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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다녀오면 사람 된다고 했다. 결혼하면 철든다고 했다. 자식새끼 낳으면 어른 된다 했다. 난 사실 그런 말 따위 믿지 않는 쪽이지만, 많은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보니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영 틀린 말씀이 아닌가 보다 하고 그냥 살았다.

 

근데 말이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 군대 두 번 다녀온 '타의적 애국지사 청년'의 신보를 들어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아무리 밟혀도, 혹은 이리저리 찌그러져도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란 걸 그가 증명한다.

 

그는 여전히 철이 안 들었고, 노는 게 좋고, 자기한테 덤비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날려줄 독기가 남았다. 그리고 가끔 '아, 형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래요?'라고 징징거리며 물어볼 때, '쉰소리 말고 이거나 마셔!'라고 한 마디 해줄 내공도 함께 말이다.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 청년은 박재상, 바로 '싸이(PSY)'다.

 

싸이의 색깔 분명한 정규 5집 <싸이파이브(PSYFIVE)>

 

사실 이런 병역문제 외에도 그를 둘러싼 말들은 많았다. 학업에 대해선 그가 졸업한 버클리가 UC 버클리냐 버클리 음대냐로 왈가왈부, 음악에 대해선 싸이가 음악에 샘플링 말고 한 게 뭐 있냐며 또 왈가왈부, 도덕적 결함에 대해선 그는 결국 대마초 사건을 일으킨 연예인 아니냐며 또 왈가왈부.

 

이처럼 싸이는 그동안 온갖 잡다한 대중들의 비난에 시달려왔기에, 내 생각엔 그가 언젠가는 기가 한풀 꺾여 그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굽실거리는 가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괜히 주는 거 없이 밉상 받는 스타일이라고 누군가 또 그러지 않았나. 그렇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존재했다. 어떤 의미로는 정말 존경스럽다. 이건 정말 농담이 아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그의 심히 고차원적인 마인드가 고스란히 담긴 신보이자 정규 5집인 <싸이파이브(PSYFIVE)>가 발표됐다. 음악 얘길 좀 하자면, 사실 랩을 자신의 주력으로 음악활동을 펴는 싸이지만, 그는 예전부터 팝 메탈, 힙합, 일렉트로닉, 그리고 현악과 어울린 유려한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정말 한 단어로 규정하기 힘든 소리를 들려줬던 뮤지션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과거 음반들은 그가 공공연히 애정을 밝혀왔던 닥터 드레(Dr. Dre)나 LMFAO. 그리고 팻보이 슬림(Fat Boy Slim)이나 미르와이즈(Mirwais Ahmadzaï), 혹은 익스트림(Extreme) 등이 마구 섞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음악은 분명 그만이 가지는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될 만큼 특이하고 또 재밌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신보에서도 그의 이러한 전방위적인 음악적 특징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에게 이번 음반에서 가장 들을 만한 곡을 꼽으라면 '19금' 딱지가 붙어있는 세 곡. 즉 첫 번째 트랙인 '싸군', 양동근이 피처링한 '서울의 밤거리', 마지막 트랙인 '나의 Wanna Be'를 선택하고 싶다.

 

물론 5집 <싸이파이브> 발표 이전에 선공개된 '쿨(Cool)'의 이재훈이 피처링한 '내 눈에는', 서인영의 피처링이 담긴 'Thank You' 같은 곡들도 훌륭하지만, 이 '19금' 곡들에 비하면 사실 굉장히 심심한 곡들이다. 게다가 '사랑'에 대한 노래를 듣고 싶다면 얼마 전 발표된 이적의 4집 <사랑>으로 이미 충분하다. 싸이의 이번 5집에서 이 '19금' 딱지가 붙은 세 곡을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것. 나는 그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싸이파이브>의 백미, '19금' 딱지가 붙은 세 곡

 

첫 번째 19금 곡이자 이 음반의 첫 번째 트랙인 '싸군'. 이 곡은 싸이 자신이 이제껏 출연했던 CF의 상품명을 줄줄이 열거하며, 바로 그들 업체가 제공한 음악이라 능글능글 눙을 치며 시작한다.

 

그리고는 "대마 1년, 자숙 1년, 대체복무 3년, 재판 1년, 현역 2년, 합이 8년, 데뷔 10년에 활동 2년"이라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가슴을 저미는 가사와 그가 자신의 음악에서 자주 사용하는 브라스가 어울린 강력한 비트가 인상적인 곡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안에서 특유의 라임(노래의 일정한 자리에 규칙적으로 같은 운을 단 것)을 살리며, 10년 동안 걸어온 그의 딴따라 인생을 풀어내는 직설적인 가사는 역시나 귀에 '팍'하고 꽂히고 오랫동안 맴돈다. 그의 랩이 훌륭한지 않은지는 알 것 없다. 그저 신나고 재밌다. 이렇게 유머러스한 랩을 과연 싸이 외에 그 누가 따를 것인가.

 

또한 이번 음반의 타이틀곡이자 두 번째 트랙인 'Right Now'는 그의 말대로 상당히 시원한 곡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들려질 이 곡은, 한때 이 씬을 풍미했다가 최근 힙합트로닉으로 선회한 모습을 보여준 '용감한 형제',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 지겨워진 과거 그들의 댄스튠보다 훨씬 더 신난다. 또한 "내 목에 기계소리 빼!"를 외치며 오토튠에 대한 노골적인 반박을 알리는 가사와 강력한 기타 리프가 감싸는 이 곡은, 이러한 이유로 분명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요소를 꽤 착실하게 갖춘 곡이다. 그가 이전에 발표했던 3집 '챔피언'의 아성을 뛰어넘진 못할지라도 타이틀곡으로 크게 손색은 없다.

 

이후 흘러나오는 '설레인다'나 정엽과 함께한 '그래서 그랬어'와 같은 곡들은, 사실 대중적인 균형의 측면에서는 몰라도 감상의 측면에선 확실히 밋밋하다. 외려 그런 곡들보다는 미디어에 비치는 연예인들의 이중적인 가식을 꼬집어 내는 듯한 '솔직히 까고 말해'나 양동근이 피처링한 곡이자 이 음반의 두 번째 19금 곡인 '서울의 밤거리' 같은 곡들이 훨씬 강하게 각인된다.

 

특히 '서울의 밤거리'는 싸이나 양동근이 아니면 그 누구도 쉽게 쓸 수 없는 가사가 인상적인데, 건조하고 묵직한 비트와 그 속에 흘러나오는 다분히 질펀한 랩은 들으면 들을수록 조금씩 빠져든다. 아울러 이 곡 가사에 나오는 밤 문화에 통용되는 지역 명칭과 업소 이름, 혹은 은어들을 다 알아들었다면 당신은 약간 문제가 있을지도… (참고로 나는 절반쯤 알아들었다) .

 

마지막으로 이 음반의 끝 곡이자 세 번째 19금 곡이기도 한 '나의 Wanna Be'는 진솔한(?) 그의 인생철학이 펼쳐지는 곡이다. 어쩌면 이 음반 가운데서 가장 담백하게 잘 빠진 곡일지도 모르는 이 곡은, "가슴에 품은 어릴 적 꿈은 방금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날아가, 조금만 더 잘 참다가 때려 치든 독립하든 선택하자, 평생 이럴 순 없잖아, 로또는 X도 누가 먹는 거니, 주식 시장에 눈먼 돈은 누가 먹는 거니" 같은 가사로 메워져 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언제나 늦은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이 사회에서 철이 들어야만 하는 내 친구들과 나의 삶의 대한 푸념과 닮아 있어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는 "뽀대나는 세단 하나 끌고, 여인네들의 시선을 끌고, 똘마니들 우루루루 끌고, 신용카드 쫙쫙 긁고, 까짓 거 한번 사는 거 X나게 폼나게 멋나게 간지나게 살다 가는 게, 그게 나의 워너비"라는, 사실 그 누가 봐도 조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진정한 워너비를 그는 뻔뻔하게 노래한다. 솔직해지자. 이런 속물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비단 나와 당신만이 아님을 그가 대신 노래해주는 것이니까.

 

듣는 이를 움직이게 하는 '철부지' 싸이의 음악

 

결국 음반을 다 듣고 난 후의 느낌은 새벽에 만난 동네 형과 오랜 대화를 나눈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거나 혹은 세련되고 건설적인 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 유쾌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잘 나가다 푹 꺼지고, 다시 살아나려 하다가 또 푹 꺼지고. 그러한 굴곡의 길을 지나온 그가, 여전히 기세등등한 위세로 가슴 안에 이야기를 솔직한 '쌈마이' 근성과 타고난 딴따라의 능력으로 뻥뻥 외치는 모습에, 난 그저 웃으며 그의 빈 술잔에 잔을 채울 수밖에.

 

이렇게 싸이의 음악은 그렇게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그 어떤 움직임이든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역시 그는 아직 철이 안 들었다. 그리고 근엄한 이 사회가 원하는 '맞춰진 인간'이 안됐다. 하지만, 그래서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그 어떤 환경에도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 뮤지션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니까.

 

그러니까 우린 그냥 그가 들려주는 소리에 마음을 비운 채 매달리면 된다.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힘을 빼고 귀를 열고, 그리고 스스로 솔직해지자. 그러면 그것은 아마도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다.


태그:#음반의 재발견, #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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