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행기는 2010년 4월 14일~6월 26일까지 중국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스촨(四川: 동티벳), 북베트남, 북라오스를 배낭여행하며 연모하는 여인(女人) 어머님에게 부친 편지에 기초합니다. 현대적인 건물이나 관광지가 아닌 소수 민족이 사는 동네와 깊은 산골 오지를 다니며, 일기를 대신하여 적은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따스한 사람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편지를 차례로 연재 기록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리장 – 짙게 분칠한 아가씨, 수줍은 슈허 아가씨어머님,
글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리고서는 괜스레 좋아라 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글에 대한 마음을 둔 저이기에, 다른 무엇보다 아름답거나 귀한 글귀가 있으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저 또한 그러합니다. 하지만 글이 너무 성의 없는 것은 아닌지, 너무 쉬이 구한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에, 배낭에 들어간 글을 다시 유스호스텔 침대에 앉아 비밀스럽게 꺼내봅니다. 그것은 제가 본 글자 가운데 가장 재미난, 동파문자입니다.
리장(麗江), 어머님, 리장은 옥룡설산의 눈물(雪河)이 송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고성으로 흘러들면 수양버들은 물 따라 흐르고, 자갈길(砲石)은 고택을 함부로 넘나드느라 (자갈길을 따르면 길을 잃지만) 냇물을 따르면 길을 잃지 않는 나시주(纳西族)의 마을입니다. 차마고도의 오래된 길과 일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동파문자(東巴文字)는 리장의 문 앞에 힘차게 돌고 있는 수차(水車)처럼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놓곤 하며, 이곳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일본 할아버지께서는 길을 잃고 시간을 잃어 버린 채 '치히로'로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따리(大理)에서 150여km(버스로 3시간) 떨어진, 해발 2400m의 리장은 따리의 각진 성벽의 고성과는 다른, 사자산을 언덕 삼아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리장은 신도시와 고성(古城)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아마도 관광객과 배낭 여행자가 찾아드는 골목은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된 고성일 것입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서면, 커다란 수차가 시간을 돌리곤 합니다. 중국 관광객들은 물밀듯이 밀려와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자세로 수차와 나란히 서곤 합니다. 수많은 관광객만큼이나 사진들이 시간을 잡아내려 합니다.
넓은 광장은 수많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여로이며, 자갈길은 '고가(古家)로 길을 흘러들고 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서로의 사랑을 오래도록 간직하길 바라며 쇠때(열쇠)를 달 것을 강요하지만 혼자 온 배낭 여행객은 애써 외면하며 스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녀 윤이 나는 그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그러면 은행에서 우체국, 반찬 가게에서 전통 의상 가게, 잡화점에서 동파지(東巴紙)로 만들었다며 동파의 이름을 내세운 가게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골동품이 가득한 상점 안의 흑백 포스터들과 함께 저마다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듯합니다.
흘깃흘깃, 비틀비틀 거리며 스팡지에(四方街)에 이르면, 나시주 할머니와 두어 분의 할아버지께서 오래된 확성기를 켜놓고 둥근 원을 그리며 춤을 춥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신기한 듯 바라봅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손짓에 한 마리의 학이 내려앉았는지 하늘하늘 거리며, 얼굴은 속세의 경계를 넘나드는지 무심(無心)한 표정입니다. 등에 달린 일곱 개의 동그라미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상징한다는, 어디에서 본 얇은 지식을 불러보지만 나시주 삶(옷차림)은 현대인의 삶과 다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할머니의 춤사위 만이 거리의 박물관으로 다가옵니다.
스팡지에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가슴 설레며 헤매는 길입니다. 길을 잃어도 즐거운 길입니다. 분명히 왔던 길이라 하여 되돌아가지만 언제나 새 길이며, 고택들은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상품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반들반들한 자갈길은 윤이 나서 좋고, 골목으로 흐르는 냇물은 시원해서 좋습니다. 저마다의 여행객은 돌다리를 배경으로, 수양버드 나무를 친구삼아 사진을 담곤 합니다.
리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밀려 나가며 오래된 고가(古家)는 일게 상점일 뿐이지만 걷는 즐거움을, 길 잃는 설렘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친구가 그립다고 동파지를 하나 사서 엽서를 적어봅니다. 리장의 골목길은 유심히 따라가면 홀로 된 사람은 저 하나뿐인 듯합니다.
리장은 아침과 오후, 그리고 저녁 풍경이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아침에는 떠나는 이들과 큰 가방을 멘 채 학교에 가는 아이들, 그리고 사람보다 더 많은 물고기들이 냇물에서 헤엄치며 노닐고, 스팡지에는 열댓 분의 할머니들이 춤을 추곤 합니다. 오후에는 물밀듯이 밀려온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준비하려 고가의 문턱을 넘나듭니다.
저녁이 되면 냇물 따라 등(紅燈)이 붉게 물들면 사람들은 '치히로'의 친구인 냥 저마다 카페에 앉아 술을 마십니다. 만화가 할아버지가 본 것처럼, 카페 안에서는 큰 음악에 맞춰 큰 춤사위가 펼쳐지면 손님들은 조그마한 나뭇조각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흥을 돋웁니다. 이럴 때면 문득 슬퍼집니다. 혼자라서 그 카페에 앉아 같이 흥을 나누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다음 세대에 들려줄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역설적이게도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고성에서 술 마시고 힘차게 춤출 수 있는 곳이 리장입니다.
어머님,
저 아래 나라 루앙프라방이 가진 아침의 거룩함을 떠올리면, 리장의 저녁은 사치스럽습니다. 모든 고가가 상점으로 탈바꿈한 것 또한 이색적인 경험이지만 상품만 진열되어 있지 문화는 사라진 듯한 느낌입니다. 고성은 곱게 늙어가려 하는데 사람이 자꾸만 때를 입히려 하는 듯합니다. 고성의 밤이 잠시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날아 밝아오면 지난밤의 사치스런 향기를 냇물에 흘려보내고, 새로이 걷고 있는 저를 마주하게 됨을 알고 있습니다. 리장은 사치와 망각, 중독을 수양버들 바람에 묻혀 시나브로 저에게 흩뿌립니다. 고성은 곱게 늙어가려 하는데 사람이 자꾸만 때를 입히려 하는 듯합니다.
윈난에 꼭 숨어 있던, 그네들끼리 살던 동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지진에 의해도 무너지지 않은 옛 어른들의 숨겨진 비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동파 문자는 그들의 제사장에 의해 천 년 동안 이어져 왔고 세계기록유산에도 올랐습니다.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을 지닌 리장, 무엇이 문화인지, 기록은 과연 생존하는지 묻게 되지만, 리장의 골목길을 걷게 되면 이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됩니다. 윤이 나는 자갈길을 걷는다는 건,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아름다움입니다. 연인끼리 걷게 되면 더욱 사귐이 깊어질 것이며, 친구끼리 걷게 된다면 오랜 추억으로, 가족끼리 다녀간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줄, 그런 고성입니다.
그리고 슈허 이야기리장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이 조금 거슬린다면, 한적한 (작은 동내를 얻고 싶다면) 슈허고진(束河古鎭)으로 오세요.
어머님,
리장에서 4km 떨어진 거리에 슈허가 자리합니다. 옛 시절에는 마방의 역참으로 큰 이름을 얻었지만 오늘날에는 리장에 묻혀 조금 조용한 듯합니다. 슈허는 고래로 가족 공예품으로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너 집 건너며 가죽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쉬이 볼 수가 있습니다.
슈허는 어쩜, 리장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옥룡설산의 물이 흘러 작은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숫물이 다시 마을 안으로 흘러듭니다. 호숫가에는 이 마을의 주신인 피장조사가 모셔진 절(寺)도 있습니다. 슈허에서 자갈길을 오래도록 걸어도 쉬이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강 사이로 고택이 놓여 있고, 고택 사이로 자그마한 냇물이 흘러내리고, 커다란 수양버드나무가 머리 숙인 채 이야기를 나누는 동내입니다. 슈허에는 유난히 카페가 많이 있으며, 웨딩스튜디오 또한 많습니다. 아마도 아담한 마을 풍경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는 듯합니다. 밤이 되면 카페에서 음악이 골목으로 흘러들곤 합니다. 이른 아침에는 새소리가 알람처럼 들려올 것이며, 바람이 문득 두드릴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느 날 윈난(雲南)의 어느 자리에 머무른다면, 아마도 그곳의 슈허고진이 될 듯합니다. 리장과 닮았지만 크지 않고 아담하며,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고가(古家) 앞 마당에는 채소가 푸르게 자라는 마을, 슈허입니다.
2010. 06. 13 리장(麗江)과 슈허(束河)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