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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 3층에 순이가 다니는 공장이 있어. 작업장은 약 8평, 재단판과 열다섯 대의 재봉틀이 비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순이를 포함해 모두 32명이야. 공장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는 1.5미터, 천장이 낮으니 고개를 들고 걸어 다닐 수가 없어. 늘 구부정한 자세로 움직이며 일을 해. 원래 천장까지 높이는 3미터야. 이걸 위 아래로 쪼개 다락방을 만들었단다. 좁은 공간에 기계를 한대라도 더 들여놓고 옷을 만들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잖아. 사업주는 돈에 눈이 멀어 노동자의 불편은 신경도 쓰지 않았어.…작업장 안에는 창문은커녕 환풍기도 없어.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동굴이야. 옷감을 자르고 재봉할 때마다 먼지가 엄청 일지만 빠져 나갈 구멍이 없어.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와.…-<전태일 불꽃이 된 노동자>-'열세 살 순이'중에서

전태일이 노동자로 살았던 1960~1970년대, 우리나라 봉재공장의 실정이다. 규모에서 차이가 있을 뿐, 작업환경과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대부분 이랬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작업실에서, 부모의 그늘아래서 꿈을 키워야 할 13살 남짓의 어린 노동자들은 각성제를 먹고서라도 물건 하나를 더 뽑아내야 하는 기계취급을 받았다.

1948년에 태어나 너나없이 먹고 살기 힘들었던 1950년대에 아동기를 보낸 전태일은, 가난한 집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갖은 돈벌이를 하게 된다. 이런 그가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된 것은 17살 때. 그는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비인격적인 노동 환경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은 50원이다. 하지만 공장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한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들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 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속 '전태일의 일기'중에서

하지만 전태일 역시 이와 같은 공장의 노동자. 그것도 기술자의 온갖 치다꺼리와 잔심부름까지 해야만 하는 시다(작업보조자)에 불과했다. 하루 14시간 꼬박, 하루 종일 죽도록 일한 대가로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50원을 받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재봉틀을 배운 덕에 남들보다 짧은 기간에 시다를 거쳐 미싱사가 된 전태일은 위의 열세 살 순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기 일쑤인 어린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안정된 미싱사의 월급을 등지고 다시 힘든 시다를 거쳐 재단사가 된다.

당시 대부분 작은 규모의 봉재공장에서는 재단사가 사장 대신 공장의 일을 지시하고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태일은 자신이 재단사가 되면 순이처럼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어린 노동자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지치고 아픈 노동자들을 대신해 새벽까지 남아 일을 해준다거나, 아프고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약과 풀빵을 사주는 정도의 도움밖에 줄 수 없음에 전태일은 사장에게 노동자들의 처우를 요구하다가 공장에서 잘린다. 이런 그가 공사장 등을 전전하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엄연하게 존재는 하지만 있으나 마나 한 '근로기준법'이었다.

경향신문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보도 사진
 경향신문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보도 사진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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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불살라 노동자 구하겠단 결심 한 전태일

나이어린 여자들이 좁은 방에서 하루 최고 16시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 것 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게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시내 청계천 5,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 내 각종 기성복 가공업에 종사하는 미싱사, 재단사, 조수 등 2만 7천여 명으로 노동청은 7일 실태조사에 나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업체는 전부 고발키로 했다. 노동청은 이밖에 5백여 개나 되는 서울 시내 기성복 가공 업소도 근로자의 실태를 조사키로 했다.-책 속 1970년 10월 7일 자 경향신문 보도 일부 정리

숱한 우여곡절 끝에 전태일을 통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상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관련청은 조사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노동청의 방관과 근로실태를 조사하여 개선에 앞장서야 할 근로감독관과 사업주들의 방해로 전태일을 주축으로 한 삼동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이에 전태일은 자신을 불살라 수많은 노동자들을 구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전태일 불꽃이 된 노동자> 겉그림
 <전태일 불꽃이 된 노동자> 겉그림
ⓒ 한겨레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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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불꽃이 된 노동자>(한겨레아이들 펴냄)는 1970년 11월 13일, 자신을 불살라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을 구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쓴 책이다. 저자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노동운동가로 여러 매체에 르포, 시, 칼럼 등을 기고하고 있는 르포작가 오도엽.

저자는 가난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던 전태일의 불우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가 수많은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기까지의 일을 써 내려갔다. 전태일이 이웃(노동자)들과 고통을 나누며 함께 아파한 숭고한 삶의 모습을 자신의 딸 겨리에게 쓰는 편지형식으로 들려준다. 편지 형식이라 훨씬 살갑게 읽힌다.

겨리야! 이제 전태일 이야기를 마쳐야겠네. 전태일의 분신(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르는 일) 항거가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강하게 기억해. 하지만 전태일을 제대로 알려면 죽음이 아니라 '삶'을 읽어야 해.

전태일의 삶속에 우리가 찾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있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삶, 불의에 맞서 저항하는 삶,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려고 친구들과 어우러지는 삶, 바로 '살 맛 나는 사람 세상을 꿈꾼 바보 청년' 전태일의 삶을 만날 수 있어. 4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불행히도 이웃에는 고통 받고 아픈 사람이 여전히 많단다.…겨리야, 가끔 내가 누리는 행복에 가려 미처 보지 못한 아픈 이웃이 없는지 돌아보자꾸나-책에서

훗날 우리 아이들이 어떤 계층으로 살아가든 기억했으면

신영복은 <전태일 평전> 추천 글에서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이야기 중간중간에 인용, 자신이 누릴 권리나 편안함보다 이웃의 고통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려했던 그의 숭고한 삶을 우선해 들려준다.

그 때문일 거다. 어린 그가 돈벌이 때문에 동생 순덕이를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던 날을 회상하여 쓴 일기는 목이 메고 눈물이 흘러 쉽게 읽지 못했다. 결국 어린 동생을 고아원에 보내게 되는 과정, 얼마 후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모여 살게 되면서 순덕이를 데려오지만 어린 순덕이가 고아원에서 얻은 마음의 병으로 하루종일 벽만 바라봤다는 이야기는 너무 안타깝고 그리고 너무 마음 아팠다.

'어떤 인연으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을까?' 궁금한 마음에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 한 사람으로 낯익은 저자의 프로필을 우선 읽었었다. 저자는 대학 시절 전태일에 관한 책을 읽은 뒤로 학생 운동을 시작, 1990년에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운동을 하다 대전교도소에 수감됐었다고 한다.

이런 이력의 저자는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노동자는 어떤 사람?' '근로기준법이란?' '노동자 단결권과 파업이란?' 등 훗날 노동자가 될 우리 아이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어린이 책에서는 아무나 쉽게 다루지 못할 노동법 관련 상식들을 쉽고 명쾌하게 들려준다. 덕분에 대략 알고 있던 노동 관련법들을 쉽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만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은 기분이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일이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단다. 태일이는 자신이 겪은 밑바닥 삶을 원망하지 않았어, 일기에 쓴 대로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 온' 태일이는 배고픈 이웃을 만나면 자신의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줬고, 아픈 이웃을 만나면 자신도 함께 몸살을 앓았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이웃의 고통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도리다. 이것이 인간의 과제다." -책 속 '전태일의 일기'중에서

전태일 열사의 일기 한 구절이란다. 내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부분이라 밑줄을 그었다.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원망하는 대신 그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 내려 애썼고 그 와중에도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 했던 그 의지와 정신을 우리 아이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훗날 어떤 계층,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든 전태일 열사를, 인간 전태일을 기억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싶다. 그리하여 남보다 더 많이 누릴 수 있음에 오만하지 말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알게 하는 그런 지침이 되고, 어려움 앞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그런 힘과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기 전인 지난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분신 40주년이 되던 날, 관련 뉴스를 보던 내 아이들이 그에 대해 물었지만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아 대략만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이 책을 권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책을 계기로 지난 여름 웨딩뷔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종일 발이 젖었었던 고3 아들과 2010년 오늘의 노동 현실을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 오도엽은?
대학시절 전태일의 일생을 다룬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게 된 그 감화로 학생운동을 시작, 1980년대 최루탄 가스가 가득한 곳에서 데모꾼, 수배자가 되어 떠돌다 1990년 12월 위장취업자가 되어 공장에 들어간다. 이런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창원공단에서 용접공으로 지내다 1994년 봄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침입한 이들에게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대공분실로 끌려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그는 그곳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난 뒤로 생전 처음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쓰게 된 글들이 감옥 담장을 몰래 넘어 1997년 '전태일 문학상'을 받게 된다.

징역을 살고 나온 이후 용접공, 도장공으로 살던 그는 2005년에 이런 생활을 접고 사진기와 녹음기를 들고 농민과 노동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2006년 우연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만나 여사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오마이뉴스>를 비롯하여 <삶이 보이는 창> <작은책> <경향신문>, <참세상>, <위클리 서울> 등에  시, 르포, 칼럼 등을 기고하고 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 기자, 작가 혹은 르포작가라고 부르지만 이소선이 자신에게 부쳐준 '건달'이라는 이름이 맘에 꼭 든다고.그간 쓴 책에는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 <밥과 장미-권리를 위한 지독한 싸움>이 있다. (책 프로필에서)

덧붙이는 글 | <전태일 불꽃이 된 노동자>|오도엽 글 이상규 그림|한겨레아이들 펴냄|2010.11.13|1만원



전태일, 불꽃이 된 노동자

오도엽 지음, 이상규 그림, 한겨레아이들(2010)


태그:#전태일, #근로기준법, #청계천 평화시장, #삼동회, #바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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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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