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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그린 초상화앞에 선 이주용 화백.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그린 초상화앞에 선 이주용 화백.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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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숲'이라는 그윽한 의미를 지닌 프렌치 포레스트는 시드니에서도 숲이 울창한 동네로 유명하다. 해거름 즈음에 캥거루가 놀러 와서 물을 마시고 가는 집에 이주용(68) 화백 부부가 산다. 더욱이 언덕 위의 하얀 집이어서 화실 밖으로 보이는 전망이 '숲의 바다'이다.

그는 호주 한인동포사회에서 진보와 정의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자로 알려졌다. 그런 평판이 아니더라도, 그가 호주 이민 32년 동안 그려놓은 삶의 궤적에는 '행동하는 평화주의자'의 발자취가 또렷이 남아있다.

8월 16일 오전, 그가 고 김대중 대통령 1주기에 맞추어서 초상화 작업을 갈무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숲길을 따라서 그의 집을 찾아갔다. 숲속에 깃든 새의 둥지처럼 이 화백의 아틀리에 분위기도 무척 적요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건 그랬다. 그런데 화실 한쪽에서 아주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곳을 유심히 바라보니 아직 표구도 하지 않은 상태의 초상화 한 점이 이젤 위에 놓여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기자가 상상했던 80대 모습의 DJ가 아닌 70대 초반쯤의 DJ가 형형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MB가 '민주투사 DJ'를 부활시켰다"

"대통령 퇴임 후의 DJ한테서 세상풍파를 다 겪어낸 강 같은 평화와 바다 같은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또한 그분의 모습에서 박애정신, 평화주의자, 민족애 등이 분명하게 읽혔습니다. 처음에는 DJ의 그런 모습과 정신을 초상화에 담고 싶었는데 중간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초상화 제작을 끝낸 이주용 화백의 소회다. 아내 최돈혜(66. 숙명여대 시드니동문회 전임회장)씨가 끓여온 국화차 한잔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화백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의 눈빛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느꼈던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이 어른거렸다.

자택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주용 화백 부부
 자택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주용 화백 부부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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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보면 참담하다 못해 암울할 정도입니다. 의도적으로 남북위기를 조장하고, 막무가내로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작금 한국 정치를 두고, 평생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위해 헌신했던 김대중 대통령께서 편히 잠 드셨겠어요?"

망가질 대로 망가진 민주주의,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남북문제, 실정(失政)으로 인한 서민경제 파탄 등 이명박 정부를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런 다음, 왜 형형한 눈빛의 DJ 이미지를 선택해서 초상화를 그렸는지 기자에게 설명해주었다. 선택은 화가의 몫이라면서.

"김 대통령께는 송구스런 일이지만, 지금은 '박애주의자 김대중'을 그릴 때가 아니라는 비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뇌 끝에 '민주투사 김대중'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또다시 그분의 강렬한 투사정신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한 겁니다. 억지 부리는 게 아닙니다. 비켜서서 바라본 조국이 더 정확하게 보입니다."

인생을 바꿔놓은 김대중 납치사건

함경도 태생으로 세 살부터 서울에서 성장한 화가 이주용과 부산 출신의 아내 최돈혜. 편협한 사고인지 모르지만, 문득 그가 어떤 계기로 DJ를 추앙하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지역감정의 광풍이 휘몰아쳤던 지난 40년 어간의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얘기가 나왔다. 사연이 꽤 길었다. 그의 회고를 1인칭 화법으로 정리했다.

"스승이 박정희 정권시절의 청와대 전속화가 정형모 화백이었습니다. 옛날식으로 하면 궁정화가인 셈이지요. 그분의 작품 중에 육영수 여사의 전신초상이 유명합니다. 수제자 얘기를 들었던 나 또한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림 그려서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서 부업으로 코스모스백화점 갤러리를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곳이 일본 관광객을 상대하는 보석상으로 변했습니다. 얼마나 성업이었는지 개업 1년 만에 평생 먹고 살 돈을 벌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서 붓을 놓고 말았지요.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 법. 1973년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그렇게 많던 일본관광객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딱 끊어졌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사건으로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마찰이 생겨서 일본 당국이 관광객 송출을 막아버렸다고 하더군요. 경제보복을 당한 겁니다.

졸지에 크게 확장해놓은 사업을 정리하고 무일푼으로 백화점에서 나왔습니다. 그 쇼크로 어머님께서 돌아가셨고요. 엄청난 시련과 좌절을 겪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붓을 다시 들었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주용 화백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상화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이주용 화백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상화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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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를 원망하면서 민주주의를 배웠다"

"자꾸 누군가를 원망하게 되더군요. 엉뚱하게도 납치 피해자인 DJ를 원망한 겁니다. 일본에서 반정부활동을 한 DJ 때문에 사업이 망했다고 생각한 거지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나한테 사회의식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렵사리 갤러리를 다시 열어서 4년 정도 열심히 일하다보니까 정상궤도에 올랐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김대중 선생이 생각나더군요. 그분 덕분에 보석상으로 떼돈을 번 부자가 아닌, 천직인 화가로 다시 살게 됐다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때부터 DJ 관련 기사들을 챙겨서 읽고, 민주인사들의 강연회 등에 참석해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웠습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앞장서는 김대중 선생의 위대함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됐습니다.

벼랑 끝을 걸어가는 민주인사들의 고단한 삶을 알면 알수록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더욱이 DJ를 원망했던 날들을 기억하면서 그분에게 죄를 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지요. 죽을 때까지 DJ의 민주화투쟁을 후원하겠다고."

호주에서 민주화운동 시작하다

거기까지가 이주용 화백의 한국 회고담이다. 1978년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 와서 시드니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의 나이 서른여섯, 1남 1녀를 둔 가장으로서 이민생활이 녹록치는 않았지만 민주주의 선진국인 호주에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반면에 한국의 정치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민 이듬해인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1980년 5월에는 호주국영 abc-TV의 긴급뉴스를 통해서 광주민주화항쟁의 끔찍한 상황을 전해 듣고 전율했다. 더욱이 그가 평생 후원하기로 한 DJ가 사형언도를 받았으니.

그렇다고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처럼 호주에서도 떨쳐 일어나야할 때라고 판단한 것. 이주용 화백은 "호주에서는 뭘 하든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생각으로 시드니동포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호주에서 만난 동지들을 규합해서 1986년에 발족한 <재호정의평화협의회>는 보수일색이다시피 했던 시드니 동포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반 군사독재 서명운동'은 물론이고, 리영희 교수와 고은 시인 등을 호주로 초청해서 시국강연회를 열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마침내 호주동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만 명 남짓한 동포사회에서 '반 군사독재 성명서'에 2천여 명이 서명해서 그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청와대로 보냈다. 바로 그 즈음에 6.29선언이 나왔고 호주에서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이주용 화백이 독재정권 당시 호주에서 벌였던 서명운동 명단 복사본.
 이주용 화백이 독재정권 당시 호주에서 벌였던 서명운동 명단 복사본.

서명운동 하려다 테러위협까지 받다

그러자 시드니총영사관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재 기관원이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해왔고 집요한 방해공작을 펼쳤다. 특히 서명운동을 시작하는 날에는 동포사회의 깡패를 동원해서 테러를 가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옷을 여러 개 끼어입는 방식으로 대비했다.

사사건건 <재호정의평화협의회>와 맞섰던 관변단체가 여럿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의 조국 사랑의 방식으로 인정해준 것. 그들 대부분이 시류에 편승해서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어서 진보성향 인사들의 강한 정신력과 투쟁력에 비하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한편 1996년에 김대중 선생이 시드니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DJ가 세계무대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 또한 DJ의 호주 방문 직전에 발족된 <후광후원회> 호주지부 회원들은 DJ 일행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과정에서 DJ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아태평화재단후원회> 호주지부 발족을 건의해서 DJ를 수행했던 <아태평화재단> 임동원 사무총장의 동의를 받았다. 그후 <아태평화재단후원회> 오유방 사무총장이 시드니를 방문해서 호주 지부가 정식으로 출범됐다. 그를 통해서 여러 차례 후원금을 전달했고.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당선과 동시에,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누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아태평화재단후원회> 호주지부는 미국, 일본 지부 등과 함께 지체없이 해체됐다. 이주용 화백은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됐지만 다른 회원에게 기회를 주고싶어서 양보했다. 다만 새 정부의 남북화해 사업을 지속적으로 성원한다는 다짐만 새롭게 했다.

DJ 집권 후부터 이주용 화백은 작품 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그가 32년 동안 호주에 거주하면서 제작한 작품의 숫자가 2천여 점이나 된다. 그 작품들은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 캐나다 등에서 개인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작년 8월 시드니에서 열린 고 김대중 대통령 추모제에 참석한 이주용 화백 부부.
 작년 8월 시드니에서 열린 고 김대중 대통령 추모제에 참석한 이주용 화백 부부.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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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이주용 화백은 김대중 대통령을 여러 차례 만났다. 그때마다 그분의 초상화를 생전에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적절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2009년 8월, 김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큰 낭패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이 화백은 시드니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추도식장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아태평화재단>에서 가져온 김 대통령 사진을 영정으로 갖다놓았다. 그런 다음, 당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주기 즈음까지 초상화를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추도식을 마친 다음 "이제 그분의 초상화를 그릴 때가 됐다. 김 대통령의 불굴의 의지가 담긴 역작을 제작하고 싶다"고 다짐한 이주용 화백은 1년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민주투사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투사된 김 대통령의 초상화는 8월 18일 저녁,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리는 1주기 추모식의 영정으로 모셔질 예정이다.

"호주에서는 '아시아의 만델라'로 추앙받는 세계적인 평화주의자인데, 이명박 정부로부터 그분의 위대한 업적이 전부 지워지는 것을 보면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김 대통령이 마지막 일기에다 쓰신 대로 나 또한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걸 믿기 때문입니다."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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