한다고 밥 굶을 위험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치스러운. 나는 공부삼아 농사를 짓고 있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 돈으로 땅 사서 고추 하나도 못 건져도 '올해는 적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하고, 고추농사 망치면 아이들 학비를 못 내는 사람하고 같은 농사꾼이 아니죠. 그냥 나는…."

 

- 이곳에 살면서 왜 자녀를 대안학교에 안 보내셨나요.

"근처에 대안학교는 많은데, 일부러 안 보냈어요. 나는 늘 기존의 학교가 좋아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대안학교는 새로운 흐름이 되고 있지요. 그러나 기존의 학교들이 바뀌고, 교육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야 누구나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잖아요. 지금은 명문 대안학교도 생기고, 일부에선 이기심의 발로로 만들어지는 게 안 좋아 보였어요. 우리도 다 안 좋았던 교육제도 속에서 교육받았는데도 다 생각할 줄 알고 모자라는 거 채워가면서 자라왔는데….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동시대의 삶을 친구들과 함께 겪어라'."(스물여덟 아들과 스물여섯 딸은 지금 서울에서 직장생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 [이철수 인터뷰] 이철수와 사람들
ⓒ 오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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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교수와의 만남, 아버지와의 화해

 

학창시절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던 그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고민했다. 1978년 군대를 제대하면서 방향을 '미술'로 정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군대생활이 아니라 그 시기가 그에게는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그동안 몇몇 인터뷰에서 거론됐지만, 다시 그 시절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제 옛날 얘기 좀 그만하려고 하는데. 내가 그림 달라진 지 정말 오래됐는데 아직도 그 옛날 얘기를…." 그래도 묻자, 강만길과의 만남, 아버지와의 화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 군대에서 강만길 교수의 글을 접하면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자각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이후 미술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강만길 선생의 글을 그때 처음 본 건 아니지만 그 분의 책을 읽었어요. 어느 구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4·19를 언급한 부분이었어요.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한 게 5·16 때문이란 걸 어려서부터 들어 알았고, 흔쾌한 일이 아니지만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랐어요.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을 미워하니까 나로서도 고통스러웠던 모양인데. 강만길 선생의 책을 보면서 '역사의 격동기, 역사의 큰 변화라고 하는 게 어떤 한 개인에게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질곡 속으로 사람을 몰아넣기도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어요. 아버지의 인품이나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어했던 분이 아니었다는 게 분명했는데…. 젊은 시절, 힘겨운 현실을 살게 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를 싫어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역사라는 것이 어떤 개인이 선의를 가졌다고 해도 그 선의를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아주 경이로운 경험이었어요. 머릿속이 하얀 광선 같은 걸로 가득 찬 것 같은 경험이었으니까. 살면서 그런 경험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굉장한 에너지가 머릿속에 가득 차는 느낌으로 '아. 아버지는 죄가 없는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여러가지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내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다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스스로 아버지와 화해했다. 그 이후로는 아버지와 어떤 갈등도 겪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도 그렇게 변한 자식의 모습을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모든 문제가 마음의 문제"라는 말을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군을 제대한 뒤 그는 '우연찮게' 이현주 목사를 만났고, 그를 통해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권정생 선생을 만나게 된다. 당시에는 우연, 돌아보니 필연 같은 인연이다. 그에게 이현주 목사는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 이현주 목사는 물론이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나 권정생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셨지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두 사람의 삶이 내 삶이 변화하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런 어른들을 뵙는 게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두 분의 존재가 나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여기(제천)서도 참 많은 분들을 뵙고 살았어요. 사람들 이상으로 책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것이고.

 

권정생 선생은 당신의 유별한, 가난한 삶을 통해서 해준 이야기가 많으셨고, 장일순 선생은 화사한 분이었어요. 권 선생님이 드문드문 한 마디씩 하는 스타일이라면, 장 선생님은 때로는 현란하게 짚을 것 짚어주시는 스타일이셨죠. 장 선생님도 권 선생님 못지않게 소박한 삶을 사셨지만, 보살펴주는 사모님도 계시고 또 그 분을 따르는 후배들도 있었지만, 권 선생님은 늘 앓고 계시는 모습이었어요. (권 선생님과) 이런저런 일을 함께하면서, 그 분의 돈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것, 세상 보는 법 같은 걸 옆에서 보면서 그렇구나 하고 느끼고 받아들일 때가 많았죠."

 

▲ [이철수 인터뷰] 목판화가 이철수
ⓒ 최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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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변화는 시작됐는데, 독일 가서 한 대 맞고 온 셈"

 

1989년 그는 함부르크 대학 초청 독일 순회전 때문에 석 달 가까이 유럽에 머물렀다. 케테 콜비츠와 같은 유명한 사회참여 예술가가 정작 독일 사회에서 잊혀 가고 있는 걸 목도했다. 베를린 전시를 마치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던 중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철수의 작품에 새로운 나이테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면서 "이미 변화는 시작됐는데, 독일 가서 한 대 맞고 온 셈"이라고 했다. 독일 전시회에서 돌아온 뒤 그는 한동안 조각칼을 손에 쥐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려고 해도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생각이 많았다. 10년 넘게 작업했던 수백 점의 목판을 태워버린 것도 그 즈음이다.

 

- 몇 년 전 <우리교육>과의 인터뷰 때에는 '쌓아둘 곳이 없어 목판을 태웠다"고 했는데, 그 작품들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것인데….

"그건 좀 극단적인 표현인 것 같고. 나는 그렇게 경박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아요. 듣기 편하라고 '공간이 없어서'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도 그게 그렇게 소중했으면 방에라도 들여놓으면 될 일이지 태울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 한 시절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고. 이게 팔만대장경이 될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손님들 오면 고기 구워주는 땔감으로 많이 썼어요. 굳이 그걸 아껴가면서 지켜야 할 물건들은 못 된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기 전에도, 이념의 시대가 저물고 자본의 시대가 팽창하는, 세계가 아주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리영희 선생과 장일순 선생이 얘기하는 것을 곁에 앉아서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얘기를 경청하면서, 나처럼 어두운 눈을 가진 놈은 못 보는 변화가 있다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념의 시대가 간다는 것은 사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제 변화의 큰 동인은 이념의 시대가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내가 정직한지, 내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드러내고 싶어하는 내 견해와 입장이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늘 이런 것에 대한 회의가 많았어요."

 

그의 절친한 친구인 시인 곽재구는 오래 전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삿짐을 풀고 이철수가 처음 한 일이 전각화된 기왕의 시간들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는 기왕 그가 새긴 모든 목판들을 불태웠다. 각박하고 어려웠던, 때로는 정의감 하나로 버티었던 시절의 꿈과 추억이 흥건히 깃든 목판들이었다. '사흘 동안 판목을 태운 시꺼먼 연기가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고 그는 그때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한다."

 

- 당시에는 이철수의 작품 세계가 급격히 바뀌어 당황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민중미술에서 손을 떼고, 자기 내면에만 빠지는 것에 대해 섭섭해하는 시각들도 많았고. 직접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런 변화를 '변절'이라고 보는 이도 있었는데….

"나 스스로도 이게 변절을 의미하는 건지 물어보면서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살기 시작했어요. 그런 질문과 시선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없어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보고. 돌이켜보면, 당시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불교적인 소재를 붙잡으면서 아마 이게 마음으로 가는 길이려니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변화 속에서도 빠른 속도로 길을 찾아가려고 애쓰고. 길을 잡으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가벼운 혼란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고. 아주 거친 표현들과 불교적 소재에 대한 표현이 겹치는 시기도 있었어요. 그러나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아버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 (과거의 그림을 지우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고 했는데) 1980년대 민중미술을 했던 게 이후 선(禪)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데 디딤돌 역할을 한 측면도 있지 않나요.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과거가 나를 붙잡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80년대 당시에)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스스로 동의했거든요. 열심히 살긴 했는데 이것 가지고는 미래에 대한 변화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대중들이 이 거친 목소리에 쉽게 공감도, 동의도 안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념에 기대어 산다는 것도 예술하는 입장에선 빈약하고 허약하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 [이철수 인터뷰] 이철수가 '말'하다
ⓒ 최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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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산거(山居) 한 쪽 벽에 걸린 이철수의 판화

 

- 1990년대 이후 선화(禪畵)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니까 진보라고 해서 다 정직한 것도 아니고 진보라고 해서 다 청정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진보가 입신·출세의 도구로 쓰인다는 느낌도 받았고, 내 눈에 보이는 진보의 허점이나 취약점을 입에 올리는 게 적전분열처럼 느껴져서 그걸 이야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내게 짐처럼 느껴졌어요. 우리가 스스로를 정화하지 않고 사회변혁을 얘기하는 게 별 힘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나를 돌아보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런 과정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쉽게 잡히는 게 선이었다고 하면 맞을 거예요. 인간에 관한 깊은 통찰이 진보적인 관점에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계속했었죠. 존재나 생명에 대해서 얻게 되는 깊은 통찰이, 과거에 흔히 얘기하듯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세상에 등을 돌리는 도피 행위로서의 선으로 결론이 나는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좀 더 깊이 알아보자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는 거죠."

 

 

법정 스님의 산거(山居) 한 쪽 벽에도 이철수의 판화 <소리-바람 부는 날 나뭇잎들>이 걸려 있었다. 법정은 "그 그림 속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늑한 평온이 깃들고,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아슴아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앉아서 입적한 한 노승 앞에 차 주전자와 끈이 풀린 염주알이 구르는 그림 <좌탈 坐脫>을 보고는 "어떤 고승의 열반송보다 그 표현이 담백하고 솔직하다"고 평했다.

 

"염주끈이 풀렸다 / 나 다녀간다고 해라 / 먹던 차는 / 다 식었을 게다 / 새로 끓이고 / 바람 부는 날 하루 / 그 곁에 다녀가마 / 몸조심들 하고 / 기다릴 것은 없다" (坐脫, 철수'92)

 

-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이철수의 그림은 분명한 화자를 갖고 있는데, 그 화자가 작가 자신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습니다. 이주헌씨는 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 속 주인공의 입을 빌어서 하는 거죠. ('좌탈'처럼) 죽음에 직면해서 세상과 나누는 마지막 이야기 같은 것들을 그렇게라도 해서 그려보고 싶었어요. 죽을 때가 되면 대부분 정직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소재를 썼어요. 우리가 마음을 깊이 살피면서 살아가는 과정으로 그런 삶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됐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어요. 제가 그 속에서 잘 정돈된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지만…."

 

시인 곽재구는 이철수의 겉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용인가 박은순가 하는 텔레비전 탤런트의 얼굴에, 국회의원 노무현, 가수 정태춘의 얼굴을 한데 써레질하여 버무린 듯한 순 토종의 골상"이라고. '그 평가에 동의하느냐'고 묻자, "(일용이) 한 사람만 빼고는 다 만나도 봤는데, 써레질해서 버무려놓은 것 같다는 말이 좀 그렇지만, 다들 잘 생겼던데"라며 웃는다. 시인 곽재구와 가수 정태춘은 그와 동갑내기 절친이다. 1년에 한두 번 부부동반 여행을 떠나는데 지난해(2010년)에는 곽 시인이 인도에 간 탓에 보질 못했단다.

 

대중가요와의 만남, 선적 혜안이 번뜩이는 <적멸>

 

빨간 단풍잎 하나가 떨어지는 그림. 그 아래 이렇게 적혀 있다. '잘 있거라 / 나는 간다 / 이별의 / 말도 없이…'. 95년작 <적멸>이다. 시인 조정권은 '이철수의 선적 혜안이 번뜩이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의 그림에는 글이 있거나, 그의 글에는 그림이 있다.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 아니라, 그 경계를 허물었다. 이주헌은 그의 작품 활동을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칼'이라고 말했다.

 

 

- <적멸>에서 그림만 남는다면 극사실의 단풍잎에 불과하고, 글만 남는다면 <대전부르스> 가사 일부를 옮겨놓은 것에 그치고 말텐데, 둘이 합쳐지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왜 그림에 글이 들어가 있느냐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나는 글씨는 그림의 한 요소라고 생각했어요. 그림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덧붙여 표현하는 것이 왜 죄냐?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안 했어요. 우리 미술 안에는 화제(畫題)라는 것이 있었는데, 서구 미술을 받아들이면서 그걸 툭 털어버리듯이 한 게 개탄스러웠어요. 제가 오랫동안 그림에 글을 넣어서 작품을 해오며 확인한 것도 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었고. 제 그림을 사람들이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런 글 때문 아닌가요?

 

(제 작품은) 글을 빼놓으면 혼자 서 있지 못하는 이미지가 많아요. 글하고 같이 있을 때 비로소 작품이 되지 이미지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거나 의미를 그 속에서 캐내기에는 빈약한 이미지가 많아요. <적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글씨를 지우면 저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감 잡기가 굉장히 어렵죠. 그림이라고 하는 건 내 이야기예요. 내가 세상에 그런 얘기를 자꾸 던지는 이유는, 내 이야기 가운데 들을 만한 게 있다면 그걸 가져가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헤매고 고민하면서 주워낸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삶의 지혜이기도 하고.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떤 발언을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그림으로 하고 있는 거니까.

 

그걸 보고 공감할 만하면, 그게 좋아 보이면 가져가라는 거에요.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거고. 물론 이게 구차하고 별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필요하다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거기서 작은 위안을 받는다면 위안을 받기 위한 도구로 쓰여도 좋겠죠. 내가 이 방식으로 사물을 보거나 존재를 보면서 얻은 것이 있다고 느끼고, 작지만 평화와 행복도 느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으로 지금 살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애쓸 것 같고."

 

- 2005년 <오마이뉴스>에 '이철수의 매일메일'을 연재할 때 "더이상 사회가 이대로 굴러가는 것에 대해 발언은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최근 홈페이지에 올리는 '나뭇잎 편지'에도 한미FTA가 연작으로 올라왔더군요. 시사적인 발언을 하는 이철수에 대해 거북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아마추어 지식인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하데요. 지식인이 한 사회 안에서 자기 존재·능력·가치를 과시하고 그 속에서 자기 권위를 얻어가면서 발언의 힘도 얻고 통속적인 얻을거리를 챙기는 존재라고 한다면, 아마추어 지식인은 평균적이거나 보편적인 상식에 둥지를 틀고 앉아서 프로페셔널 지식인들이 쉽게 얻는 기득권과 권위의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평범하고 범속한 자리에서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아마추어 지식인) 자리가 참 좋아 보였어요. 제가 지금 농사를 짓고 그렇게 사는 방식도 그런 것과 닿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알량한 것이긴 하지만 농사지으면서 땀도 흘려야 하고, 흙도 묻혀야 하고, 내가 먹을거리를 생산하면서 시장으로부터도 조금은 의연할 수 있고. 앉아서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고나 하는 이런저런 제 능력이 조금이나마 돈에 팔려나가는 것을 줄여나갈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시장경제 구조 안에서 다 자유롭기는 어렵지만 시민사회단체를 위해서 그 힘을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 표현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삶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

 

 

- '작가를 만나다' 첫번째로 조정래 선생을 인터뷰했는데, <허수아비춤>처럼 소설 속에 해법과 대안을 다 제시한 적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자본권력에 침식당한 이 사회의 상황이 절박하게 느껴졌다는 것일 텐데요. '나뭇잎 편지'에 한미FTA 같은 시사적인 주제가 올라오는 것도 비슷한 심정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FTA도 절박하고, 비정규직 문제도 절박하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더 절박하다고 느끼는 건 그 속에조차 에누리없이 숨어 있는 우리들 자신의 탐욕 문제라고 생각해요. 탐욕의 사회화, 탐욕의 보편화…. 그것 때문에 FTA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질주하고 있는 욕망의 쾌속 주행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단순히 가난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늘 있어요.

 

욕 얻어먹기 좋지만, 이 얘기를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리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보낸 엽서에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고 써놓은 것도, (독수리 그림이 새겨진 작업 중인 큰 목판을 가리키며) 저 그림이 그런 이야기를 담은 거예요. 우리 사회가 좌우 대립 속에서 좌측 결핍에 관한 문제로 너무 오랫동안 끌려왔어요. 나는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좌측 결핍이 오래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해요. 해소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것을 보느라 온몸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요.

 

새는 좌우의 날개만으로 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야말로 심장이나 다른 부분을 포함한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날아가고 있는 셈인데. 앞으로 나올 그림들은 온 마음으로 나는 그림도 있고,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나는 그림도 있고, 그런 부분들을 담게 될 거예요. 생명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실종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살 차이지만, 장일순 선생이 리영희 선생에게 형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존재와 생명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달랐던 것 때문입니다. 표현이 좀 통속적이지만 거기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폭넓은 통찰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리영희 선생도 그런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고. 우리 사회가 이제는 (좌우의 날개를 넘어) 온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됐어요.

 

리영희 선생의 시대가 선생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진화하고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좌만도 아니고,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잖아요. 그냥 돈 좀 더 주면 괜찮은 건가요? 삼성에서는 노조를 못하는 대신 돈은 많이 주려고 애쓴다면서요? 그럼 되는 건가요? 그리고 노조만 있으면 다 되는 건가요? 돈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만족하겠다는 순진한 인식까지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어디에 처해있건 세상에서 낫다고 평가되는 조건의 사람들조차 얻지 못하는 마음의 평화를 어디 가서든 얻어야 할 것 아닌가요? 작은 소득에 소박한 밥상 가지고도 깊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도 많이 있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없어져 버린 것 같아 (답답합니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왔다가 가는 의미가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살아야 하지 않나요.

 

이 사회가 사유조차 저작권이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거든요.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그걸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선생님 한 분 돌아가시면 절망해야 하고. 그럴 이유는 없잖아요. (저는) 장일순 선생을 정말 좋아했지만, 장일순 선생이 아니어도 좋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많으니까. 우리가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것만큼 살려고 애쓰는 일이 필요한 거죠. 아무리 봐도 긴 세월 동안 이념과 자본의 하수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과 똑같아요. 요새 톨스토이를 다시 정독하는 중인데, 그분이 당시 사회를 보면서 '욕심 한가운데 있는 한 좌든, 우든 희망이 된 일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우리 존재에 관해 깊이 통찰하려고 하는 안간힘들이 우리 시대에 절실해졌다고 생각하고, 저 개인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진보적인 메시지를 찾아내고 있는 셈이에요."

 

"칼뿐만이 아니고 놓고 싶은 것이 많아요"

 

 

- '(목판화) 일을 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간혹 하시는데요.

"오랫동안 말이든 그림을 통해서든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참 많이 했어요. 그래서 억지스럽게 혼자서 생각한 것이 내가 세상에 갚아야 할 것이 아직 있고 세상에서 심부름할 것이 아직 남았다는 뜻인가 보다는 거예요. 그렇게 나 스스로 편하게 생각하고 세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했어요. 그런데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고 기껏 징검돌이라도 몇 개 놓았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나중에 돌아보면, 그게 금방 떠내려가는 허약한 징검돌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때 그런 생각을 끝없이 하게 되죠. 조만간 세상과 헤어져야 할 때도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생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저는 살면서 좋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몇 년 전에 내가 자꾸 그림을 놓고 싶어하니까, 우리 식구가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왕 화가로 시작했는데 마무리할 거면 그림 같은 그림을 하나 해놓고 은퇴하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괜찮은 생각이다' 싶었어요. 요즘은 그런 생각은 갖고 있어요."

 

- 조각칼을 놓겠다는 얘기인가요.

"칼뿐만이 아니고 놓고 싶은 것이 많아요."

 

과거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할 때는 차분하고 짧았던 답변이,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옮겨오자 뜨겁고 길어졌다. 조정래 선생은 자신의 책 <태백산맥>이 도서관에서 너덜너덜해진 걸 보고 작가로서 무척 기뻤다고 했다. 이철수 선생은 자신의 그림 달력이 포장마차에 걸려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가서 뭐라도 사 먹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분식센터나 중국집에 걸린 달력, 지난 달력의 그림을 액자로 걸어놓은 사람들에게 그 그림은 더이상 이철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동안 '깊은 평화'와 '작은 힘'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마음'과 '행복'에 대해 되물었다.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노력은 계속 돼야겠지만, 지금 얻을 수 있는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까지 유보해놓을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곳에 이철수의 그림이 '작은 힘'이 되었으면 더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이다.


태그:#이철수, #목판, #이현주, #장일순,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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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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