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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와 들이 만나는 공간의 접점을 걸었다.
▲ 강화 나들길1 하늘과 바다와 들이 만나는 공간의 접점을 걸었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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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웃음소리 바람이 되었고, 길 위에 딛는 걸음 사뿐사뿐 조심스런 자욱이 되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회색빛 하늘은 차분하고 고요하게 '밀레'의 감성으로 나를 지배합니다. 미묘한 색조로 허공을 장식한 이 가을날의 아름다운 하늘이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어떠한 타산과 욕구도 침잠하게 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간이 눈앞에, 우리의 발걸음 앞에 아무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러나 보입니다.

흐린 가을 하늘... 수증기를 머금은 옅은 구름이 편서풍의 영향으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듯 몸이 감지합니다. 습한 축축함과 야릇한 서늘함이 나의 감각을 이상하리만치 자극하며 은밀하게 서서히 나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겪는 황당함과는 사뭇 다른 애매한 긴장이었습니다.

4B 연필을 15도 각도로 비스듬히 눕혀 스케치북 위에 엷고 가볍게 무수한 선을 그으면 어느새 백색의 공간은 흐릿한 명암에 젖은 하늘빛 색감으로 채워지는 듯 상상이 되곤 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매력적인 흑백의 신비... 나는
오늘(2일) 강화도 갯가의 '외성'길을 걸으며 그걸 체험했습니다.

나들길에서 만난 코스모스, 그리고 좋은 사람들
▲ 강화 나들길2 - 코스모스 꽃길 나들길에서 만난 코스모스, 그리고 좋은 사람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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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깃든 논두렁 둑방길을 따라 하늘과 바다와 들이 만나 펼쳐놓은 나들길을 걸었다.
▲ 강화 나들길6 가을이 깃든 논두렁 둑방길을 따라 하늘과 바다와 들이 만나 펼쳐놓은 나들길을 걸었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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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가의 갯골로 강화라는 섬 속의 물, 민물이 탁류가 되어 바다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갯골의 한 쪽 가장자리에 바위와 흙이 쌓여져 강화의 외성(外城)이 되었고, 바닷물을 막는 둑방이 되어 그림 같은 나들길로 놓여 있었습니다. 꽃씨, 풀씨의 씨앗이 바다와 섬의  바람결에 흩뿌려져 피어난 들꽃, 들풀들은 이슬에 젖은 수줍고 촉촉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습니다.

강화대교를 건너면서부터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육지와 섬 사이를 가르는 해협이자 바다이기도 하고,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강의 하구이기도 한 소금의 강 염하(鹽河)는 요란하지 않게 고요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회색빛 하늘과 회색빛 물, 그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접점 사이에 빨갛고, 하얗고, 노란 들꽃들이 천연의 염료와 무늬가 되어 순수한 찬란함으로 피어있었습니다. 나는 일행들과 그 길을 따라 걸으며 하늘과 바다와 섬과 자연,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감상했습니다.

광성보에서 손돌목 돈대, 용두돈대로 향하는 소나무 숲길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 강화 나들길 4 광성보에서 손돌목 돈대, 용두돈대로 향하는 소나무 숲길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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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보이고, 사랑하게 되면 느껴지는 것이 사람과 자연이 가진 원초적 본성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를 기다리며'라는 황지우의 시 한 소절을 떠올려 이입하며 나는 그 길을 사랑하는 누군가로 상상하며 걷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로 가고 있다'

그렇게 나는 잠깐의 시간을 짧고 자유롭게 소비하며 나만의 애틋한 낭만을 향유했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즐기는 나만의 유희, 비밀스런 낭만, 그러니까 나들길을 걸으며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가을날의 연정'을 홀로 상상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비가 내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으며 마냥 행복하게 길을 걸었다.
▲ 강화 나들길5 우리는 비가 내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으며 마냥 행복하게 길을 걸었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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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인간의 삶을 품고 있는 역사이자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 속 자연의 풍화와 격변이 남겨져 있는 생명의 핏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못생기고 무딘 발바닥의 촉감으로 밟히는 오늘의 길은 사뭇 달랐습니다. 인간의 끈질긴 삶과 죽음, 전쟁과 고난, 수많은 관계와 인연이 뒤엉킨 파란의 역사가 미세한 가루로 부서져 흙 속에 스며든 흔적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강화 나들길 2구간(호국돈대길) 곳곳에 자리 잡은 갑곶돈대,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강화라는 섬을 둘러싼 진, 보, 돈대는 섬을 지키기 위한 호국의 보루였습니다. 조선의 심장부를 노리는 수많은 외적들이 서해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오기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침략의 항로가 강화 나들길 옆 염하(鹽河)의 물길이었을 것입니다.

'용당돈대' 위를 한바퀴 걸어 돌아보며 강화의 역사, 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강화 나들길6 '용당돈대' 위를 한바퀴 걸어 돌아보며 강화의 역사, 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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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대 위에 올라 염하를 조망하였습니다. 흐릿한 회색빛 물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조심스럽게 거듭하며 가만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건너편에는 빼빼 마른 실뱀의 꼬리처럼 보이는 '문수산성'의 옅은 흔적이 구불구불 이어져 산등성이를 타고 있었습니다. 염하와 문수산성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오래 전 역사 속 이야기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어 희미하게 떠올랐습니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더듬어 가며 당시 최강의 기마 전투력을 자랑하던 청나라 군대와 오합지졸 조선의 군대, 무능하고 무기력한 초라한 조선의 임금을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고, 엉뚱한 충동으로 상상했습니다.

'1636년 평생 바다를 경험하지 못한 초원민족 청나라 용골대의 군사들은 김포지역의 민가를 때려 부수어 판문과 서까래 등으로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염하를 건넜습니다. 방심하고 있던 조선의 병졸들은 살육되었고, 인조의 부인인 중전과 세자는 인질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되었으니... 아, 수북하게 눈 쌓인 길을 맨발로 걸어가 머리를 조아렸던 죽음보다 견딜 수 없었던 치욕이여...'

물목의 폭이 짧게는 불과 2~3백 미터에 불과한 염하를 아마도 청나라 군대는 독수리 같은 살기로 건넜을 것이고, 상륙하여 조선의 병졸들을 무참히 죽이는 참혹한 상상이 순간적으로 섬뜩하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과 치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욕망을 쟁취하려는 인간들의 무서울 정도로 강인한 의지와 자신감, 그리고 광폭한 살기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염하(鹽河)로 스며드는 흐릿한 탁류가 갯골 사이를 흐른다.
▲ 강화 나들길7 - 염하(鹽河)로 흐르는 탁류 염하(鹽河)로 스며드는 흐릿한 탁류가 갯골 사이를 흐른다.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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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위에 남겨진 오래 전 역사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교훈이 되었고, 사연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엉뚱한 충동이 발동된 갑작스런 상상으로 '강화'라는 섬의 역사를 혹시나 무례하게 조롱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조심스레 걱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초행의 자세로 돌아와 일행들의 뒤를 따르며 그들과 한데 어우러져 또 나들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순간 몇 방울의 비가 떨어지더니 이내 가는 비가 되어 대지에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나와 일행은 그 비를 두려워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비를 맞으며 걸었고,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격려하며 걸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따스한 인간미가 아낌없이 발휘되는 촉촉하고 아름다운 가을날의 강화 나들길을 걸었습니다.

<고양올레> 1주년 생일맞이 강화 나들길 걷기 기념 단체사진
▲ 고양올레 나들길 걷기 <고양올레> 1주년 생일맞이 강화 나들길 걷기 기념 단체사진
ⓒ 고양올레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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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팔각정에 둘러앉아 우리는 서로를 위해 고운 노래를 불러주었고, 그에 반응하여 수줍고 착한 미소를 나누어 주었으며, 서로에 대한 의리와 배려를 체감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길과 사랑에 빠졌고, 길이 가진 자연성과 생명성이 담긴 조화로움의 철학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보이고, 보이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오묘한 원리와 이치가 우리가 걷고 있는 길가에 가만히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분홍빛 코스모스와 새빨간 천일홍, 연보라색 벌개미취, 하얀 쑥부쟁이와 그 밖에 이름 모를 수많은 들꽃, 들풀들이 어우러져 피어난 가을날의 나들길은 행복이었습니다. 산과 들, 바다와 하늘이 사람을 품어 조화롭게 펼쳐놓은 이 아름다운 강화의 길에서 나는 다시 수줍은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하면 보이고, 사랑하면 느껴지나니...
길은 사랑이어라.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2일 <고양올레>1주년 생일맞이 걷기 행사로 강화 나들길 2구간(호국돈대길)걷고 와서 쓴 글입니다. # 2구간은 호국돈대길로서 강화역사관~초지진까지 약 17km의 거리로 5시간 내외 소요됩니다.



태그:#강화 나들길, #고양올레, #나들길 걷기, #강화, #고양올레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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