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과거 정선하면 정선 아리랑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레일 바이크와 정선5일장이 더 유명하다.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람구암자(八藍九菴子) 유점사 법당 뒤에 칠성단 돋우 고 팔자에 없는 아들·딸 낳아 달라고 백일 정성 석달 열흘 노구에 정성을 말고 타관객리 외로운 사람 괄세를 마라..... 꼬치밭 한 골을 못 매는 저 여자가 이마 눈썹은 여덟 팔(八)자로 잘 가꾸네 꽃 본 나비야 물본 기러기 탐화봉접(探花蜂蝶) 아니냐 나비가 꽃을 보고서 그냥 갈 수 있나 나비 없는 강산에 꽃은 피여 멋하며 당신 없는 요 세상 단장하여 멋하나 날 따라오게 날 따라오게 날만 따라오게 잔솔밭 한중허리로 날 따라오게 내가야 왔다가 간 뒤에 도랑에 물이 뿔거든 내가야 왔다가 간 뒤에 울고 간줄 알아요.......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담배불이야 반짝반짝에 님 오시나 했더니 저 몹쓸놈의 반딧불이가 나를 또 속이네 당신은 거기에 있고서 나는야 여기에 있어도 말한 마디 못 전하니 수천리로구나 ......살개바우 노랑차조밭 어느 누가 매느냐비 오고 날 개는 날에 단둘이 매러 갑시다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도 풀은 풀이 아니냐 하루밤을 자고 가도 임은 임일세.....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남자더냐 산 넘구 물 건너면 또 남자 있겠지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여자더냐 산 넘구 물 건너면 또 여자 있겠지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 같다면 오고 가는 친구가 모두 내 친굴세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질아질 성마령(星摩嶺) 야속하다 관음베루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정선아리랑에 나오는 가사처럼 정선 지방은 산이 높고 곡이 깊어 물이 흔하고 장마가 심했다. 그러다 보니 산산곡곡에 사는 화전민은 장마철이 되면 산에 갇히기 일쑤였다. 그런 정선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도 아니요, 전후도 아니다. 2차산업 부흥기에 석탄 수요가 늘며 산이면 산, 곡이면 곡에 길이 나기 시작했고 그 길을 따라 라디에이터에 SMC라고 전면에 크게 붙인 새한자동차의 덤프트럭이 다니면서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도시 중 하나가 구절리다. 탄광지대는 포괄적으로 보면 정선, 태백이다. 그러나 정선은 사북, 고한을 제외하면 그다지 탄광이 많지 않고 드문드문 자리했다. 그나마 탄광지대라고 부를 수 있던 곳이 구절리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탄만을 따로 실어 나르기 위해 기차길이 놓일 정도였다.

석탄 산업이 한창일 때 구절리는 그 당시 도시에 있을 것이 다 있던 도시였다. 지금 정선읍에서도 찾기 힘든 클럽이 한 집 건너 한 집 정도였다고 하니 대단한 부흥이 아니던가. 그때 탄광촌의 집들은 대부분 대충 급히 지은 블록집이거나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단열은 고사하고 외부의 탄먼지가 집으로 들어올 정도의 허술함을 가진 집이었다.

그나마 집 같이 지은 집들은 탄광지대를 벗어나서 더 깊숙히 자리한 농가였다. 탄광지대보다 더 깊숙한 계곡지대나 높은 산지에 자리한 집들이 집다운 집들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풍부하고 쉽게 수급이 가능한 나무와 진흙 때문이었다. 당시 이 같은 집은 매우 잘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집은 부순 집들의 자재를 재구성해 사용, 여기저기 짜맞추기 흔적이 있었다.

처음 이 집을 지을 때는 필시 흙집이었을 것이다. 후에 시멘트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흙 위에 시멘트를 덧바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밖에 없는 방인 안방문은 전통의 사릿문이 아니다. 급히 쉽게 구성한 겹치기 방식을 사용했다. 집은 짓지만 경제적 여유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엌문은 전통적으로 볼 수 있는 소나무 판자를 사용했다. 경제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여 연기가 많이 나는 만큼 연기 배출과 공기 유입을 위해 필요한 장치와 방법으로 작은 지혜가 엿보인다.

정선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 때문인지 타지보다 샘이 적다. 그래서 계곡을 끼고 집을 지어왔다. 산중턱에 가끔 집들이 있는데 그런 곳은 작은 계곡을 끼고 있거나 드물게 샘이 있다. 작은 계곡을 끼고 집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산이 높아 샘이 잘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싸리를 잘라 묶은 벽, 흙을 바르려다 중단한 흔적이다. 강원도 깉은 산골에서는 수수대도 구하기 쉽지 않아 산에서 싸리를 베어다 벽체바름의 살로 사용했다.

정선 곳곳에는 이와 같거나 유사한 집이 아직 남아 있다. 정선장도, 레일바이크도 나름대로 좋은 여행이지만 정선 엣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찾아 보는 것도 소중한 여행이 될 것이므로 옛가옥 여행도 한 번쯤 해볼 만하다.

구절3리 김영숙씨댁 앞에서
▲ 구절리 소금강 계곡 올챙이 구절3리 김영숙씨댁 앞에서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전형적인 정선 옛집으로 개량하지않아 슬레이트 지붕을 그대로 덮고 있다.
▲ 구절 3리 김영숙씨대 가옥 전형적인 정선 옛집으로 개량하지않아 슬레이트 지붕을 그대로 덮고 있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그옆에 지금은 사용치않아 빗놓인 가마솥이 있다.
▲ 양은솥과 아궁이 그옆에 지금은 사용치않아 빗놓인 가마솥이 있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연료를 나무로사용해 연기에 그을린 천정 서까래들
▲ 그을린천정 연료를 나무로사용해 연기에 그을린 천정 서까래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전선기구가 옛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 나무를 연료로 사용해 그을린 천정의 목구조들과 구식 전선배선 전선기구가 옛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이당시 정선근처 시골의 모든 가옥에서 볼수 있는 풍경이다.
▲ 소나무 판자로 만든 부엌문 이당시 정선근처 시골의 모든 가옥에서 볼수 있는 풍경이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타 지방에서는 수수대를 주로 사용했지만 정선과 근처지방에서는 수수를 구하기 힘들어 싸리도 많이 사용했다.
▲ 흙을 바르기위해 엮은 싸리살 타 지방에서는 수수대를 주로 사용했지만 정선과 근처지방에서는 수수를 구하기 힘들어 싸리도 많이 사용했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아직도 장작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작더미
뒷편에 정선 찰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다.
▲ 장작더미 아직도 장작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작더미 뒷편에 정선 찰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다.
ⓒ 김장회

관련사진보기



태그:#정선, #레일바이크, #구절리, #계곡, #여름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