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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보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습니다. 새삼스레 이렇듯 길을 걷는 일이 행복했습니다.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며 오늘은 맘 가는대로, 길 이어진 데로 가보자 싶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만난 도로에서 '백천사' 이정표만을 보고 무작정 내달렸습니다. 하지만 무심한 듯 보이는 길이 인도한 곳은 뜻밖에, 한편으로 필연 같은 사연들을 간직한 자리였습니다.  

 

 

교토의 귀(코)무덤, 사천의 머리무덤

 

사천읍에서 나와 사천교를 건너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논밭을 지났습니다. 흐뭇한 풍경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깨밭 갖구는 허리 굽은 노모에게, 무료한 듯 나와 앉은 백발의 노부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장맛비 이후 폭염을 예고했지만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이따금씩 노변의 잠자리떼가 가슴팍에 와서 툭툭 부딪혔습니다. 그러던 중 '선진리성'이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기심이 당겨 들러봤습니다. 

 

 

선진리성 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남이섬의 메타세콰이어길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렇게면 온종일도 달리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오솔길 왼편에 선진리성인가 싶은 곳이 나왔습니다. 기와를 얹은 담벼락 안으로 왕릉 같기도 한 큰 무덤 하나가 보였습니다. 

 

이른 시각이라 사람이 없고 장소를 설명해줄 안내문도 흔치 않아 잠시 서성였습니다. 그러다 좀전에 본 큰 능이 '조명군총'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찾았습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모양의 그것은 하지만 왕의 묘가 아니었습니다.

 

 

사연인즉 조명군총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선과 명나라 군사의 무덤이나, 그 안에 든 것은 온전한 사체가 아닙니다. 몸통은 온데간데 없고 그나마도 귀와 코가 잘린 머리 뿐입니다. 이날의 여정이 필연 같다 한 건 이런 연유였습니다.

 

지난 3월과 5월, 일본의 교토에서였지요. 그곳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목격한 '미미즈카'는 바로 조명군총 안의 수천 구 두상에서 배어간 귀와 코를 묻은 것이었습니다. 부러 그 존재를 무시하려는 듯 이정표 하나 없이, 이 참담한 전쟁을 이끌며 전공의 표식으로 사체의 난도질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 옆에 무심히 놓여진 서러운 흔적이었습니다.

 

 

조명군총에서 나와 오른편으로 걸어가면 세로로 긴 작은 비석이 있는데 이것이 '이총'입니다. 1992년 4월에 미미즈카를 찾았던 사천 문화원과 삼중스님이 처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래려 그것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 안치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 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던 길 따라 끝까지 가면 선진리성이 있습니다. 이곳이 무덤 속 망자들이 살아서 최후를 맞은 곳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도 그저 우울할 따름입니다. 돌아나가는 길, 수풀 스삭이는 소리가 마치 지나간 시간 속에서 결코 잊어서 안 될 것이 있노라 당부하는 것 같았습니다.

 

 

목탁 치는 우보살, 그 삶도 서글퍼라

 

마음 안에 묵직한 추 하나 들이우고 다시 달렸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싸늘해진 가슴을 어루만져 줬습니다. 백천사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습니다. 멈춰서 길을 물을 때마다 "거까지 우예 가려고, 그것도 자전거로." 하는 걱정이 돌아왔지만 이제 그런 우려는 식상합니다.    

 

사천읍에서 출발한 지 3시간여쯤 지났을까 무사히 '백천사 500m' 이정표도 찾았습니다. 하지만 여기부터가 산길이라 힘을 더 내야 했습니다. 와룡산 품에 안기기 전 덕곡저수지 앞에서 본 마을 전경은 또한번 감탄이었습니다. 오직 몸소 걷는 자만이 음미할 수 있는 자연의 진면목입니다.

 

 

백천사는 세계 최대 약사와불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또하나 목탁 치는 '우보살'이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타면서 더욱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도착해서야 언젠가 와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스님의 죽비 세례를 맞고 약사와불 몸 속에 들어갔을 때 기억이 났습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커져서인지 절 풍경은 그저 평이했습니다. 

 

우보살은 약사와불전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갓난 송아지를 포함한 다른 세 마리 소와 축사를 함께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축생이 대견타 하여 칭송받던 우보살의 삶이 TV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른 듯 했습니다.

 

불전함 놓인 축사 한쪽에 비쩍 마른 노인이 회초리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보살이 고개를 떨구거나 목탁 치기를 게을리 하면 그 순간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고개 들어! 앞에 보고, 울어!"  동물원에서 쇼를 위해 사육당하는 여느 짐승과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쉴 새도 없이 굵은 혀를 돌려대는 우보살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 백천사 우보살의 고단한 하루 우보살이 고개를 떨구거나 목탁 치기를 게을리 하면 그 순간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고개 들어! 앞에 보고, 울어!"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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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안내하는 보살에게 물어보니 우보살 '영업시간'은 해 떠서 밤 8시쯤까지라 했습니다. 그 이후엔 본인도 절을 떠나니 모르겠다 했습니다. "소를 저리 하루종일 닥달하냐" 물으니 돌아온 답이 가관이었습니다. "소귀에 경읽기라 저리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우보살 곁에 서서 울어라, 울어라 하는 것이 불상 옆에 앉아 "부처님 말해보시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백천사 주지 스님께 청하건대, 노인의 손에서 회초리 놓게 하시고 목탁 치는 장한 우보살에 생업의 자유를 보장해주십시오.  

 

사천에 사천짜장 빼고 다 있다

 

 

사천 하면 우스갯소리로 사천짜장이나 들먹였습니다. 그 외엔 어릴 적 외가 가던 길 스쳐간 동네로만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길 따라 구석구석 둘러본 사천은 볼거리, 먹을거리, 이야깃거리까지 '삼거리'가 넘쳐났습니다. 

 

백천사 보고 나와 최상의 일몰 감상하러 실안으로 가도 좋고 축제가 한창인 삼천포로 갔다 내친 김에 다리 건너 남해로 가도 좋습니다. 해수욕과 바다 비경을 보고 싶다면 근처 남일대해수욕장도 훌륭합니다. 유람선을 타도 즐겁고 가는 길 중간중간 대방진굴항 같은 숨은 명소도 둘러보십시오. 

 

삼천포대교 아래 대교광장에선 지난 29일 시작된 세계타악축제가 오늘밤 8시에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오는 4일부터 5일간은 팔포매립지 일원에서 전어축제가 열리고 이어서 7일과 8일엔 남일대 해수욕장에선 바다영화제를 개최합니다. 올여름 피서 계획은 세우셨나요? 아직도 고민 중이라면 경남 사천으로 와보세요. 못 알아보고 행여 못 보더라도 우리가 어느 찰나에 마주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태그:#국내여행, #백천사, #미미즈카, #귀무덤, #우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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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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