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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목마을 뒷길로 접어들어 산행을 시작하는 곳에 선 감나무이다. 여름철에 힘드려 일한 보람으로 풍성한 열매를 달았다.
▲ 등산로 입구 감나무 치목마을 뒷길로 접어들어 산행을 시작하는 곳에 선 감나무이다. 여름철에 힘드려 일한 보람으로 풍성한 열매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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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친구

금년 시월의 마지막 날은 고등학교 친구들 등산모임인 '산친회'에서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적상산을 등산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친구들은 버스로 광주에서 출발하고 나는 대전에서 혼자 출발하여 무주 IC에서 만나기로 했다. 5시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마쳤다.

광주 친구들에게 전화해보니 무주IC 도착 예정시간이 10시다. 계룡산 기슭에서 무주 IC까지 1시간이면 족한지라 갑자기 1시간 반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잘 됐다 싶어 다시 눈을 붙였다. 깨어보니 9시가 넘었다. 서둘러 출발했다. 덥수룩한 수염도 그대로이고 치과치료 때문에 뽑은 앞니 임시치아도 챙기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평소보다 더 초췌한 행색을 보이게 됐다.

집사람이 산행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고 내버려둔 탓이다. 어제 홍천서 같이 오면서 적상산 등산을 권했지만 집사람은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번 산행은 혼자서 다녀 오세요" 하면서 사양했다. 집사람과 같이 산에 다니는 일은 오래된 습관이다. 그러나 이번 산행은 좀 별난 사연이 있다.

집사람의 생일은 음력 9월 6일이다. 10월 마지막 주중이다. 아들이 딸과 상의하여 10월 30일부터 다음날까지 설악산 콘도에서 엄마의 생일 축하하기 위한 가족모임을 주선한 모양이다. 일주일 정도 남겨 놓고 나에게 알렸다. 미리 약속한 적상산 등반 일자와 겹치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집사람은 나의 일정을 물어보지 않은 자기 잘못을 시인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생일 당일 날 서울로 가서 아들, 딸 가족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돌아왔다. 불과 며칠 전이니 아직 여운이 남아있을 법하여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혼자서 친구들의 적상산 산행에 동참했다.

내가 현재라면, 조상은 나의 과거이고, 자식을 포함한 후손은 나의 미래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시간의 연속선 상의 한 점인 나는,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나와 본질적으로 같다. 조상이나 자식들이 소중한 이유다.

내 경우, 자식들과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별일 없느냐?" "예" 가 대화의 전부다. 사고방식 차이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위한 공통분모가 없다. 나도 아버지와 대화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부모님의 나이 때를 살아보니 그 때 아버님의 행동이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애들도 그럴 것이다. 서둔다고 될 일도 아니고 억지로도 힘들다. 때가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친구들은 다르다. 특히 학교 동창들은 의미가 각별하다. 한 친구가 당면한 일을 털어놓으면 모두의 문제가 된다. 더구나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도 자주 등장한다. 꿈과 희망의 시절이다. 종일 쫑알거려도 화제가 마르지 않는다. 직장 일에 매달려 있을 때는 잊고 살아온 시절이고 친구들이다. 다시 현실로 이어졌다. 소중한 인연이다.

지도에 븕은 실선으로 표시한 것이 우리들이 답사한 적상산 등산코스 였다.
▲ 등산로 지도에 븕은 실선으로 표시한 것이 우리들이 답사한 적상산 등산코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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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 마을쪽에서 본 적상산 아름다운 암장들이다. 내겐 여인의 치맛자락으로 보이지 않지만, 적상산으로 명명한 선조들의 눈에는 그리 비친 모양이다.
▲ 적상산 서창 마을쪽에서 본 적상산 아름다운 암장들이다. 내겐 여인의 치맛자락으로 보이지 않지만, 적상산으로 명명한 선조들의 눈에는 그리 비친 모양이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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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등산

적상산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하며 높이 1034m의 산이다.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한 정상부근에는 4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에 붉게 단풍이 들면 여인의 아름다운 붉은 치마자락을 연상하게 되어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정상부근은 펀펀한 분지형태인 두터운 토양층이라 나무숲이 매우 울창하다. 적상산과 1052m인 향로봉이 마주하고 있어 별로 힘들지 않게 모두를 답사할 수 있다. 정상 일대가 평탄한 반면 산 아래에서 산 허리까지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산세가 험준하고 물이 풍부하므로 전란 때는 인근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란한 곳이기도 하다.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천혜의 자연요새인 까닭에 적상산성(사적 146)이 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사(護國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안국사 만 남아있다. 안국사는 서방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사찰이다. 극락정토신앙이 강한 우리민족의 정서와 잘 맞는다.

처음 산행을 시작하는 친구들과 형수님들. 참으로 다정스럽게 잘 간다.  5분도 못되 실력이 들어났다.
▲ 치목마을에서 처음 산행을 시작하는 친구들과 형수님들. 참으로 다정스럽게 잘 간다. 5분도 못되 실력이 들어났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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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IC에 도착하니 9시 50분이다. 잠시 후 도착한 버스에 오르니 모두가 반갑고 그리운 얼굴들이다. 10시 20분 산행 시작 지점인 치목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치목마을에서 10시 20분에 오순도순 같이 시작한 산행이 10여분 지나자 평소 등산을 하면서 건강을 관리해온 친구들과 그렇지 못한 친구들 사이엔 핸드폰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거리가 벌어졌다.

내가 속한 그룹은 대열 중 뒤쪽 10명 정도가 속한 그룹이다. 이런저런 친구들의 안부를 포함해서 잡다한 인생사에 관한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나의 평소 산악회 등산에 관한 소신과 부합되는 부분이다. 젊은 시절에는 밤을 지새우며 술과 더불어 우의를 다지기도 할 수 있어 이런 시간의 소중함을 몰랐지만 요즈음은 따로 시간을 마련하기가 마땅치 않다.

남쪽계곡의 급경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와 농익은 단풍잎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룬 '송대'를 거쳐 안국사 역대 스님들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군을 지나니 정상으로 통하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로 오르내리고 있다. 주인공을 죽이려고 큰 칼 춤을 추면서 접근하는 무사를 권총알 한방으로 날려버린 <인디아나존스> 영화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안국사에 이르니 선두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산을 오를 때는 능력에 따라 앞서고 뒤따르지만 점심 때는 다시 한 자리에 모인다. 반주 한 잔씩 돌리며 각자 준비해 온 점심을 펼쳐놓으니 옥쟁반 위에 산해진미가 아닐지라도 절로 넘어간다.

부지런한 선두팀은 어느새 적상산 정상을 답사하고 향로봉 쪽으로 향한다. 내가 속한 후미팀은 적상산과 향로봉 사이의 안부를 지나 곧장 서창마을 방향으로 하산한다. 1시 50분이다.

서문 부근의 적상성터 모습이다.
▲ 성터 서문 부근의 적상성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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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지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면서 사진도 찍고 서문지 안내판 내용도 음미한다. 적상산성이 축성된 시기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삼국시대로 추정하는 된다. 서문은 2층 3간으로 된 적상산성의 출입문이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았다.

"43년 전 졸업장을 들고 같이 교문을 나선 친구들 중 이미 10%는 본 자리로 돌아갔고, 20%는 건강이 허락치 않아 우리와 같이 산행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우리들 중 절반 정도나 신행을 즐길 수 있을 지 몰라. 건강을 잘 챙겨 오래도록 산에 다니세."

세월의 무상함을 본 친구 얘기다. 고려 말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하던 최영장군의 전설이 담긴 장도바위를 지나 서창마을에 이르렀다. 오후 6시 40분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가 넘도록 산길을 오르고 내려왔다. 흐뭇한 만족감과 피곤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두부에 곁들인 한잔의 막걸리가 어찌 호사이겠는가?

서문 초입 막걸리집에서 육신의 피로를 약주 한잔으로 달래보는 재미가 좋았다.
▲ 두부와 막걸리 서문 초입 막걸리집에서 육신의 피로를 약주 한잔으로 달래보는 재미가 좋았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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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와 어죽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정담까지 마치고 다시 무주 IC에 이르렀다. 이제 다시 헤어져야 할 때인 모양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광주의 친구들은 88올림픽도로에서, 나는 높고 맑은 남쪽 하늘을 한 가슴에 안고 대전-충무고속도로 위에서 맞았다.


태그:#적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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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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